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바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사가 있는 안산 공장에는 여성 노동자가 많고 지사인 춘천 공장에는 남자 노동자들뿐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설명할까요? 머리 속에 그림을 잘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앞으로 하는 설명이 이해가 됩니다. 안산에는 본사가 있고 춘천에도 공장이 있는데, 안산 공장에는 주로 여성 노동자가, 춘천 공장에는 주로 남성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춘천 공장의 인원이 조금 더 많았으니 양쪽 공장을 모두 합치면 당연히 남자 숫자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안산에 노동조합 본부가 있고, 춘천에는 노동조합 지부가 있습니다. 형식상 춘천 지부는 안산 본부 노조의 지시를 받고, 노동조합 대표자를 부르는 명칭도 안산은 '위원장'이고 춘천은 '지부장'입니다.
안산 본부 노조의 위원장 선거를 치를 때마다, 춘천의 남자 조합원들은 아직까지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참여하라고 아무리 권해도, 지부장 선거 따로 하고 위원장 선거를 따로 또 해야 하는 것이 번거로웠는지 "그냥 아무나 뽑아도 우리가 위원장으로 받들고 잘 따르겠다."고 하면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몇 년째 그렇게 해오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안산 본부 노조의 위원장 선거를 치르게 되었는데, 노조 설립이래 처음으로 여성 조합원이 위원장 후보에 출마하였습니다.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이었으면서 의례 노동조합 위원장 같은 일은 남자들만 하는 것인 줄 알았던 이를테면 가부장제이데올로기가 처음으로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성 후보가 '우리 편'이고 '좋은 나라'였습니다. 여성 후보가 말하자면 민주파 후보인 셈입니다. 여성 후보가 당선될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춘천의 조합원들(이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입니다), 이 조합원들이 갑자기 자기들에게도 본조 위원장 선거권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여자가 위원장에 당선되는 꼴은 못 본다. 우리더러 여자의 지시를 받으라는 것이냐?"는 것이 내세우는 이유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단세포적인 논리로도 남자 조합원들 사이에 바람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여성 위원장 후보가 사퇴한다면 춘천공장의 남자 조합원들은 선거권 요구를 철회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여자만 아니면 무조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이상, 첫 번째 바보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제는 두 번째 바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홈쇼핑 유선 방송국의 여성 텔리마케터들(전화를 상품의 주문을 받거나 상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여성 텔리마케터들이 어렵사리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노조 설립에는 철저하게 여성 노동자들만 참여했습니다. 남자들은 '나 몰라라' 했습니다. 저야 물론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게 된 것이 즐거웠지만 같은 남자로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남자 직원들에게도 노조 가입을 권유했지만 남자들은 노동조합 이야기만 나오면 '앗 뜨거라'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회사가 갑자기 순환 근무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앞으로는 직원들을 수시로 이 부서, 저 부서로... 이 지방, 저 지방으로 발령을 내겠다는 뜻입니다.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때에서야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이 오갔습니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노동조합에 찾아와서 가입 여부를 조심스레 타진하고 돌아가는 남자 직원들이 생겼습니다. 회사가 그런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었지요. 남자들까지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정말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는지, 회사는 갑자기 남자 직원들의 절반 가량을 승진시켜 주었습니다. 남자들은 단맛을 보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던 얘기들은 언제냐 싶게 쑥 들어갔습니다.
1년쯤 지났을 때, 남자들이 갑자기 노동조합에 다시 찾아오더니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동조합 위원장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무조건 가입만 시켜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최근에 몸이 많이 아파서 회사를 쉬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던 노동조합 위원장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소장님, 어떻게 하면 좋지요?"
저는 농담 반으로 말했습니다.
"노동조합, 그냥 남자들에게 줘 버리지 그래요?"
위원장님이 말하기를...
"저도 아예 그래 버렸으면 좋겠어요. 숫자도 저희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는 안 하겠대요. 자기들이 직접 노동조합 일을 하기는 싫대요."
제가 위원장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남자 직원들이 갑자기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위원장님이 다시 답합니다.
"모르겠어요. 회사가 이 사람들에게 뭔가 또 안 좋은 짓을 한 모양인데, 무슨 일인지 말들을 통 안하고 있어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유를 솔직히 말할 때까지는 가입시키지 마셔요. 그렇게 한다고 노동조합을 상대로 '조합원 지위 인정 확인 청구 민사소송'까지 할 위인들은 못될 테니까..."
위원장님은 제 말을 듣고는 "예, 잘 알았어요. 그리고... 뭐 하나 또 물어 봐도 돼요?"라고 하더니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남자들 도대체 왜 이 모양이에요?"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상 두 번째 바보들 얘기였습니다.
(이제 세 번째 바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자가 500명, 남자가 100명쯤 되는 전자업종 회사가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전통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이 꾸려왔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많고 결혼을 한 남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활동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돼서 진행하는 노조 활동을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이었습니다.
작년에 임금인상 투쟁을 할 때에도 남자 조합원들 중의 몇 명이 나서서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번잡스럽게 임금인상 투쟁이다 뭐다 할 것 없이 회사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자는 것입니다. 회사와 가깝게 지내면서 작은 특혜에 길들여진 그런 못난 노동자들이 회사마다 몇 명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노동조합은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전면전으로 임투에 임했지만 처절하게 패배했습니다. 그렇게 임투가 진행되는 동안 남자 노동자들은 손 놓고 구경만 했습니다. 그 회사의 노동조합 탄압 행위는 그동안 여러차례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악랄했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많이' 올려주고, 여성 노동자들은 '조금' 올려 주었습니다. 남자 노동자들은 '단 맛'을 본 것이지요.
