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 - 이종영

同黎 2013. 3. 14. 13:50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

이종영ꋯ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사회학


1.
고대 아테네에서 ‘데모크라시’는 ‘데모스’의 지배 또는 통치를 뜻했다. ‘데모스’가 ‘민중’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에서 ‘데모크라시’는 ‘민중의 지배’를 뜻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테네에서의 ‘데모스’의 범주는 오늘날의 민중과는 큰 차이를 갖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아테네의 ‘민중’은 오늘날의 ‘민중’과 범위를 달리 하는 것이었다. 아테네의 ‘데모스’에는 여성, 노예, 외국인 체류자 등이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인구의 4분의 3 이상은 ‘데모스’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고대 아테네에서의 데모크라시를 데모스의 지배라고 한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 노예소유자계급 남성들의 지배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아테네의 데모크라시와 현대 민주주의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은 아테네의 데모크라시가 ‘정부 형태’(forme de gouvernement)였다는 점이다. 데모크라시가 ‘정부 형태’였다는 사실이 뜻하는 것은, 한 마디로 모든 데모스가 정책결정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데모스가 ‘정치’를 했다는 것, 권력의 분배와 행사를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가 실질적으로 직업 정치인들에게만 맡겨져 있는 현대 민주주의와는 큰 차이를 이루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거의 모든 국가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적’이라고 내세운다. 이제 민주주의야말로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정치체제라는 합의가 세계적 수준에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강정인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래 민주주의는 마치 인류의 보편적 종교로 자리 잡게 된 것처럼 보인다.” 강정인, ꡔ민주주의의 이해ꡕ, 문학과지성사, 1997, 124쪽.

그러나 스스로를 ‘민주주의적’이라고 내세우는 여러 정치체제들이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것일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남한의 정치체제는, 미국의 정치체제는, 프랑스의 정치체제는 과연 민주주의적인 것일까? 또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인류의 평화와 행복이 보장될 수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의 한 역사적 형태로서의 현행 민주주의는 그리스적 의미의 데모스에 한정되지 않는 민중 전체에 토대를 둔다. 즉 현행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민중의 지배를 구현하는 장치로 제시하는데, 그것을 상징해주는 말이 바로 ‘인민 주권’이다. 그렇다면 인민은 주권을 어떻게 행사할까? 그것은 투표를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투표란 어떠한 행위인가? 그것은 정치를 전담할 정치인을 뽑는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한 역사적 형태로서의 현행 민주주의 하에서는 정치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 정치는 직업적 정치인에 의해 전담된다는 것, 그리고 투표는 이처럼 분리된 정치와 시민사회를 연결해주는 매개고리일 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행 민주주의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과연 무엇이 민주주의적이란 것일까? 고대 아테네에서처럼 정부 형태가 민주주의적이란 것일까, 아니면 직업적 정치인의 공과에 대한 판단이 최종적으로 민중으로부터 도래하는 민주주의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일까?


2.

