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 알튀세르

同黎 2013. 3. 14. 13:52

.....(전략).....이 새로운 전체 속에서 작용하는 변증법이 전혀 헤겔적이지 않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모순과 연관하여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맑스의 전체의 본성과 그 불균등성을 진하게 고려한다면 여러분은 이 불균등성이 필연적으로 과잉결정이나 과소결정이라는 형태 속에 반영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잉결정이나 과소결정은, 어딘가 합법적인 존재를 끌어들이는 선행하는 모순에서 덧붙여진 것이거나 정해진 결정량의 가감이라는 용어법으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과잉결정이나 과소결정은 순수한 모순에 대한 예외들이 아니다. 인간은 홀로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사회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맑스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단순한 경제적 범주들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결과라고 맑스가 말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순수한 상태의 모순이란 오직 순수하지 않은 모순에 의해 결정된 산물일 뿐이다.

이 테제는 단지 사람들이 모순을 사고하는 준거를 변화기키는 것일 뿐이다. 특히 이 테제는 사람들이 단순모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의 논리적인 의미에서의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거리를 취한다. 단순모순이란 +나 -, 혹은 A나 not-A처럼 단순히 반대부호가 달린 두 개의 동등한 개체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여기서 나의 첫 에세이들에서 주장했던 것들 이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나는 '자본론'에서 발견된느 모순이 놀라운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특수성이란 모순이 불균등하다는 것이며, 하나에 대립하는 부호를 다른 하나여 붙여주는 방식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대립항들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 모순을 위한 존재조건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불균등성의 관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헤겔에게서 모순은 정신이 스스로의 자기 발전과정이며 그 모순의 존재조건들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해간다.->뭐 이런 뜻이에 알튀세가 적이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예컨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존재하게 하면서 경향적으로 그 사멸을 선고하는 모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모순, 계급들을 명백히 불균등하게 대립하는 계급, 즉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분할시키는 모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부정, 즉 자본과 권력은 박탈당한, 음의 부호가 달린 자본가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본가계급은 부와 권력을 가진, 양의 부호가 달린 노동자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계급은 동일한 역사를 가지지 않으며, 동일한 계급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립하며, 이것은 명백하게 모순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립관계를 헤겔적인 아름다운 고양과 화해를 통해 대립의 조건들을 초월하기는커녕 그 대립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중략)......모순의 불균등성과 과잉-결정 혹은 과소-결정을 상기시키는 불균등발전이라는 레닌의 범주없이, 가장 약한 고리로의 제국주의의 기본모순의 이러한 이동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 것인가? 연관하여, 매우 활발했던 나라들에게 계급투쟁의 이러한 지체를 어떻게 사고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일부러 과소결정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결정에 간단한 추가분을 덧 붙이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 과소결정이라는 사고, 즉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혁명이 유산되고 혁명적 운동이 지체되거나 사라지며, 제국주의가 부패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결정의 문턱이라는 사고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후략)...................

 

 

-아미엥에서의 주장, Louis Althus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