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의 그 ‘임’을 아십니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해서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운동가요이다. 학교와 공장과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가 있는 곳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노래를 불렀고, 가슴 절절한 곡조와 가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80년대의 격동을 스쳐지나간 사람이라면, 아니면 비록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더라도 한국 현대사의 거친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를 기억하겠지만, 이 노래에서 ‘윤상원’이라는 한 인물을 떠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윤상원이 1980년 5월 27일 광주에서 산화한지 19년, ‘광주사태’는 ‘5·18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되고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5월 광주를 잠깐 다루었다고 화제가 되었던 ‘모래시계’, 한판 씻김굿으로 광주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던 영화 ‘꽃잎’ 이후 광주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학살은 이제 더 이상 쉬쉬하는 비밀이 아니었으며, ‘탄압받는 광주’는 여러 측면에서 조명되었다. 그렇지만 광주의 진실이 계엄군의 탄압과 학살이라는 측면에 국한되고, 광주의 의미가 광주라는 한 지역에 갇힐수록 윤상원, 김종배, 박남선 같은 이름은 망각의 저편에 묻혀버렸다.
윤상원, 그는 누구인가.
잊혀진 그의 이름을 지금 다시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윤상원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8월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용동)에서 3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임곡국민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나와 하숙과 자취를 하며 북중(現 북성중)과 사레지오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대학입시를 두 번 실패한 끝에 1971년 봄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며, 2학년 여름 휴학계를 내고 육군하사관으로 입대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에덴클럽’이라는 불량서클을 만들어 술, 담배를 가까이 한 일, 가톨릭계통인 사레지오 고등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일, 대학에서 연극반에 들어가 자유분방한 신입생 시절을 지낸 일 등에서 방황과 고민의 흔적을 다소 엿볼 수 있지만, 성장기와 학교생활 동안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착실하던 윤상원의 삶이 결정적인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은 복학 이후 두 번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첫 번째는 전남대 선배인 김상윤과의 만남이었다. 김상윤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975년에 풀려난 전남대 운동권의 리더였는데, 그의 주선으로 윤상원은 독서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집중적인 학습과 소모임 활동을 거치면서, 김상윤이 문을 연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서점인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가면서,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안목이 깊어졌고 이론과 실천에 대한 고민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두 번째는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을 연 박기순과의 만남이었다. 졸업 후 현실에 떠밀려 서울의 은행원으로 취직했던 윤상원은 6개월만에 그만두고 광천공단의 한남프라스틱에 일용직으로 취업하였고, 얼마 후 박기순을 만나 들불야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는 들불야학을 통하여 노동운동가로 성장했고, 그가 이끈 들불야학 출신의 노동자들은 5월항쟁에서 유일한 민중언론이었던 ‘투사회보’의 제작팀이 된다. 그러나 박기순은 1978년 성탄절 새벽 연탄가스로 세상을 뜬다.
박기순의 어이없는 죽음은 윤상원을 더욱 탄탄한 노동운동가로 만들었으며, 이태복의 주선으로 1980년 4월에 결성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을 맡아 광주지역 노동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5·18이 터지자, 광주를 떠났던 일부 지식인들과는 달리 윤상원은 5월 17일부터 도청에서 산화하는 5월 25일까지 광주를 지켰으며, 언제나 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초안을 잡고 들불야학 교사들이 19일 오후 시가지에 배포한 최초의 유인물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해 각종 선언문과 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 제작, 배포를 지휘한 것도 그이고, ‘5·18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적 자세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 앞 광장에서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매일 조직해낸 것도 그이며, 광주를 끝까지 사수하기 위하여 결성된 ‘시민학생 투쟁위원회’의 대변인으로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항쟁의 대의를 설명하였던 것도 그였다. 26일의 외신 기자회견에서 외국기자들이 승리에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윤상원은 잠시 생각하다 ‘7일이라고 대답했다. 일주일만 버틸 수 있다면...
다음날 새벽 귀를 째는 듯한 M16의 총성이 도청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시각, 도청 2층 회의실에서 카빈소총을 굳게 쥐고 최후의 항전을 기다리던 윤상원은 회의실의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1980년 5월을 향해 달려왔으며, 들불을 지펴 광주를 훨훨 타오르게 한 윤상원은 이렇게 30년의 삶을 마감하였다. 윤상원이 도청에서 산화한 지 2년이 지난 1982년 2월 20일 정오, 망월동 묘역에서는 윤상원과 그의 노동동지 박기순 사이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그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해서 노래굿 ‘넋풀이’ (일명 ‘빛의 결혼식’)가 만들어졌고, 이 소품의 마지막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윤상원의 삶을 통하여 새롭게 살아나는 것은 ‘투쟁하는 광주’, 해방의 공동체로 살아 움직이는 광주이다. 윤상원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투쟁이 없었다면 5월의 광주는 그 온전한 의미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낳은 근원적인 힘도 바로 ‘투쟁하는 광주’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한켠에는 그날 광주에서 윤상원과 함께 하지 못한 지식인들의 갚을 길 없는 부채의식이 있었다.
