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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집권세력(탕평파) 정치운영론의 기초와 국가·국왕 중심의 권력구조 재편

同黎 2019. 4. 9. 19:12

영조대 집권세력(탕평파) 정치운영론의 기초와 국가·국왕 중심의 권력구조 재편

이근호, 2016, 「탕평파의 정치운영 및 권력구조개편론」,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민속원

 

박세연

 

1. 들어가며

이 글은 영조대 집권세력이었던 탕평파의 정치운영론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국운영과 제도개혁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고찰하고 있다. 이근호는 탕평론의 기원을 『서경』의 홍범구주와 이이의 조제론,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에서 찾으면서 탕평론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영조대 집권세력이자 정치주도세력인 탕평파의 정치이념과 현실대책이 사림정치기의 그것과는 다르며 이러한 성격을 규명해 탕평정치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영조대 탕평파의 연구 대상을 정치운영과 권력구조개편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탕평파의 대부분이 학연이나 지연으로 성립된 세력이 아니라 현실관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근호는 기존 연구를 검토하면서 실학파나 농촌지식인을 근대지향적이며 진보적인 것으로, 체제의 안정을 꾀하던 집권세력의 논의를 보수적인 것으로 규정짓는 주관적 가치판단을 유보하였다. 또한 탕평을 붕당정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거나(이시이 토시오, 이태진), 탕평을 의리론의 조정문제로 보는 시각(정만조), 완론과 준론세력으로의 구분(박광용)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탕평에 대한 사상사적 접근에서 영조대를 조선성리학의 완성기로 보는 시각(최완수, 정옥자)이나, 반대로 탕평과 실학을 동일시하여 탕평을 성리학의 대안인 진보적 사상으로 브는 시각(김준석, 김성윤) 역시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이 글은 탕평파를 실학과 연관 짓거나 진보, 보수의 시각으로 보기 보다는 다시 정국을 주도하던 집권세력으로 파악하고 이들의 인적 구성과 더불어 실제 현실정치의 난제를 타개하는 국정운영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는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리하여 실제 정치를 담당하던 집권세력과 실학자로 대표되는 농촌지식인층과의 차별성이 있음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정치의리 의외의 다른 정치이념들을 제시하여 그에 따라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에서 부족한 부분인 정치이념과 정치제도의 연관성에 대해서 주목한 것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 탕평파의 황극론 재해석

영조대 탕평파의 황극록은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에 힘입은 것이고 백세체의 황극설은 『서경』의 홍범구주에 기초한 것이었다. 홍범구주는 漢 초기 伏生에 의해 오행사상과 결합되며 이후 『漢書』「五行志」에 반영된다. 여기서의 황극은 군주의 통치행위와 관련되어 거론되고 있다. 이에 대한 前漢 古文學派의 孔安國은 처음으로 헝범구조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하며 皇極을 大中之道로 이해했다. 대중지도는 군주가 無偏無黨하여 王道를 蕩平하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군주의 권능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송대에 이르러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朱子는 공안국의 논의가 군주가 修身하여 入政하지 못하게 되어 賢否가 혼란스럽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주자는 황극에서 皇을 君이며, 極을 在中之標準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채침에게도 보이며 이들은 極을 선악적 관점 즉 인륜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홍범구주의 三德과 五事에 대한 이해 차이로도 나타난다. 주자와 채침은 오사로 수신하는 것을 황극을 세우는 기본이라고 하난 판면 삼덕의 경우 해석이 소략하거나 없다. 결국 이들의 황극설은 의리나 시비를 중시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군주가 수신을 강조한 것이었다.

조선전기의 황극에 대한 이해에 있어 鄭道傳은 군주의 수신을 전제로 한 반면 權近은 황극을 天과 人을 관통하는 절대적인 것 보면서도 동시에 수신적 측면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정도전이 재상중심 정치를 중시한 반면 권근은 이색을 계상하여 주자학와 육왕학을 절충한 성향을 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梁誠之는 시비 변별의 주체로 군주의 위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邵雍 등 성리학의 논의와 상이한 것으로 세조가 추구했던 국왕 중심의 정치형태를 뒷받침해주는 논리로 보인다.

