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계급의 정의 - 근현반

同黎 2013. 3. 14. 13:47

일단 계급이라는 용어는 아무래도 맑스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계급이라는 용어를 쓰는 모든 이들이 맑스가 사용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좀 엄밀하지 못하게 '막' 쓰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근현반은 엄밀하게 사용해야 겠죠. 맑스가 말한 '계급' 의 정의부터 봅시다.

 

뭐, 책에 나오는 것은 아니어서 권위가 있지는 않지만  일단 아주 기본적인 정의를 나름대로 내려보면

 

[생산수단과 관계맺는 방식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 인간집단]

 

정도일 것 같습니다.

 

생산수단은 다들 아시듯이 (모르나?) 생산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입니다. 기계, 재료, 토지 등등...

 

 

다음, '생산수단과 관계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생산수단을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유/점유하고 있고,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와 고용계약을 맺어

그들로 하여금 생산수단을 이용하여 상품을 생산(형태에 따라 재화와 용역으로 나뉩니다)하게 하며,

그 상품을 시장에서 화폐와 교환하고 그 화폐와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다시 생산에 나서는 자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자본가'입니다. '유산계급/부르주아지'라고도 합니다. (오해를 많이들 하는데 자본가는 사회과학 용어입니다.)

 

그러면

 

생활수단을 제외하고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생활의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노동력 매매 계약을 맺어

일정시간동안 생산수단을 사용해 노동하고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자들,

 

누구입니까?

 

'노동자'입니다.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라고도 합니다.(이 또한 사회과학 용어입니다.)

 

 

위의 정의만 보자면 상당히 부족하고 편협해 보입니다. 맑스의 계급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처지에 따라 정의되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내면에 '주체화'되는 것이 굉장히 복합적이고 또 돌발적인 것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맑스의 주요관심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본주의 사회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형성된 양대 주요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여타 계급들도 있죠. 이건 나중에)

 

그리고 생산수단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가에 따라, 엄밀하지 않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다른 말로 하면, '경제적 처지에 따라' 생활과 문화, 의식 등이 '대강'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맑스가 그렇다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은 유사 이래 모든 철학자들의 과제였으니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무슨 말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고용주로서 또는 고용인으로서, 선베와 후배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서, 교육자와 피교육자로서, 지도자와 대중으로서, 매스컴과 시청자로서, 생산자와 소비자로서 등등...

 

생각해봅시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고 협조적/적대적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사고방식과 태도와 생활습관이 형성되어 온것이 사실입니다.

 

즉 한 인간이 맺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그 인간을 형성한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제적 처지라는 것입니다. 생산수단과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떠하느냐, 처해있는 경제적 처지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어떤 인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대강 결정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시 설명하면 맑스의 계급론은 기본적으로는 경제적이지만 전적으로 경제만으로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경제는 배후에서 사회적 관계를 대강 결정하지만 그렇게 결정된 사회적 관계는 나름대로 경제와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인간을 규정짓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볼까요? 일단 이해하기 쉽게,

 

"집안이 부유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릴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고 각종 고급 문화와 지식에 쉽게 접할 수 있어서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좋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학생운동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입학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학생운동에 대해 좋지않은 말들을 들어오던 그는 처음에는 상당한 반감이 있었지만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교육을 받은 덕택에 그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게 되었고 그들 선배들의 친절함과 진지함에 반하여 결국 그들과 함께 하게 됩니다.

 

대학 내내 학생운동에 몸 담았던 그는 졸업 때가 다가오자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신없이 살던 대학시절은 그렇다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거기다가 주위에서는, 4년 내내 공부만 하던 친구가 또 취직시험에 불합격했다고 합니다. 취업 시장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고 스스로가 낙오자처럼 느껴졌습니다.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 또한 컸습니다.

 

또한 졸업 후에도 노조에 가서 활동을 하는 선배들을 보았습니다. 일의 보람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는 그들을 보니 더욱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자라왔던 부유한 환경을 벗어던지고 그렇게 살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활동을 접고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졸업 후 그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일은 그다지 재미는 없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승진도 하고 봉급도 올랐습니다. 결혼도 하여 자식도 생겼습니다. 대학시절의 일들은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술자리에서 이야기하곤 했지만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군 훈련 도중 두 중학생이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문에서 그 사건을 접한 그는 불현듯 뭔가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과거 활동하던 친구들 중 아직도 활동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그런 친구들과는 연락도 끊어졌습니다. 직장 동료들은 그런 사건 자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취업 후 몇 년이 지났습니다. 열심히 하던 일도 점점 흥미가 없어졌습니다. 몇 군데 나가던 동호회 활동도 시들해졌고 그는 마침내 컴퓨터 게임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애들과 배우자는 귀찮기만 했습니다.