[배성준,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 교지관악 22호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해서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운동가요이다. 학교와 공장과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가 있는 곳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노래를 불렀고, 가슴 절절한 곡조와 가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80년대의 격동을 스쳐지나간 사람이라면, 아니면 비록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더라도 한국 현대사의 거친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를 기억하겠지만, 이 노래에서 ‘윤상원’이라는 한 인물을 떠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윤상원이 1980년 5월 27일 광주에서 산화한지 19년, ‘광주사태’는 ‘5·18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되고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5월 광주를 잠깐 다루었다고 화제가 되었던 ‘모래시계’, 한판 씻김굿으로 광주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던 영화 ‘꽃잎’ 이후 광주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학살은 이제 더 이상 쉬쉬하는 비밀이 아니었으며, ‘탄압받는 광주’는 여러 측면에서 조명되었다. 그렇지만 광주의 진실이 계엄군의 탄압과 학살이라는 측면에 국한되고, 광주의 의미가 광주라는 한 지역에 갇힐수록 윤상원, 김종배, 박남선 같은 이름은 망각의 저편에 묻혀버렸다.
윤상원, 그는 누구인가.
잊혀진 그의 이름을 지금 다시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윤상원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8월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용동)에서 3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임곡국민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나와 하숙과 자취를 하며 북중(現 북성중)과 사레지오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대학입시를 두 번 실패한 끝에 1971년 봄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며, 2학년 여름 휴학계를 내고 육군하사관으로 입대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에덴클럽’이라는 불량서클을 만들어 술, 담배를 가까이 한 일, 가톨릭계통인 사레지오 고등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일, 대학에서 연극반에 들어가 자유분방한 신입생 시절을 지낸 일 등에서 방황과 고민의 흔적을 다소 엿볼 수 있지만, 성장기와 학교생활 동안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착실하던 윤상원의 삶이 결정적인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은 복학 이후 두 번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첫 번째는 전남대 선배인 김상윤과의 만남이었다. 김상윤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975년에 풀려난 전남대 운동권의 리더였는데, 그의 주선으로 윤상원은 독서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집중적인 학습과 소모임 활동을 거치면서, 김상윤이 문을 연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서점인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가면서,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안목이 깊어졌고 이론과 실천에 대한 고민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두 번째는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을 연 박기순과의 만남이었다. 졸업 후 현실에 떠밀려 서울의 은행원으로 취직했던 윤상원은 6개월만에 그만두고 광천공단의 한남프라스틱에 일용직으로 취업하였고, 얼마 후 박기순을 만나 들불야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는 들불야학을 통하여 노동운동가로 성장했고, 그가 이끈 들불야학 출신의 노동자들은 5월항쟁에서 유일한 민중언론이었던 ‘투사회보’의 제작팀이 된다. 그러나 박기순은 1978년 성탄절 새벽 연탄가스로 세상을 뜬다.
박기순의 어이없는 죽음은 윤상원을 더욱 탄탄한 노동운동가로 만들었으며, 이태복의 주선으로 1980년 4월에 결성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을 맡아 광주지역 노동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5·18이 터지자, 광주를 떠났던 일부 지식인들과는 달리 윤상원은 5월 17일부터 도청에서 산화하는 5월 25일까지 광주를 지켰으며, 언제나 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초안을 잡고 들불야학 교사들이 19일 오후 시가지에 배포한 최초의 유인물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해 각종 선언문과 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 제작, 배포를 지휘한 것도 그이고, ‘5·18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적 자세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 앞 광장에서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매일 조직해낸 것도 그이며, 광주를 끝까지 사수하기 위하여 결성된 ‘시민학생 투쟁위원회’의 대변인으로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항쟁의 대의를 설명하였던 것도 그였다. 26일의 외신 기자회견에서 외국기자들이 승리에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윤상원은 잠시 생각하다 ‘7일이라고 대답했다. 일주일만 버틸 수 있다면...
다음날 새벽 귀를 째는 듯한 M16의 총성이 도청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시각, 도청 2층 회의실에서 카빈소총을 굳게 쥐고 최후의 항전을 기다리던 윤상원은 회의실의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1980년 5월을 향해 달려왔으며, 들불을 지펴 광주를 훨훨 타오르게 한 윤상원은 이렇게 30년의 삶을 마감하였다. 윤상원이 도청에서 산화한 지 2년이 지난 1982년 2월 20일 정오, 망월동 묘역에서는 윤상원과 그의 노동동지 박기순 사이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그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해서 노래굿 ‘넋풀이’ (일명 ‘빛의 결혼식’)가 만들어졌고, 이 소품의 마지막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윤상원의 삶을 통하여 새롭게 살아나는 것은 ‘투쟁하는 광주’, 해방의 공동체로 살아 움직이는 광주이다. 윤상원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투쟁이 없었다면 5월의 광주는 그 온전한 의미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낳은 근원적인 힘도 바로 ‘투쟁하는 광주’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한켠에는 그날 광주에서 윤상원과 함께 하지 못한 지식인들의 갚을 길 없는 부채의식이 있었다.
[배성준,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 교지관악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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