이러한 양성지의 인식은 사림세력이 진출하면서 점차 면보하기 시작했다. 金馹孫은 군주의 用人權을 인정하면서도 納諫을 강조하였다. 역대 제왕에 대한 평가 역시 至德이라는 수신적 기준을 적용하였다. 조광조에 의해 제기된 군주성학론은 이후 이언적과 이황을 거쳐 율곡 이이의 『聖學輯要』에서 이론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이이는 군주가 建中과 建極을 하여 표준을 삼게 되는 것을 皇極으로 이어했는데, 건중과 건극을 수신이라고 하였다. 이이가 파악한 황극의 의미는 수신적 차원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이이는 천자에서 서인에게 이르는 수기의 방식을 모색하되 군주도 이의 동일한 적용대상이라고 하였다. 다만 仁政을 행한 후에야 건종건극의 표준이 될 수 있다고 하여 군주에게 약간의 차별성을 부여하기도 하였고 이 입장은 탕평파에게 계승되었다.

이이의 황극론은 17세기 서인에게 계승되어 兪棨의 경우에는 황극이 세어진 후 무편무당하면 붕당이 사라질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시비명변에 근거한 一君子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 남인 許穆은 황극을 王者의 법칙이며 최고의 이름이라고 파악하고 군주는 황극에서 萬類를 통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윤휴 역시 홍법의 주체를 군주로 설정해 군주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남인은 정국 주도의 시기 가 짧아 논의의 주류는 서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군주 중심의 정치논리는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朴世采가 황극탕평론을 제기하면서 현실정치가 결합되었다. 박세채의 황극론은 군주에게 시비 판정을 귀속시키는 것으로 17세기 시비변별의 조건이 사림의 공론이었던 것과 차이를 보인다 박세채의 『範學全編』에서는 箕子에 대한 존숭을 강조하며 漢儒들의 설을 인용하고 채짐과 주자의 설을 비판하였다. 그는 황극을 인군은 능히 성인을 만든다하여 군주의 절대성을 설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군주가 황극을 세워 신하들이 서로 닦아가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는 것이라 하였다. 군주가 시비판정을 주도함으로써 사림정치에서 중시되던 公論, 公議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동시대의 宋時烈은 황극은 인욕을 제거하고 처리에 따라 정치를 하는 것이라 하여 주자의 설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 박세채와 차이를 보인다.

박세체의 황극론은 영조대 탕평파에 의해 수용되었다. 노론 출신의 元景夏는 황극은 건극이라고 하여 홍범구중 중 오사와 삼덕을 강조하며 특히 군주가 행할 정치적 측면인 삼덕을 설명했다. 조명교 역시 경연에서 삼덕을 강조하는데 이를 尊軍抑臣의 논리라고까지 하였다. 원경하나 조명교의 논리는 붕당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국왕에게 삼덕을 강조한 것으로 의리론자들이 오사를 강조하며 삼덕은 중시하지 않은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원경하가 남덕을 강조한 것은 趙顯命이 주도하던 互對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영조는 이에 대해 변명하면서 황극은 하나라고 하는데 이편저편에서 極이라고 한다고 불평하며 極을 건축에 비유하여 말하면서 집을 짓는데 목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영조는 인재를 선발 기용하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남인 출신은 吳光運은 군주의 건중, 건극이 중요함을 역설하며 군주의 一心이 요순의 中을 따른다면 세상에 陰朋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오광운은 존군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주에게 至中 의 경지까지 나가도록 강조하고 있었다. 지중이란 당시 진행되던 탕평이 노·소론을 쌍거호대하는 소탕평이었다면, 남인까지 포섭하는 대탕평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원경하의 입장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양명학자로 알려진 정제두 역시 황극을 설명하며 주체로서의 군주와 객체로서의 통치규범을 강조하며 군주는 객관적 통치규범으로 민을 통치하고 민은 그러한 왕도에 따르는 존재로 정의하며, 신하는 군주를 보좌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물론 이에 비판적인 견해도 있었다. 탕평에 비판적인 이민곤은 극을 의미를 주자가 제시한 표준의 설을 계승하였다. 이형만 역시 영조가 추진하는 건극은 의리를 극으로 삼지 않아 그저 서로를 감싸주는 것이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탕평에 비판적인 이들은 辨君誣 등 의리를 제대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을사환국 후 출사한 閔鎭遠은 의리를 제대로 밝혀 노론 피해자의 신원을 주장했는데 이는 노론이 군자당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원경하나 오광운 등 탕평파는 이를 해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근본이 되는 逆案을 소각해 민감한 의리 자체를 존군의 입장에서 거론하기 않으려 했고 영조는 이를 수용했다.