올해 임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남자 노동자들 중의 몇 명이 나서더니 또 다시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회사에서는 올해에도 남자들 임금은 '많이' 올려주고, 여자들 임금은 '조금' 올려 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그러한 행동이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시기를 늦춘다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거듭된 회의를 한 끝에 올해에도 작년의 치욕스러운 패배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가열찬 투쟁에 임하기로 했습니다.
회사 내에는 서서히 "여자들이 건방지게 남자들 말을 듣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자"고 주장했던 남자들 몇 사람이 나서서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갔습니다.
어느날 대부분 여성인 노조 간부들이 노동조합 사무실에 모여서 임투에 관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 조합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 후 약 1시간 동안 노동조합 사무실은 전쟁터를 방불했습니다. 모든 집기는 다 부숴지고, 컴퓨터는 내동댕이쳐지고, 디스켓과 장부들은 창문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남자들은 여성 동지들을 사무실 안에 가둔 채 노동조합 사무실을 밖에서 용접기로 때워버렸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에 갇힌 채 출입문이 밖에서 용접으로 봉쇄되는 소리를 듣고 있었을,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포영화가 따로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남자들 중의 한 명이 그날의 '거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말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똑똑히 들렸습니다.
"이것들이 감히 남자를 무시해? 그런 것들은 본때를 보여줘야 해.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구만..."
3층의 노조 사무실에 갇힌 여성 조합원들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도 끊겨 쉽게 연락할 수도 없었습니다. 밖에서 누가 119에 연락을 해서 소방서 구조대가 도착했지만, 회사 그 소방서 구조대원들은 회사 관리자들을 만나 보더니 "경찰에서 구조 결정을 하면 하겠다."고 했습니다.
경찰에 연락을 해 보았으나, 경찰에서는 "회사에서 구조 결정을 하면 하겠다."고 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나라 경찰은 회사 말을 참 잘 듣습니다.
남아있던 여성 노동자들은 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밖에서 다른 동지들이 구해다가 창문에 걸쳐 준 사다리를 통해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혹시, 그 까짓거 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깜깜한 밤에 3층 건물에서 사다리를 타고 한 번 내려와 보십시오.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오금이 저립니다.
다음날 여성 노동자들은 전기 그라인더를 사다가 용접으로 봉해진 노동조합 사무실 문을 절단했습니다. 문이 떨어져 나가자 전쟁터보다 더욱 처참한 노조 사무실의 몰골이 한눈에 드러났습니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조합원들은 당연히 분개했습니다.
남자들은 다시 노조 사무실 출입문을 용접으로 봉해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여자들이 처참한 노조 사무실을 보게 되면 쓸 데 없이 흥분할까봐'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다시 그라인더로 그 문을 절단했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남자들이 이번에는 아예 노조 사무실이 있는 복지관 건물의 출입문을 봉쇄해 버렸습니다. 체격이 건장한 남자들이 그 건물을 둘러싸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루 종일 지켰습니다. 그 남자들이 자기 본래 업무를 전혀 수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회사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은 하는 수 없이 회사 구내식당 귀퉁이에 임시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식당에서 노동조합 일을 보기 시작한 며칠 후,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과 업무방해에 대한 고소를 저와 함께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가 저에게 말했다.
"이거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저는 "왜?"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성 노동자가 답했습니다.
"지금 노동조합 활동에 전혀 지장이 없어요. 식당에 사무실 차리니까 조합원들 만나기도 더 쉽구요.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들만 더욱 나쁜 사람들 되어가구 있구요. 딜레마에 빠진 쪽은 우리들보다 남자들 쪽이에요.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거든요. 남자들은 이제 우리를 죽이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식당에서 10년쯤 버틸 각오를 했어요. 법률에 의지해서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보자는 노력은 아직 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그동안 마치 큰 일이라도 생긴 듯 호들갑을 떨었던 내가 오히려 부끄러웠습니다. 이상 세 번째 바보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바보 이야기 완결편입니다.)
해고된 여성 노동자가 곧 결혼을 할 거라고 연락을 하더니, 동료 여성 노동자들 몇 명과 함께 '신랑 자리'를 데리고 우리 연구소에 놀러 왔습니다. 신랑감 역시 공공기업 노조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노동자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바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나더니 여성 노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여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들도 남자라고... 몽땅 다 떼어 버리라고 그래."
그 말을 듣고 다른 여성이 맞장구쳤습니다.
"맞어. 다 떼어 버리고 '스크류 바'나 하나씩 달고 다니라고 그래."
제가 듣고 있다가 끼어 들었지요.
"스크류 바는 큰 거잖아?"
여성 노동자가 답하기를...
"크면 뭘 해요. 금방 녹아 버리잖아요."
우리들은 그 말이 맞다고 모두 웃었습니다. 다른 여성 노동자가 또 말했다.
"그럼 빼빼로나 하나씩 달아 주든지."
그 '스크류 바'나 '빼빼로'가 모두, 그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뼈 빠지는 노동을 하며 만드는 물건들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참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길을 걷다가도 생각나면 목이 메입니다.
'心 > 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느와르 위원장이 대구동지들에게 보낸글 8/26 (0) | 2013.03.14 |
---|---|
노동자 문화와 노동자 정치 (0) | 2013.03.12 |
이용석 열사의 유서 (0) | 2013.03.12 |
‘임을 위한 행진곡’의 그 ‘임’을 아십니까? (0) | 2013.03.12 |
나는 행복을 위해 투쟁합니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0) | 2013.03.12 |
민주주의는 결코 '준법'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0) | 2013.03.12 |
장애인이동권연대 박경석동지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를 사양하며 쓴글 (0) | 2013.03.12 |
사회주의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 바버라 에런리치 (0) | 2013.03.12 |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 레온 트로츠키 (0) | 2013.03.12 |
스스로 만든 덫에 걸린 우리들 - 김진숙 (0) | 2013.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