현행 민주주의에서 민중은 ‘정치의 장(場)’으로부터 축출되어 있다. ‘정치의 장’ 개념과 관련해서는 삐에르 부르디외의 「정치적 대표제 ― 정치적 장의 이론을 위한 요소들」(Pierre Bourdieu, “La représentation politique, éléments pour une théorie du champ politique”, Actes de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n°36-37, 1981)을 참조할 것.
다시 말해, 현행 민주주의에서 민중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표현은 단지 참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민주주의란 과두제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투표행위가 과두제적 지배의 정당화 메커니즘일 뿐이라면 말이다.
당대의 데모크라시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취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여길까? ꡔ우정의 정치학ꡕ에서 자끄 데리다는 플라톤의 망설임에 대해 말한다. 대중의 ‘동의’에 입각한 소수자의 지배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데 대한, ꡔ메넥세소스ꡕ에서의 플라톤의 망설임 말이다. 플라톤은 그러한 체제를 실질적인 귀족제로 간주한 듯 하다. Jacques Derrida,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123쪽. ꡔ메넥세소스ꡕ의 한글본은 상서각에서 출판된 ꡔ플라톤 전집ꡕ에 실려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현행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까? 실질적인 귀족제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한 형태라기보다는 귀족제의 역사적 한 형태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대의제 자체를 반(反)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의제의 여러 가지 형태들이 존재한다. 그중 직능 의회주의나 평의회 의회주의 또는 추첨제 등은 민중들 자체 내부에서 대표자를 뽑는 것이다. 그러한 대의제는 충분히 민주주의적일 수 있다.
반면 정당 의회주의는 그렇지 않다. 정당 의회주의는 민중들이 자신들 내부에서 대표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외재적인 정당의 소속원을 대표자로 뽑는 것이다. 도대체 정당이란 무엇일까? 왜 정치는 정당에 의해 담당되어야 하는 것일까? 각각의 역사적 지배양식들은 자신에 고유한 정치의 장(場)을 갖는다. 부르주아적 지배양식은 정치를 기본적으로 의회의 장 속에 제한시킨다. 즉 정치가 의회의 장으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정당을 만들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의회 내의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위해 정당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당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정치기구의 성격을 갖는다. 정당을 만들고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귀족적 존재들인 명망가-재산가들이다. 막스 베버는 ꡔ지배의 사회학ꡕ(한길사, 1981) 358-365쪽에서 영국과 미국에서 명망가의 지배가 일정하게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명망가라는 용어를 매우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지적은 부적절하다.
돈이 없고 명성이 없는 민중들은 정당을 만들 수 없고 그리하여 실질적인 피선거권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고대 아테네의 ‘데모스’란 바로 그처럼 이름 없고 돈 없는 존재들을 뜻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노예소유자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노동자 정당이 존재한다. 하지만 노동자 정당을 만드는 것은 결코 노동자들이 아니라 명망가적인 노동운동가들이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유럽정치사의 경험에 따를 때, 노동자 정당은 원내에 진출하자마자 곧장 정당의 논리에 종속된다. 노동자 정당이 노동자계급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노동자 계급 자체 내부로부터 노동자 정당이 성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 의회주의적 정치의 장 속에서 노동자 정당은 결코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정당 자신을 대변할 뿐이고, 특히 정당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노동자 정당마저도 종속될 수밖에 없는 정당의 논리란 어떠한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정리는 프랑스 공산당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 삐에르 부르디외의 「정치적 대표제―정치적 장의 이론을 위한 요소들」, 독일사민당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 로베르트 미헬스의 ꡔ정당사회학ꡕ(한길사, 2002) 및 황성모의 ꡔ현대사회사상사ꡕ(진명출판사, 1978)에 기본적으로 입각한 것이다.


1) 정당은 조직 유지와 확장의 논리에 종속된다. 그에 따라 계급적 요구의 대변보다는 득표 전략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2) 정당의 정책적 입장은 다른 정당들과의 변별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부각시켜 더 많은 득표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3) ‘당내 동질화’의 원리는 당의 통일된 입장으로부터 동떨어진 이념의 소유자로 하여금 주변화를 면치 못하도록 한다.
4) 의회가 정당활동의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되면서, 의회주의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그리하여 의회주의를 지탱해주는 생산관계와 사회관계의 기본적 전제들을 의문에 부칠 수 없게 된다.
5) 의회가 주된 무대가 됨에 따라 정당이 국회의원 중심으로 조직되기에 이른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고수하려고 하면서 대중들과 거리를 취하게 된다. 또 국회의원들은 대중들을 대변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필요에 종속된다. ꡔ정당사회학ꡕ에서 미헬스는 특히 노동자 정당과 노동조합의 지도부의 태도 변화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계급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한 부르주아 출신의 지도자들보다 권력의 논리에 취약한 노동자 출신 지도자들이 더욱 대중과 거리를 두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미헬스의 그러한 일반화가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 출신 대학 교수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듯이,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도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 정당이 다수의 득표를 얻어 국가기구에 대한 집행권력을 획득하면 어떻게 될까? 국가권력을 장악한 노동자 정당은 과연 노동자계급을 대변할 수 있을까?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등과 같은 유럽의 노동자 정당들의 경우를 통해서만 본다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동자 정당들이 장악한 국가권력은 자본주의 국가의 국가권력이었기 때문이다.
3.