 

3. 정국운영에서의 탕평론의 구체적 전개

그렇다면 탕평론은 구체적으로 정국운영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먼저 붕당에 대한 탕평파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17세기 사림정치 시기에 이어지는 붕당긍정론은 宋時烈-權尙夏-韓元震으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계승되고 있었다. 한원진은 조제보합을 비판하며 군사와 소인을 가려야만 붕당이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이렇듯 반탕평 세력은 黨弊를 인정하면서도 군자소인론을 통한 一朋黨 체제를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탕평파들은 破朋黨에 대한 논리적 모색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붕당에 대한 인식 변화가 수반되었다. 민진원조차 붕당에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면서 파붕당론이 이루어졌고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이 중 한나는 趙顯命이었다. 조현명은 구양수나 주자의 군자소인론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하고 있으나 이를 조선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조선 붕당의 특수성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덕수나 李天輔 역시 조선의 붕당은 오래되어 族類가 하나의 붕당이 되었기 때문에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 붕당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은 이이의 조제론에 논리적 배경을 두고 있었다. 이이의 조제론을 17세기 후반 바겟채의 황극탕평론 정립의 한 부분이 되었다가 탕평파에 의해 계승되었다.

주자와 구양수의 군자소인론을 일단 긍정하던 논리는 영조대 중반 원경하에 의해 극복되게 되었다. 원경하는 당쟁망국론의 입장에서 구양수와 주자의 붕당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인재의 진용이 공변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원경하는 명대 선유에 대한 평가도 달리하여 인제의 조제에 힘썼던 섭향고를 높이 평가해 영조에게 그의 저술을 권유하고 동림당의 영수로 산림의 역할을 하던 고헌성은 오히려 화평보다는 논의를 각박하기 하기를 주로 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비평했다. 즉 원경하에 이르러 주자붕당론이 부정되고 조선적 붕당론이 정락되게 된 것이다.

탕평론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면서 당시 정국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였던 충역론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본래 조선의 충역 분별의 주체는 군주였다. 그런데 경종대 신임옥사의 전개과정에서 충역의 논리가 노·소론의 당론으로 표방되어 당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각 붕당의 정치적 입장에서 충역이 결정되는 상황으로 한 당이 충이면 다른 당을 역이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러한 충역론은 본래 斯文의 시비가 숙종의 병신처분 이후 충역론으로 변화된 것으로 사림정치의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며 사림 내부에서도 당론과 충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충력론의 격화가 군주의 위상 약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충역 논란은 君臣正名을 축으로 하는 기본적 왕조질서를 무너트릴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안 중 하나가 조현명을 중심으로 하는 양비론이었다. 조현명은 각 당에서 주장하는 충역은 각자가 꾸며댄 의리이며 順是順非한 것은 없으므로 시비를 얼마씩 비교해 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조현명의 입장은 원론적 명분 의리보다는 현실 상황에 따라 시비를 본해야 하다는 유연성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이러한 양비론은 직접적으로는 박세채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 연원은 이이의 양시양비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이는 당인 간의 시비변별논쟁을 조화시켜 사류들의 분열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 역시 양비론을 받아들여 양비론을 통해 정국의 안정을 추구하려 하였다.

