書/논문

정치운영론을 넘어선 개혁이념으로서의 蕩平論

同黎 2019. 3. 25. 21:48

정치운영론을 넘어선 개혁이념으로서의 蕩平論

김성윤, 1997, 「제11蕩平의 개념과 蕩平論의 대두」 「3蕩平論의 추이」,

朝鮮後期 蕩平政治 硏究, 지식산업사

 

 

박세연

 

 

1. 들어가며

 

 대부분의 탕평 연구는 국왕과 붕당들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한 調劑保合의 정치운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성윤은 이러한 기존의 연구를 인정하는 가운데 탕평정치의 이념, 정책적 지향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18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사가 연계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탕평은 변화하는 국가사회의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 개혁적 정치이념이고, 정치적 조제보합론은 그 실현방법 중 하나임을 역설하였다. 즉 탕평의 개념은 단순한 정치운영론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이념으로 설정하고 탕평을 주도했던 인물 및 正祖의 경세론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탕평의 정치세력이 이루어고 했던 새로운 사회상을 그려보려던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정치사를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종합적으로 살펴보려는 대에서 그 의의를 알 수 있다. 특히 탕평을 주도했던 이들의 정치이념을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비록 정조대로 한정되는 한계는 있지만) 18세기가 단순한 국왕의 전제정치 시기가 아니라 붕당정치라는 기존의 질서를 깨고 새로운 정치, 사회적 질서를 지향하는 시기였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기존의 붕당정치론에서 탕평정치를 붕당정치의 붕괴인 환국을 수습하기 위한 국왕 중심의 일시적 억압기로 부정적으로 보았던 시각을 극복하고 탕평기를 긍정적으로 보려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박광용이 제시한 영조대의 완론탕평과 정조대의 준론탕평이라는 시각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대를 탕평의 시도와 조정기로 정조대를 탕평의 완숙과 실행기로 봄으로써 영정조대를 연속적 시각으로 바라 본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저자는 더 나가아 탕평과 반탕평의 구도가 거의 모든 면에서 대립했다고 본다. 즉 토지개혁과 노비제 혁파의 찬반, 명분론과 탈명분론, 육경학 중심주의와 주자학 지상주의, 지방세력과 중앙세력, 농공상 삼업병립론과 본말론이 모두 이러한 대립이었다고 본다. 즉 탕평을 둘러싼 대립은 조선후기 진행된 당쟁의 귀결점이며, 탕평은 지배층으로부터의 개혁이 추구된 마지막 단계라고까지 보고 있다.

 

2. 탕평의 개념: 의리탕평과 실리탕평

 

 김성윤의 탕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탕평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서경』의 洪範九疇를 검토한다. 箕子周武王에게 진달한 경세의 도인 홍범구주는 洛를 구체화 한 것이다. 홍범구주는 고대의 체계 안에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象水學的 성격을 띄고 있어 가운데 5 皇極을 두고 음양오행에 맞추어 각 항목이 정렬되어 있다. 홍범구주는 하나의 통일된 체제를 이루고 있으며 修身的 요소와 함께 八政과 같은 구체적인 군주의 정사 지침과 같은 내용도 있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은데 결국 홍범구주는 국왕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기초한 이념이 황극탕평론으로 표출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또한 저자는 기존에 주목하지 않은 八政에 주목하며 홍범구주 안에는 토지제도와 군사제도 같은 탕평책의 사회경제적 지향을 의미하는 내용도 담겨있다고 보았다.

 

 김성윤은 탕평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목표로서의 의미로 황극이 세워져 왕도가 최고의 상태에 이른 이상적인 상태를 이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탕평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은 시세와 정론에 따라 그 구체적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두 번째는 각 당색을 고루 등용해 당쟁을 안정시키는 恢蕩의 정치운영 방식으로 협의의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종래 연구가 이 두가지 중 후자만을 탕평정치라고 보아 역사적 의미를 축소기켰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정국을 안정시키는 탕평에 대해서는 누구나 원칙적으로는 동의했기 때문에 탕평에 나아가는 방법과 궁극적 목표에 대한 상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탕평론을 위에서 살펴본 홍범의 의의를 부정하며 기존의 주자학적 가치를 고수하는 반탕평파의 논의인 의리탕평론과 반대로 새롭게 등장하며 홍범구조를 기초로 삼고 육경을 중시한 실리탕평론으로 나누었다.