자본주의 국가란 자본의 요청에 스스로를 복속시킨 국가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국가는 스스로를 자본의 요청에 복속시키면서 자본주의 국가화 한다. 왜 그럴까?
첫째로, 생산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이 멈추면 일할 장소도 없어지고 임금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소비할 물건들도 없어진다. 생산이 기본적으로 자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고용, 임금, 소비 등 거의 모든 것이 자본의 활동에 달려 있다. 이처럼 생산과 소비가 거의 전적으로 자본에 달려 있는 상태에서 국가의 임무는 자본의 안정적 재생산을 보장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되는 생산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 자본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할 경우 자국 자본들의 존립근거는 붕괴된다. 그렇다고 고립주의적 발전의 길을 선택할 경우 풍요로운 상품들의 세계에서 축출된 국민들의 좌절과 박탈감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국가는 경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도 없고 경쟁에서의 패배를 자초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국가는 결국 국민적 총자본가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고, 이는 노동자 정당이 권력을 장악한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여태까지의 역사적 경험에 따를 때, 노동자 정당도 권력을 장악할 경우 국민적 총자본가의 역할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 정당이 자본의 생산수단 독점을 금지하고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적 소유를 확립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경제적 방해작업들 및 기존의 국제적 분업연관으로부터의 일정한 단절에 따른 여러 어려움들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세계적 민주정부’의 수립이다. 즉 ‘세계적 민주정부’의 수립을 통해 우선적으로 국가들간의 자본주의적 경쟁을 종식 또는 완화시켜야 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양하기 위한 일국적 노력들을 국제적으로 지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끄 비데는 ꡔ악뛰엘 맑스(Actuel Marx)ꡕ10집(PUF, 1991)에 실린 「내일, 초(超)국가(sur-Etat)」라는 논문에서 세계적 민주정부의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UN의 허구적 성격을 지적한다. UN은 총회에서 민주주의의 겉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에 거부권이 부여되어 있는 한에서 실질적으로는 제국주의 동맹국가들의 기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UN과 대립할 세계적 민주정부는, 자끄 비데가 ꡔ진보평론ꡕ 13호에 실린 「대안의 위상학」에서 강조했듯이, 제국주의를 저지하면서 약한 나라들을 보호해야 할 것이고, 국가간의 자본주의적 경쟁을 규제하면서 공생적 재생산의 체제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적 민주정부는 세계적 수준에서의 생산규제와 불균등 교환의 규제를 실행하여야 한다. 그러한 규제들은 새로운 원칙, 새로운 전망을 전제한다. 어쩌면 세계적 민주정부를 위한 원칙적 전제들은, ‘세계사회포럼’을 필두로 하여 자생적으로 전개되는 국제적 연대의 운동들 속에서 국제적 수준의 ‘보편적인 사회적 약속’이란 형태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약속들은 법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약속들은 우리들에게 가장 기초적인 인간성을 최소한으로 보장해주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최소한 존중의 능력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줌으로써 말이다. 그러한 약속들은 우리들이 인간동물에서 주체로 상승하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들이다.

하지만 만약 국제적 문제들을 사상(捨象)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국내적으로는 여러 형태의 저항들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이 손쉽지 않다는 사실은 현행 민주주의의 귀족제적 성격을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 현행의 이른바 정치적 민주주의는 결코 ‘인민주권’에 토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우리가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기 위해 우리가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은, 현대 국가에서 국가권력의 소재 문제이다.


4.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모순적 통일체로 현상하는 오늘날의 국가들에서 국가권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행정부의 수반에게? 집권세력에게? 검찰에게? 군대에게? 아니면 자본에게?
노동자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한다고 할 경우, 노동자 정당은 과연 국가권력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물론이다. 만약 집권한 노동자 정당이 국가권력을 완전히 소유한다면, 상당한 국제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국내적으로는 생산수단의 노동자 소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내주는 것은, 집권한 노동자 정당이 국가권력을 결코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권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루이 알뛰세르는 국가를 ‘국가권력 + 국가기구’로 규정한다. 즉 국가권력이 국가기구와 분리되어 사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기구와의 관계에 따라 국가권력의 두 형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국가기구에 외재하는 국가권력, 즉 국가권력Ⅰ.
2) 국가기구를 통해 사회에 행사하는 국가권력, 즉 국가권력 Ⅱ.

국가권력이 국가기구를 자신의 의도에 종속시킬 수 있는 한에서, 국가권력은 국가기구에 외재한다. 이러한 국가권력이 국가권력 Ⅰ이다. 하지만 국가기구를 통해서 사회에 대해 행사되는 국가권력은 국가기구에 내재적인 것이고, 이것은 국가권력 Ⅱ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이종영, ꡔ사랑에서 악으로ꡕ(새물결, 2004)의 제5장을 참조할 것.