한편 宋眞明, 尹東馨 등은 양비론과 달리 아예 시비를 混沌에 붙이거나 논쟁을 중단시키자는 혼돈론을 주장하였다. 혼돈론이 제기된 시기는 영조가 기유대처분을 통해 노론세력의 진출이 재기되자 노론세력이 탕평파에 대한 비난을 제기하던 시기로 탕평파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빌미를 아예 혼돈에 부쳐 시비로 인한 정국의 혼란을 극록하려고 한 것이다. 영조는 처음에는 이에 유보적이었으나 노론의 4대신 신원운동이 강해지자 혼돈론에 동조하며 노론의 시비에 의한 정국 불안을 걱정이 비정상적인 정국운영 방식에 동조했다고 추츨된다. 그에 따라 영조는 混沌開闢이라 하여 노론과 소론 제신을 불러놓고 黨戰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한편 吳光運과 趙龜命은 당인들의 논란 자체가 충역 여부를 떠나 모두 惡이라고 하여 충역논란이 결국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오광운은 삼당이 모두 逆의 혐의가 있다고 하여 노론이 남인의 치죄가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조귀명 역시 당대의 시비가 오래되어 옮은 것이 반드시 옮은 것이 아니고 그른 것이 반드시 그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시비를 중단하고 군신상하가 새롭게 마음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요컨대 영조대 정치명분의 시비는 사문의 시비를 벗어나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충역론으로 번졌고 탕평파들은 이를 결국 군주의 위상에 손상을 주는 것으로 이해해 논쟁을 중단시키려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붕당론과 시비종결론으로 이어지는 인재진용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탕평파인 송인면, 조현명 등은 정미환국 이후 당색간의 조제가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영조 역시 이에 동조하면서 지금 상황이 노복들이 시기하며 다투는 것과 같다고 하며 조제만이 국망을 막는 방식이라는데 동의하였다. 이렇게 조제론이 탕평파와 국왕에 의해 공유되었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소론 출신 조현명과 조문명의 경우 雙擧互對라는 인사원칙을 제시하였다. 이는 노론에게 하나의 관직을 제수하면 소론에게도 그에 상당하는 관직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며, 실무관료의 경우 재주에 따라 등용하는 원칙을 주장했다. 조현명의 호대론은 주로 노론과 소론 중심의 탕평론이었으며 영조의 지지를 받았다. 호대론은 노론과 소론을 중심으로 삼는 소탕평론이었다. 탕평주인으로 불린 조현명은 호대의 결과 붕당이 조용해졌다고 하였으나 반면 원경하는 노소론 중심의 호대가 당쟁의 불씨를 내재한다고 비판하였고, 영조도 재위 16년을 전화해서는 호대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노론 출신인 원경하는 호대를 비판하고 군자소인병용론을 주장했다 사색당파를 모두 등용하는 대탕평을 주장하였다. 정국주도세력인 노론으로서는 자신이 군자이며 나머지 당은 소인이 될 수밖에 없지만 소인 역시 치세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해야만 했다. 원경하는 소인도 장점이 있으며 소인은 없을 수 없어 군자를 원망치 못하게 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고 보았다. 원경하가 말하는 소인은 소론, 남인, 북인이며 무신란을 경험한 이후 소인절대불신론을 극복하여야 했기 때문에 군자소인의 병용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민진원, 이천보, 朴文秀, 오광운 등은 붕당 내 인사의 개별적 수용이라는 조제론을 인정하면서도 호대론과 같이 구차하게 하기 보다는 사대부 의리를 지키는 자들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노론의 민진원은 먼저 시비를 가려 노론의 의리에 위배된 소론 일부는 토죄하되 나머지는 재주에 따사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완론인 이천보는 붕당의 혁파는 주장하되 당론을 제거하지않고 호대하면 구제될 수 없다고 하며 지조를 지키는 신하를 등용해 공의를 따르자고 하였다. 박문수는 당폐가 심각하다고 한뒤 색목을 논하지 말고 사람을 등용하자고 하며 남인 오광운을 추천하는 등 대탕평을 주장했다. 이종성 역시 탕평을 조정론이 기초한 조제탕평과 홍범구주에 기초한 황극탕평으로 구분하고 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수용하는 황극탕평을 주장했다. 남인 출신 홍경보 역시 탕평을 추진하되 명분과 지조를 갖춘 인재를 등용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오광운은 노론·소론·남인에 모두 역적이 있다는 三黨有逆說을 주장하여 당대 붕당에는 군자소인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조현명을 명목으로 거짓을 꾸며 영조를 속이고 있다고 비판받아 탕평파로부터는 局外人으로 반탕평론자에게는 小人으로 지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영남 남인까지 소통하는 대탕평을 주장하며 色目 중에서도 자신에게 엄격하고 근면한 십수인만 골라 이들에게 치세를 맡기자고 주장했다. 이런 이들 역시 당습에 젖어 있으나 군주가 감화시키면 탕평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 紀綱在上論에 기초한 권력구조재편