 먼저 의리탕평을 살펴보면 이들은 전통적 주자학파로 경세학으로서의 홍범구주의 의이를 부정하는 경우도 보인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노론의 金履安洪奭周를 들고 있다. 안동 김씨 출신으로 김창협의 학통을 계승한 낙론계 학자인 김이안은 낙서와 홍범구주의 관련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의 전수에서도 기자를 제외했다. 김이안은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홍범 속에 나타난 황극탕평의 원리에서 회의적이었다. 홍석주 역시 낙서와 홍범구주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또한 그는 홍범은 수신론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이러한 이해 결과 破朋黨反對論, 君子小人明辨論을 바탕으로 군자당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시각은 노론 주류의 반탕평적 의리탕평론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반면 탈의리적인 실리탕평론이 제시되었다. 이들이 중시한 것은 홍범구주로 이를 하나의 經書로 이해했하여 국가운영의 원리로 상정했다. 특히 星湖 이 지적하고 있듯이 정전법의 복구를 탕평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를 불가능하다고 보는 주자의 시각은 비판하고 있다. 韓百謙 역시 기자의 정전제가 홍범규쥬의 전체 配位와 상응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홍범을 수신의 방법으로 기자를 명분과 의리로 이해하던 종래의 관념적 이해와는 달리, 경제적 公評政制의 정비가 탕평을 달성하고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이해를 보여주느 것이었다.

 홍범구주에 대한 가장 새로운 해석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약용은 낙서를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거나, 상수학과 구주를 연관시키는 등 홍범구주의 신비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현실적 이해를 바탕하여 井田形의 모습으로 새로운 홍범구주도를 만들었다. 정약용의 홍범구주도는 원형 대신 정전법의 모습이 홍범에 맞다고 하여 정전형을 취했으며, 가운데 황극을 중심으로 天時에 관한 것은 위층에 군주에 관련된 것은 중간에, 백성에 속한 것은 하래에 두었다. 또한 좌우로는 우편에 원인을, 좌편에 결과에 해당하는 것을 두어 조응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하좌우 조응과 함께 가운데 황극에 중심을 두어 군주에게 긴요한 것을 황극 가까이 두고 추상적인 것일수록 멀게 배치하여 철저히 홍범구주를 황극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7

稽疑

4

五紀

1

五行

8

庶徵

5

皇極

2

五事

9

福極

6

三德

3

八定

 정약용의 홍범 이해의 특징은 실사구시적 해석에서 잘 나타난다. 정양용은 신비주의적 해석을 모두 배격하고 오행설을 제거했다. 또한 군주의 수신적 측면 보다는 經世에 필요한 권력적 재용적 측면을 강조하며 군주의 전제권을 강조하였다. 八政에 대한 이해도 기존의 직관과 연결시키는 설명이 아니라 수입과 지출에 관한 財用斂出之政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산에게 있어서 황극은 군수가 상벌, 생사여탈, 교화를 비롯한 모든 권한을 백성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실사탕평은 정쟁을 오히려 부추기는 의리탕평에 대한 대항이념으로 황극으로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책적 정책적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3. 숙종대 붕당정치의 위기와 박세채의 탕평론

 

 탕평이 재기된 배경에는 숙종대 환국으로 인한 정치상황의 위기가 있었다. 남인과 서인 ,소론과 노론이 대립하며 당쟁이 격화되자 당론을 조정하여 화합케 하는 조제보합론이 탕평론의 형식을 띄고 등장하였다. 이러한 정국운영방식으로서의 탕평은 숙종대 후반 약 20년 동안 실제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시행되었으며 이는 朴世采의 탕평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박세채는 서인 명문 가문 출신으로 노소 분기 때 양자를 오가며 서로를 중재하였으며 상전에는 소론의 영수로 대접받았으나, 사후 문도들은 절충만 힘쓰는 탕평파에 반달해 노론에 기울어졌다.

 박세채의 탕평론은 『南溪先生文集』에 들어있는 「陳時務萬言疏(이하 만언소)」에 잘 나타난다. 숙종 9(1683)14(1688) 올린 이 상소는 영정조대에 상당부분 현실화되고 탕평정치의 정책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만언소」에 나타나는 박세채 국가체제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奮大地 박세채는 요순 삼대의 왕도정치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부분별 개혁안은 바로 이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는 방법론이었다.

勉聖學 박세채는 군주의 수신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기존의 德化萬能과는 다른 것이었다. 바로 군주의 책임과 주도권을 강조한 것이며 그렇게 하여 공사를 분명히 가려 왕도 정치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군자 소인을 가리는 것 역시 강조되는데, 주목되는 점을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에 당이 없다는 것이었다.