 

사건이 있은지 1년이 지난 어느날, 죽은 그들을 추모하고 미국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보니까 자기 또래의 사람들도 애들을 데리고 나와있었습니다. 순간 그는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과거의 일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몇날을 생각하던 그는 마침내 가족을 데리고 시위현장에 나갔습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뿌듯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간단한 예라고 했는데 그다지 간단하지 않군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부유한 집안 배경 덕택에 합리적 사고를 가질 수 있었고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활동가들을 만나 그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여타의 사회적 관계, 집안문제가라던가 미래에 대한 문제 등으로 인해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만 이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그는 변화했습니다. 직장에서 고용인으로서 겪는 괴로움을 겪던 도중 남아있던 과거의 관계가 그를 마침내 집회에 까지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주체화는 복합적이고 돌발적이며 우연적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경제적 처지가 전체적인 판을 짜며, 항상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위와 다른 예도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이라고 해도 벼락부자 집안이라면 돈을 물쓰듯 했을 것이고 개쓰레기나 생양아치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 대학에 와서 그런 선배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냥 쭉 잘살았을 것입니다.

 

 

'선험적으로' 판단하던 것이 주가 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판단이라는 것은 "노동자라면 누구나 투쟁할 것이다"라는 류의 판단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은 여전히 옳습니다. 이들이 단결하여 생산을 멈추면 그것보다 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힘은 그들의 경제적 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본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랬다간 몰락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들고 일어나서 투쟁하느냐 안하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계급성"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죠, 노동자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느끼면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처지를 깨닫고 단결하여 투쟁에 나설 때 "계급성을 자각했다"라고 합니다. 이 과정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주로 활동가의 의식적인 개입과 조직화에 의해 촉발되거나 가속화됩니다.

 

여기서 또다른 용어가 있습니다. '즉자적 계급', '대자적 계급'이라는 용어입니다.

 

즉자(卽自), 대자(對自)는 헤겔이 사용한 용어인데, 인식하는 주관에 대해서 아직 발현되지 않는 잠재태, 또한 자기 자신에의 반성적 관계가 결여되었다는 뜻에서 ‘무자각태(無自覺態)’의 뜻도 됩니다

즉자는 다른 것과 교섭하여 자기의 자립성을 잃게 되는 ‘대타(對他)’로 발전하고, 다시 여기서 자기 자신과 관계함으로써 자기를 회복하는 단계인 대자(對自)’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즉, 즉자적 계급이란 아까 말한 존재로서의 계급,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산계급을 뜻합니다. 계급성을 가지지 못한 상태죠, 반대로 대자적 계급이란 계급성을 깨닫고 투쟁하는 노동계급입니다.

 

 

 

쓰다보니 말이 너무 길어졌군요,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할 말이 더 있지만 오늘은 이걸로 이만...

 

 

원문내용(작성자:박상연)-----------------------------------

요즘 읽는 커리에서도 그렇구

흔히 말하는 사회과학 서적, 그리고 특히 역사 관련에서 '계급'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그냥 제 안에서의 단편적인 계급에 대한 지식은, 계층이라는 것에 비해 '경제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더라구요.

이러한 영향, 그리고 국내 국외 많은 학자들이 쓰는 계급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유래/발전된 건가요?

역시 마르크스의 영향이 가장 큰 것인지, 궁금하구요.

 

계급성이니, 계급의 정체성이니 하는 건

그 정체성을 특징짓는 기준이 경제적인 것에만 있는지(이건 계층하고 비교할 수 있을런지)

만일 그렇다면 이미 그러한 기준이 여러 학문적인 성과를 통해 정립되어 있는지, 아니면 각 서적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연구를 기반으로 새롭게 정체성을 규정짓는지 알고싶어요.

이부분은 조금 불만이거든요. 미심쩍다고 해야할까요..

왜냐면, 사실 한 인간의 내면에 '주체화'되는 것이 굉장히 복합적이고 또 돌발적인 것도 있을 텐데도

뭐랄까, 선험적으로 판단한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가끔 들어서요.

 

두서없이 쓴 것 같네요 -_-

여튼 포인트는 역시 '계급'에 대한 거 같아요. 아는 게 없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