노동자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국가행정기구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 운용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 경우 집권세력으로서의 노동자 정당은 국가행정기구에 외재하는 국가권력 I을 일정하게 소유하게 된다. 하지만 그 국가권력 Ⅰ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집권세력으로서의 노동자 정당은 오직 정치적 국가기구에 적법하게 등재된 정치적 활동의 주체로서, 적법적 절차를 통해, 집권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행정기구 집행자인 집권세력의 권력은 국가권력 Ⅱ로서의 성격도 갖는다. 집권세력은 국가행정기구와 구분되는 또 다른 국가기구인 정치적 국가기구의 한 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의미의 국가권력 Ⅰ은 어디에 있을까? 현대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일 수밖에 없는 한에서, 국가권력 Ⅰ은 한편으로 국내 자본 중에서 잉여가치 생산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래서 민족자본의 확장에 가장 큰 파급효과를 행사하는 자본분파에 의해 소유된다. 국가기구의 운동이 이러한 자본분파의 의지에 실질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권력 Ⅰ은 자본주의 국가와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로부터 도출된다. 민주주의 국가란 현행의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정당의회주의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들로 구성된 것이자 자본주의적 국가기구의 집행을 다수파 정당에 맡기는 절차들을 내포하는 것이다. 정당의회주의에서는 단지 의회만이 정당 소속원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행정기구의 최고 집행자 또한 정당을 대표하는 자들 가운데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국가행정기구를 집행하도록 선거를 통해 선출된 자의 권력행사는 헌법을 비롯한 법질서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권력 Ⅰ의 또 다른 소유자는 정당의회주의의 ‘헌정질서’를 지지하는 계급적 세력일 수밖에 없다.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유지되던 본원적 축적이 겨우 1980년대에 들어 종식된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립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원천적 자본축적을 국가의 폭력을 통해 도출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성립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와는 달리 본원적 축적 국가에서는 자본과 노동력의 결합방식이 국가의 개입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된다. 첫째로, 자본의 형성 자체에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둘째로, 생산관계에의 노동력의 종속이 부르주아적 법질서에 의해 규정되고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의 직접적 행사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결국 본원적 축적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결정적 차이는 자본-노동관계의 생산․재생산에서의 폭력의 행사방식에서 찾아진다. 물론 자본-노동관계의 생산․재생산을 중층결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에서도 차이가 나지만 그것은 부차적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엄밀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까지의 이른바 ‘국가주도적’ 자본축적의 과정을 본원적 축적의 과정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국에서 ‘부르주아적 헌정질서’는, 그 중에 특히 ‘헌법’은,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없을 경우 인간의 기본적 권리마저도 언제든지 유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망가들로 구성된 정당 소속원들에게 선거를 통해 국가기구를 집행하고 또 국민을 대표하도록 한 헌법이 과연 우리들의 ‘사회적 약속’일 수 있을까? 정당들보다는 오히려 노동자 조직 연합체들의 대표들이 선거를 통해 국가기구를 집행하도록 하는 ‘헌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 개인이 집합적 생산수단을 독점할 수 없도록 하는 ‘헌법’,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로서 주거와 노동의 권리를 확고하게 보장하는 ‘헌법’, 누구나 다 기본적 생활을 누릴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헌법’, 모든 인간들 사이의 근본적 동등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헌법’이야말로 바로 ‘우리들의’ 헌법, 다시 말해 ‘보편적인 사회적 약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오늘날 국가권력 Ⅰ은 다음의 세 집단에 의해 소유된다.

1) 국가행정기구의 집행을 위임받은 국가권력 담지 집단
2) 국가기구의 운동논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본분파
3) 부르주아적 헌정질서를 지지하는 계급적 세력

그렇다면 ‘인민주권’은, ‘민중의 지배’는 어디로 간 것일까? 과연 부르주아적 헌정질서는 ‘인민주권’을 보장하는 것일까? 부르주아적 헌정질서가 보장하는 정당의회주의 하에서 민중은 과연 자신의 의사를 대변시킬 수 있는 것일까?


5.

ꡔ우정의 정치학ꡕ과 ꡔ불량배들ꡕ Jacques Derrida, Voyous, Galilée, 2003.
등의 저서에서 데리다는 민주주의가 계속 지연된다고, 계속 연기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현행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단지 ‘참칭’일 뿐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부재를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자기주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민중의 지배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민중을 오히려 지배-착취하고 있는 자들이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정당의회주의는 간접민주주의도 아니다. 진정한 민중의 대표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를 특징짓는 것은 정치와 시민사회의 분리, 시민사회와 생산양식의 분리라는 이중적 분리이다. 이와 관련된 보다 자세한 논의로는 이종영, ꡔ지배와 그 양식들ꡕ(새물결, 2001), 306-324쪽을 참조할 것.