正內治 이는 군주가 집안을 다스리는 것으로 그 방법으로 궁금을 엄격히 하고 척신을 멀리하며 내수사를 폐지하고 사옹원이나 상의원과 같이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군주가 절용을 솔선하여 왕실이 모범이 되도록 주장했다

④立規模 정치의 중용을 달성하기 위하여 에 마음을 기울이고 사사로운 奸僞를 가려내는 尙忠과 엄한 기강을 세우고 관용을 조절하는 主嚴濟寬을 강조하였다. 관후하기만 한 정치는 문치에 기울어져 나라를 약하게 하니 이를 조절해야 한다며 제갈량과 주자의 예를 들었으며 이른 公論을 위주로 하는 붕당의 정치관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振紀綱 군주가 기강을 확립하는 방법은 국정을 총괄해 상벌을 공정히하고, 賢邪를 판별하고, 붕당을 타파하며 요행을 억제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박세채는 역대의 화란이 붕당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시비를 명변하되 죄과가 무거운 자만 처벌하고 그 외의 인사는 통용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붕당론이 조정론이나 노론의 시비명변론과는 다르다고 했는데 이는 노론의 붕당긍정론을 부정했고 명변의 기준도 홍범의 황극의 뜻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붕당을 깨기 위해 율곡의 파붕당론을 천양하고 영남 유신을 수용하자고 하였다. 요행을 억제하자는 것 역시 가문과 당색에 따라 관직이 발탁되는 것을 막고 실력에 따라 공평하게 하자는 것으로 붕당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求賢才 인재 등용책으로는 과거 외에 조광조의 현량과를 참조해 덕행과를 마련해 천거를 활발히 하자고 제시하고 있다.

開言論 언로를 열어 백성들의 말을 듣는 것이 황극의 요지가 된다는 것으로 단순한 求言이나 納諫을 넘어 민간에서 승정원에 상언할 수 있게 하도록 하자는 것으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制治法 정치는 제도의 정비에 따라 잘 구현된다는 인식이 반영된 부분으로 세종과 성종의 정치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그리하여 비변사를 폐지하고 사실상 의정부를 복설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대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삼공육경과 삼사장관, 감사의 僚천거권 확보나 수령직을 엄격히 하자는 것과 수령을 구임토록 할 것 등 역시 황극을 위한 제도 정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述祖典 이는 선왕의 치적을 탐구하여 시의에 맞게 변통하자는 것으로 『경국대전』을 검토해 수정과 보안을 하자는 것이다. 특히 남계는 정도전의 『경제육전』을 반영해 조선전기의 사례로 수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법제 정비는 영조대 『속대전』의 정비로 완성되었다.

法先王 이는 요순의 정치를 구현하자는 것으로 鄕黨의 질서 확립, 정전제의 시행, 학교의 부흥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박세채는 특이하게 상업과 농업이 서로 도와준다 하여 상업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정전제를 통해 소농사회의 안정을 도모했다. 학교에 잇어서는 주자와 이이의 향약을 참조하되 관 중심을 향약을 주장했다.

修軍政 이는 군제개혁에 관한 내용으로 많은 군영을 통합하고 군사를 줄여 정예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專守禦 군사 방어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으로 산성을 정비하고 서북지방을 정비할 것과 수군을 강화할 것 등을 진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박세채의 국가체제론은 몇 가지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삼대의 정치로의 복구를 당위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둘째, 정전제를 사회구성의 기본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우선주의는 의리지상주의에 입각한 노론 강경세력과는 성향을 달리한다. 셋째 주자학 지상주의자들이 이상화하는 송대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조선전기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넷째 정치체계상으로 국왕의 정국 주도와 붕당타파 및 제도 정비를 통한 공론정치를 주장하여 명본론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학적 정치논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왕권주의를 중심으로 한 정치윤리를 강조한다. 다섯째 정전제와 함께 兵農一致를 강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군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여섯째 율곡과 제갈량에 대한 긍정론을 그의 서인적 입장을 보여주며 이는 이후 정조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박세채는 탕평정치라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탕평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4. 탕평론의 추이: 英祖調劑蕩平正祖實事蕩平

 

 박세채가 제시한 탕평론은 숙종대를 지나 영정조대에 구체적으로 시행된다. 영조대는 탕평의 목표가 이념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이 추구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저자는 당론의 조정에 따른 탕평 기반의 구축이 주력했다는 점에는 ‘調劑蕩平’이라고 특징짓고 있다. 영조는 경종에 대한 노론과 소론·남인의 다툼 속에서 즉위하였으며 당쟁으로 인해 직위 초 무신란을 격어야 했다. 영조는 이러한 정치적 파행의 원인이 붕당의 사욕 추구에 있다고 하면서 탕평정치를 추진했다, 영조의 탕평정책은 吏郞通淸翰林會薦의 혁파와 山林의 정국주의 방지, 및 균역법 시행으로 압축된다. 이는 군자당을 인정하는 주자의 붕당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탕평파들이 여러 의리에 대한 절충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의리 논쟁이 일어나는 탕평과 반탕평의 대립이 영조대의 정국이었다.