지금까지 탕평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이론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제도개편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탕평파의 권력구조 개편과 제도 개혁의 논리적 기초는 기강재상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사림정치 시기 권력구조는 상관인 삼공육경과 하관인 대간이 상호 견제하는 것으로 설명되었고 사림정치에서는 이러한 정치구조가 긍정되었다. 반면 영종대 초반 탕평파인 조문명의 경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통제하지 못해 아래에서 두려와하는 바가 없는 현상을 紀綱不立이라 하여 비판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탕평파의 핵심인 조현명을 비롯하여 대신인 민진원, 송인명 역시 공유하며 영조 역시 이에 동의하였다.

저자는 기강불립의 문제를 윤리적 차원이 아닌 권력의 구조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 기강의 확립에 대해서 주목되는 존재는 명 만력제의 재상 張居正이다. 장거정은 기강을 군신의 통속관계차원에서 언급하며 황제의 상벌권과 조령의 절대권을 강조하여 법제의 엄명을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반면 조선의 이이는 역시 기강의 해이를 지적하면서도 그 확립은 법령이나 형벌로 하기 보다는 권석징악을 하면 자연스럽게 확립될 것이라 하였고 그러한 입장은 이후 일반적 정치의 준칙으로 계승되며 영조대가지 이어졌다.

영조대 기강 확립을 논하는 데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 방법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는 기강의 주체를 사대부에서 구하는 것이며 기강의 확립 방법을 이이의 주장과 같이 공론, 공도 등으로 표현되는 사대부의 논의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노론의 유겸명은 소론의 영수 이광자의 출척을 주장하는 상소에는 군주가 만민을 摠制 할 수 있는 것은 도리와 기강인데 기강은 사대부가 의리를 지킴으로써 확립된다고 하였다. 유겸명의 논리는 국가의 기강 확립은 사대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지적한 것으로 紀綱在下의 시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은 사림정치기 사림들의 역할을 강조한는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기강재하론의 측면에서는 기강의 확립을 위해 公道가 행하여져야 한다고 하며, 군주가 사사로운 재산을 두는 것을 그 예로 들며 내수사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이는 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노론 산당의 국정운영론의 연장선상이었다.

영조와 탕평파는 이와는 다른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당대 기강이 해이해진 이유가 바로 기강의 주체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조는 기강이 아래에 있어 당습이 생긴다고 하며 기강이 위에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즉 군신과계에서 군주의 우위와 관료조직에서의 상화관계의 확립이 영조가 생각하는 기강확립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를 위한 수단으로도 공의가 아니라 법제와 예법을 강조하였다. 탕평파는 德化만 숭상할 수는 없으며 법령을 엄하게 하여야 기강이 세워진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柳壽垣은 기강의 확립에 위엄이나 형벌보다는 서승법의 시행을 주장했지만 결국 인위적인 수단을 통해 이를 이루고자 하는 데에서 공통점을 보이다. 요컨대 영조와 탕평파의 기강재상론은 군신 상화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한 제도개편은 불가결의 요소였다.

 

5. 재상권 강화와 청요직의 개편

영조대 권력구조의 개편 방향은 재상권 강화와 청요직 개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만 저자는 재상권의 강화가 왕권강화로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해명하기 위해 탕평파들의 재상에 대한 인식을 검토하고 있다. 재상을 군주를 도와 정치를 행하는 핵심 관료로 국와가 함께 국가권력을 양분하는 하나의 축으로도 인정되었는다 사림정치기에는 사림들이 정치를 주도하며 主論者나 銓郞의 영향력이 커졌다. 특히 17세기 주론자와 전랑의 영향력 확대는 公論在下의 바탕에서 완성된 권력구조로 중앙에서는 삼사와 전랑이 재야에서는 산림이 공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수원은 『迂書』에서 이러한 관행을 비난했는데 주론자가 지나치게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재상권이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17세기 초에도 최명길 같은 이들은 삼사의 避嫌과 處置 등을 개정하고 의정부를 활성화해 재상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권력구조는 기강재상론을 바탕으로 영조대에 새로운 조정기를 맞이하였다.

