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누가 감히 시대정신을 말하는가

同黎 2013. 3. 11. 23:58

87년체제는 6월만 있고 7,8,9는 없고


[기고] 누가 감히 시대정신을 말하는가

배성인(편집위원,한신대)  / 2007년06월12일 9시15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이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이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서울, 부산, 광주, 수원 등 전국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렸다. 각 언론매체에서도 관련 기획․특집 기사와 방송을 연일 쏟아내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게다가 국가 기념일 이란다. 이쯤 되면 감회가 남달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시대정신 계승과 뫼비우스의 띠 

올해는 10주년 보다 더욱 화려하고 다양하며, 국가와 일부 시민운동단체 중심으로 치러졌다는 것이 다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위기의식의 절박함에 대한 발로이기도 하다. 최근 정치사회의 변화무쌍이 흔히 당시 주역이라는 불리는 인간들(?)의 애를 닳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현재의 정치현실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이르는 범민주개혁세력에게는 모두 우울하고 힘든 국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공중분해를 최대한 막으려고 분골쇄신 하는 척 하고 있으며, 정권 재창출을 위해 불철주야 견마지로를 다하고 있다. 쓰고 보니 이렇게 고사성어가 어색한 것도 처음이다. 또한 최근 설문조사에서 대학생 10명 중 6명이 6월 민주항쟁을 모른다는 결과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항쟁의 주역이라 불리는 몇몇 대표적인 국회의원, 지금은 상당히 저명한 사회인사들, 일부 잘 나가는 시민운동단체들이 연일 TV와 라디오에 출연하여 무용담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전과를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낭만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20년 전 가을 낙엽 밟으며 거닐던 호숫가에 대한 추억을 애잔하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들 대부분은 6월 항쟁의 시대정신을 자신들이 자랑스럽게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대중조직이나 운동단체의 지도부였기 때문에 자긍심과 자부심이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60%의 대학생이 6월 항쟁을 모르고 후속세대가 재생산 안돼 사회운동이 위기에 빠졌나 보다. 이들이 줄기차게 외치고 주야장천 강조하는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며 역사는 민중의 피에 의해 진보해왔다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그들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어느새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6월 항쟁의 노예가 되어 있는 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걸까? <은하철도 999>의 철이와 메텔처럼 엄마를 찾거나 천년여왕의 비밀을 밝히려고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출구도 없고 안쪽과 바깥쪽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과거와 현재를 오르락내리락한다.

 

잃어버린 과거와 새로운 가능성 

그 시절 필자도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총칼 앞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욕을 하며 독기를 품으며 살았다. 4.13호헌 조치에 열을 받아 거리거리로 마구마구 내달리기도 했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모습에 눈물을 쏟으며 분노의 짱돌을 들고 군부독재 타도와 변혁을 위해 시청과 명동성당 등에서 열심히 던졌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도 87년 거리를 떠올리면 몸과 마음이 다시 뜨거워진다. 

부정과 불의의 시대에 가장 온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가 나온다고 했던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시민들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게 만들었고, 더 나은 질서와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을 원했다. 그러한 염원과 소망이 6월 민주항쟁을 만들었고, 한국사회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대전환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5.18 광주민중항쟁, 아니 그 이전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열기와 투쟁에 의해서 독재정권을 붕괴시키고 만든 민주주의가 불완전한 절차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까지 확장되어야 민주주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2007년은 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게 된 시간이다. 일반 대중들은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사는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참된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87년 6월 항쟁의 정신이 대통령 직선제의 복원이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복원이라면, 일부 세력들이 시대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히 이해 가능하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시대정신은 ‘87년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87년 체제에는 6월 항쟁만 있고 7,8,9 노동자대투쟁은 실종되었다. 6월 항쟁을 통해서 이룩한 정치적 민주주의에 매몰되어 여전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변혁의 시대인 80년대의 과제를 대통령직선제로 등치시켜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럼으로써 87년 체제는 위기와 종말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당시 변혁의 과제인 인간해방, 노동해방, 민중해방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미로를 헤매고 있다. 

한이 맺혀 구천을 맴돌다 떠나지 못하는 80년 5월의 광주의 영령과 지난 20년 동안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영령들의 드센 울음소리를 들어봐라. 국가보안법이 엄존한 척박한 현실에서 의기양양하게 자세를 잡고 국가가 제공한 박제화된 기념식장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가. 

97년 신자유주의 지배질서의 구축에 대한 올바른 저항과 준비 없이 지난 10년을 아니 지난20년을 잃어버렸는데 누가 감히 시대정신을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6월 항쟁의 주역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의 주역들이다. 시대정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실종시킨 것은 아닌가.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스피드. 성찰적 자기전환이 급 필요하다. 자신들 스스로 저항했던 권위주의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구현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럴 때 미완의 ‘87년 체제’ 20년을 맞아 민주주의를 향한 그때의 열정과 못다 이룬 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7년이 또 하나의 전환적 계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안에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한다. 그리고 그 결정은 민주적이지 않다”면서 “민주주의는 특정한 생산관계를 포함하는 국가권력의 형식이다”라며 현대 민주주의의 허상을 강조하고 있다. 억압된 타자를 관용하여 민주주의의 장으로 불러들여도 여전히 ‘배제된’ 주변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통찰이 여기에 담겨 있다. 과거의 시간을 마법의 지우개로 지우고, 미래로 건너가 현재를 통째로 바꾸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라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사족 하나. 필자는 명망가 중심의 운동과 사회구조를 증오한다. 게다가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386세대’라는 용어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바 이다. 상당히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고 인권침해적인 용어를 아무 생각없이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그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한 적은 없다. 또한 이 용어가 뜻하는 세대에 속하지 않은 대중을 생각해 봐라. 5.18세대, 6.10세대, 87세대 등 얼마든지 자신을 드러내고 대표하는 상징적인 용어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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