 영조대 당평파로 등장한 인물들은 소론의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양득중, 유언통 등과 노론의 홍치중, 원경하, 남인의 오운광 등이었으며 서인계는 주로 박세채, 남인계는 주로 이익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붕당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붕당 타파를 주장했으며 주자와 구양수의 붕당론도 부정했다. 이들은 명분 의리문제가 지나치게 되어 실리를 막는 것을 걱정했으며 군주 주도의 황극탕평론과 斯文 확대의 개방적 학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관료제 운영의 개혁을 추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비해 의리의 실현을 주장한 반탕평론의 대표주자로는 노론의 한원진과 이의현, 민진원 등이 있었다. 이들은 주자학 이념을 고수하면서 군신의 대등성을 강조하고 擇君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황극의 해석 역시 군주의 주도관 보다는 시비를 명변하는데 있다는 주자의 설을 주장했다. 이들은 탕평이 선악을 뒤섞이게 한다고 비판하였고 반개혁적 보수논리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영조는 자신의 즉위과정에서 일어나 신임의리 문제를 처리하면서 노론의 입장을 점차 수용해나갔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제보합하며 수십년에 걸쳐 당론을 조정했고 이 결과 소론탕평에서 노론탕평으로 정국이 재정립되었다. 신유대훈으로 정립된 영조대 후반의 이러한 정국은 노론 완론과 영조의 명분강화가 합쳐지며 이루어졌다. 이후의 국면은 척신당으로 변해가는 완론과 이를 비판하는 준론의 투쟁으로 완론과 준론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탕평 추진을 위한 개혁세력의 형성은 방기되고 있었다. 또한 탕평정치의 본래 영역인 사회체제론적 지향은 정국의 경색화와 보수적 노론의 반발, 척신정치의 등장 등으로 본격적으로 제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영조대의 조제탕평은 청요직 혁파 등 탕평파 정국 주도를 위한 기초를 마련해주었고 서얼허통과 균역법 실시 등을 통해 일부의 성괄르 마련해주었다.

 영조 다음으로 즉위한 정조는 신하가 제시하는 탕평론을 수용하는 양태였던 앞의 경우와 달리 스스로 이념을 선도하였다. 정조는 『大誥』를 통해 본격적 탕평의 추진을 선언하는데 여기서는 制民産, 成人才, 詰戒政, 裕財用을 천명하여 교화에서의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면 현재 경장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며 이를 관료는 문론 위졸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所懷를 진달하도록 하였다. 정조의 『大誥』는 개혁의 당위성을 국시로 상정해 여타 의리보다 우위에 눈 것이었으며 이는 탕평론의 구체적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정조 19(1795) 誠之의 후손 梁周翊이 임금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 政制를 하나로 통일하는 皇極에 의한 一極之治를 행할 것을 상소하였다. 정조는 양주익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면서 職田制士庶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언급하고, 병농일치는 장용영으로 시험하고 있으며, 양천통일은 노비제혁파가 임박했음을 밝히며 양주익을 병조참의로 임명했다. 이 밖에도 영의정 鄭存謙, 蔡濟恭 등도 정조의 황극탕평론을 지지했는데, 특히 채제공은 붕당의 분기를 反一極 으로 설명하며 삼대에는 모든 것이 그 마음이 하나로 歸極했다고 하며 분열성을 가장 큰 폐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정조대에는 황극탕평론이 주자학의 정통 의식과 대립하는 급진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장령 尹弼秉은 상소에서 홍범의 天道가 기자-무왕-영조로 이어졌다고 도통을 설정하고 군왕만을 도통의 전승자로 설정해 주자-송시열의 도통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기자묘를 문묘 옆에 대등하게 설립하자는 제기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와 같이 저자는 영정조대는 탕평의 목표와 접근 방법에 따라 의리탕평과 실사탕평이 대립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의리탕평은 단순한 윤리론의 성격을 넘어 양반지주 중심의 사회적 위계질서를 수호하는 보수논리로써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로 실리탕평은 명분 의리보다 실사와 실용에 따른 실익과 실리를 중시하여 사회성원들 간의 조화와 평안을 탕평으로 이해하여 병농일치, 토지개혁, 농상공의 균형발달, 양천제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탕평은 일시적, 제한적 정치운영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학적 비판의식과 개혁구상에 의해 나타난 실학의 정치화였다.