조현명은 영조 10년 應旨疏를 올리며 正朝廷四方의 조에서 대신은 천하의 책임과 화란에 임한다는 王守仁의 말을 인용해 대신의 권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재상권 강조는 원경하 등이 영조 17년 전랑통청법을 개혁하면서 이용했던 유수원의 논리에서 보다 확실히 나타나는데, 유수원은 임금은 대강, 대체만 거니리고 자세한 책임을 보필하는 재상들에게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육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그는 의정부서사제와 비변사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국가의 관직체계를 당상관과 僚佐로 구분해 당상관에 삼공 육경을 두자고 하였다 이는 기강재상을 강조하며 관료체계의 상하질서 확립을 꾀했던 탕평파에게 매우 유효한 논리였다. 이러한 재상권에 대한 존중은 송인명, 박문수 등에게서도 찾아진다. 탕평파의 재상권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공론재하의 원칙에 의해 小官이 臺官을 견제하는 관료체계의 비정상성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재상권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왕권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영조는 경상감사 천망문제로 시바가 생겨 피혐한 좌상 金在魯와 우상 宋寅明에게 대신끼리 협력할 것을 하교하고 누차 인군이 국가를 함께 다스리는 사람은 고굉지신이라며 대신에 대한 중요성을 피력했다. 영조는 자신이 구상한 탕평책을 대신들을 통해 완성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영조의 의도는 영조대 전반 노론과 소론의 명분 조정과정에서도 드러나는데 소론 대신 李光佐와 노론 대신 閔鎭遠을 통해 양당간 논쟁을 종식시키려 하였다. 신유대훈의 반포과정에서도 그 명분을 소론, 남인에게 확인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김재로, 송인명, 조현명 등 대신들의 중재를 받았다. 결국 영조와 탕평파가 추진한 재상권 강화는 사림정치기의 권력구조에서 벗어나 대신권 강화로 이어지느 대신을 존경하는 것이 국체 유지라는 등의 발언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영조대 재상권 강화는 비변사 권한 강화로 이어저 八道句管堂上制를 통한 지방통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비변사가 팔도 구관당상을 둔 것을 숙종대에 시작되었는데 영조는 이러한 경험을 살려 단순한 문보 처리가 아닌 실제 지방대책과 통제를 구관당상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영조 7년 극심한 재변으로 진휼대책을 강구하게 되자 진휼을 위한 팔도구관당상제가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영조 10년에는 양역 업무까지 추가되었는데 구관당상은 대부분 탕평파가 선임되었다.

팔도구관당상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조판서 김재로, 공조판서 김취로, 병조판서 윤유 등은 이미 道臣이 있는데 당상을 두는 것은 도신을 불신하는 것이고 당상의 왕래 시 지공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당상 차출은 양역만을 위한 것을 아니라고 강력히 시행할 것을 이야기하며 구관당상을 차출해 이들을 지방에 보내는 것을 巡狩에 비유하여 이들을 통해 지방의 사정을 알고 민폐를 제거하면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이는 비변사의 권한 강화를 통해 지방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추구했던 영조의 의도를드러낸 것이다. 영조는 이후에도 양역변통, 송파장 혁파 등의 문제도 비변사를 통해 해결하며 국왕-대신-비변사로 이어지는 국정운영 체계를 구축해나갔다.

기강재상을 위해서는 약한 재상권을 확대하는데 이어 지나친 下官의 권한을 축소해야 했다. 영조는 관제개혀을 통해 청요직의 권한을 축소하고 탕평하는 길을 넓히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관제 재편은 조현명에 의해 주도되었고 조현명에게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것은 유수원이었다. 유수원은 이종성, 박문수 등의 천거를 통해 천거되어 영조가 『우서』를 읽데 되었다. 유수원은 관제개편안으로 官制序陞圖說을 만들었는데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대략 골자는 관직별로 승진 연한을 두어 관원이 침체되지 않도록 하는 연한승진제와 명나라 殿試法을 참고하여 승진 시에 御製作文과 같은 능력 파악을 위한 고시제도를 병향하여 보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수원은 서승법과 고시제도의 모델은 명의 제도였으나 그 효과는 붕당의 종식이었다.