 

 

5. 마치며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논문은 탕평론을 단순히 정치세력간의 갈등을 조제보합하려 한 정치운영론이 아니라 구체적 정책관이 반영된 정치이념으로 보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면서 18세기의 사회경제사와 복합적으로 정치사를 이하하려 하였고, 특히 탕평파의 구성원에 대한 경세론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며 탕평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국가의 방향성까지 파악하려는 점에서 기존의 정치사를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방향성을 홍범구주에서 제시하는 정치관과 구체적으로 비교하고 추상적으로 보이는 홍범의 국가체제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탕평기가 단순한 붕당정치 붕괴기의 유예기간이 아니라 붕당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정치론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고, 이는 붕당정치론의 한계가 언급되는 가운데 탕평정치를 이해하는 단초를 주고 있다.

 다만 이 논문이 쓰인 시대적 한계가 눈에 띄기도 한다. 18세기의 경제적 발전과 새로운 계급의 등장 등 ‘보편적 역사발전 단계’에 맞추어 하부구조가 이끄는 상부구조의 모습을 그대로 논문에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선행연구에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지만 본고에서는 특히 붕당에 대한 계급론적 이해가 강하다. 즉 노론(강경파)은 기존의 봉건 기득권세력을 지지하는 반기득권적 보수주의자이자 반탕평파로, 탕평파를 구성하는 남인과 소론은 붕당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개혁세력이자 탕평파로 규정짓는 것이다. 소론 중에서도 의리와 명분에 충실하고 탕평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으며 이들의 주도로 무신란과 을해옥사가 일어났다는 점과 노론 중에서도 탕평에 적극적인 세력이 많았다는 점 등을 고려해보면 각 붕당을 그대로 탕평과 반탕평의 구성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계급론으로 이해한다는 점 및 이에 대한 구체적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이 논문에서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

 이와 연계되어 실학파와 탕평파를 동일시하는 시각을 별다른 설명 없이 동일시하고 있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표적 실학파로 본고에서 인용되고 있는 성호 이익의 경우 기호남인으로 그 형 이잠이 노론이 동궁(경종)을 모해하려 한다는 상소를 올려 죽음을 맞게 된다. 이익 역시 예론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등 저자가 말하는 ‘의리탕평’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박세채의 경우 역시 정경희가 지적하듯이 노론 측으로 입장을 바꾸어 그의 문하는 노론으로 자정하고 있다.1) 이처럼 실학파가 실사구시를 추구하고 개혁을 의리보다 중시한다는 저자의 서술은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는 실학파와 의리파, 실리탕평과 의리탕평이 꾸렷이 구분되지 않으며, 실학파가 모두 정치적으로 탕평을 지지했다는 서술도 부족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大同法을 다루며 정책 결정과정에서 붕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없다는 이정철의 견해를 되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2)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영조대에 대한 지나친 폄하이다. 저자는 정조대 탕평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조대는 탕평의 기초가 마련되었던 시기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것이 숙종대 경색화된 정치집단간의 세력이 풀지 못했고 탕평파가 척신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영조대 계속되는 정치적 갈등은 임오화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마무리되고 이후의 의리문제는 정조대까지 정치적 갈등의 문제가 된다. 정조가 총애했던 탕평파가 홍봉한과 같은 척신이 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영조는 균역법이라는 군정개혁을 이루어 내었으며 이 과정에서 노비문제 역시 다루어졌다. 때문에 탕평론이 제도개혁론이라면 영조대를 결코 개혁의 기초만 마련된 시기라고 한정지을 수 없다. 척신파의 대표로 손꼽히는 홍봉한의 경우 대동법의 마지막 단계인 해서, 관서, 관북에 대한 상정법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실시한 당사자이며 홍봉한이 주도한 정책들을 정조 주도로 『翼靖公奏藁』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편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영조대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이 정조대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1)  정경희, 1993, 「숙종대 탕평론과 ' 탕평 ' 의 시도」, 『한국사론』30

2)  이정철, 2010,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