유수원의 견해에 소론의 이덕수 같은 이는 붕당 제거에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적이었으나 평소 관제 개편을 생각하던 조현명은 유수원의 의견을 근거해 새로운 관제를 고안했다. 조현명이 추진한 정치구조 개편 대상은 淸職으로 이조전랑과 한림 등이 핵심이었다. 이는 신유대훈으로 노론 명분이 승리해 더 이상 호대론이 불가능했기도 했지만 전랑의 천망이 완결되지 않아 국정운영의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현명은 유수원의 서승법과 시재법을 정출하여 시재법을 주장하지만 이것의 효과에 회의적이었던 영조는 신법을 시행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 논의는 대신 이조전랑과 翰林을 개편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조현명은 吏郞이 당론의 주범이라고 하며 영조도 이에 동조하며 이랑과 한림이 사라져야 당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송인명과 원경하 역시 이에 동조하여 이랑과 한림자천권에 대한 개혁 논의가 무르익었다. 영조 17년 마침내 김재로, 송인명, 조현명, 원경하 등의 동의를 얻어 이조정랑의 통청권과 한림자천권이 사라졌다. 이후 전랑의 권한은 판서와 참판에게 집중시키고 한림의 경우에도 홍문록의 예로 권점한 후 도당록의 예로 관각의 당상들이 모여 권점해 선발하며 인원수의 제한도 두지 않는 청요직 개편이 일어났다. 이러한 청요직 개편의 목적은 기강의 확립이었다. 즉 이들이 언급한 기강은 군주-신하 간의 관계 분만 아니라 관료조직 내에서도 상하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계획과 결단을 아랫사람에서 윗사람에게 옮겨 임금은 君師의 지위를, 대신은 公議과 重權을 가지게 된 것이다.

 

6. 마치며

이 글은 영조대 탕평론을 연구하면서 그 초점을 집권세력에게 맞추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전의 연구가 저자의 지적대로 기성세력=보수세력, 실학파=진보세력으로 이분하고 서구의 역사발전방향에 맞추어 18세기를 바라보았다면 저자는 그러한 선입견을 미루어두고 먼저 영조대 실제 정책결정을 주도했던 세력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사상적 기반과 구체적 실천 규범을 추적하려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방법론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18세기의 연구가 집권세력 보다는 저자가 지적하듯 농촌지식인, 재야의 실학파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어 실제 정국의 운영과 제도의 개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피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주자와 이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서인 출신의 집권세력이 다른 의견을 받아들여 수용하면서 현실적 대응을 내놓으며 결국 그 정치적 바탕이 사림정치의 그것에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먼저 집권세력과 농촌(지방) 지식인간의 관계이다. 저자는 의식적으로 이 둘을 분리하며 보고 있지만 실제 관제개편에 있어서 탕평파는 농촌지식인인 유수원의 『우서』를 인용하고 있으며,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柳馨遠의 『반계수록』 역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중앙의 집권세력의 대처를 강조하다 보니 중앙-재야의 교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고 있어 재야 지식인들이 내놓은 대안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그것이 중앙에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탕평파를 중심으로 논리를 진행하면서 지나치게 당론자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탕평파가 점차 전통적 사림정치의 논리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강조하지만 이시기 이광좌, 민진원 등 각당의 영수들 역시 탕평에 협조하며 전향적 태도를 보이는 점이 보인다. 즉 한원진 같은 강경한 노론 산당 외에는 대부분 영조의 정국 운영에 협조하고 있다. 그러나 탕평파이 이들의 차이점이 잘 드러나지 않아 과연 전통적 사림정치의 논리 탈피가 시대적 흐름인지, 탕평파 집단의 특징인지 의구심이 다.

마지막으로 비변사 강화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재상권 강화의 결과로 비변사의 강화, 특히 팔도구관당상제의 시행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 자체는 이이도 주장한 바가 있고, 관제개혁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유수원은 비변사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표출한 바 있다. 비변사가 가지는 합좌기구로써의 특징은 이후 척족 세도정치를 더욱 강화시켰고 왕권에 방해가 되었다고 지적된 바 있다. 더욱이 비변사는 많은 당상관이 참여하는 것으로 비변사의 강화와 관료 중에서도 한정된 자리인 ‘재상’의 연관관계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강재상과 비변사가 어떠한 연결이 있는지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는 서술이 없어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