법적으로 평등한 주체들 사이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시민사회는 생산양식을 은폐하는 장치이다. 법적으로 평등한 주체들의 무대인 시민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는 증발되어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시민사회가 곧장 정치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직업적 정치가들인 정당인들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산양식적 층위에서의 요구는 다시 한번 걸러지게 된다.
정치적 층위에서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계속 지연시킬 뿐이다. 정치적 층위에서의 민주주의는 노동과 생활의 층위에서의 민주주의의 부재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재 20살인 내가 앞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40년 동안 온갖 소외된 형태의 공장노동과 막노동을 뼈 빠지게 하다가 죽어야 한다면, 과연 정치적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40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하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 ‘민중의 지배’인 것일까?
따라서 민중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는 현재 명망가적인 직업정치인들에게만 한정된 정치의 장을 넓힘으로써만,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자본주의적 분리를 지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의 지양은, 말년의 루카치가 ꡔ사회주의와 민주화ꡕ에서 희망했듯이, 생산양식 층위에서의 요구들을 직접적으로 정치화하려는 것이다. György Lukács, Socialisme et démocratie, Messidor, 1989, 61-62, 102, 121쪽.
생산양식 층위에서의 요구들의 정치화는 여성적 공공성 여성적 공공성의 단초적 형태들에 대한 서술로는 오장미경, ꡔ여성노동운동과 시민권의 정치ꡕ(아르케, 2003), 제9장을 참조할 것.
이나 노동자적 공공성과 같은 여러 형태의 반(反)부르주아적인 민중적 공공성이 제도화되어 ‘보편적인 사회적 약속’을 성립시키고 그것으로 부르주아적 헌정질서를 대체하는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물론 정치와 경제의 분리의 지양은 진리담지자적 정당이 이끄는 레닌주의적 계획의 방식으로 실현될 수 없다. 레닌주의적 혁명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가운데 한 가지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 생산과 소비의 모순을 초월적 국가의 매개 없이 연합적-자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지양한 가장 모범적인 역사적 사례는 중세 유럽의 도시코뮌들에서 발견된다. 중세 도시코뮌들에서 동업조합 연합의 정치적 활동은 정치와 경제의 자본주의적 분리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임을 부각시켜준다. 도시코뮌의 형제맹약 또는 서약결사는 생산양식 담지자들의 정치적 결합의 성격, 경제의 정치화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코뮌에서는 자유경쟁을 제한하여 경제활동의 공생적(共生的) 재생산을 이루려는 경제정책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생산자들의 연합인 동업조합 연합의 자율적 정치를 통해 행해진다.
맑스는 「ꡔ자본론ꡕ의 미간행 제6장」에서 자본주의적 재생산양식을 중세 코뮌의 재생산양식과 비교하면서, 중세 코뮌의 재생산양식에서는 노동방법, 노동가격, 직인과 장인의 수가 “동업조합의 규정된 규범”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규범들의 목표가 “기존 소비요구 전체의 한계 내에서 생산을 유지하는 것”임을 밝힌다. K. Marx, “Matériaux pour l’<économie>”, Oeuvres II, Gallimard, coll. Pléiade, 1968, 373-374쪽.
모리스 고들리에는 맑스의 이 글을 주해하면서 “각각의 수공업자는 그들이 속해있는 동업조합 연합을 동시에 재생산한다는 조건하에서 생산을 한다. 생산과정에 부과된 한계는 수공업자들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면서 동시에 같은 동업조합 연합의 다른 수공업자들이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Maurice Godelier, “La théorie de la transition chez Marx”, 미출간 타이핑 원고, 1981, 17쪽.
생산자가 생산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며 다른 생산자를 또한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생산단위 내부의 봉건적 관계를 사상할 수 있다면, 중세 유럽 도시코뮌의 이러한 정치는 직접적 생산자가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생산자들 서로간의 공존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진정하게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앙리 피렌느, ꡔ중세 유럽의 도시ꡕ, 신서원, 1997과 막스 베버, 「도시유형학」, ꡔ사회과학논총ꡕ, 을유문화사, 1981 등을 참조할 것.
기존의 자본주의적 현실을 영원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중세 도시코뮌의 그러한 역사적 모델이 오늘날 더욱 발전된 형태로 다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기존의 복수 정당들을 노동자조직의 복수 연합들이 대체하고, 노동자연합들로 구성된 민주적 의회가 기존의 부르주아 의회를 대신하는 것이다. 사실상 폴란드 연대노조가 실현하려 했던 것은 일종의 노동자평의회 의회로서의 ‘자주관리의회’의 설립이었던 것이다. 형성사 편집부, ꡔ폴란드ꡕ, 형성사, 1981을 참조할 것.

민중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 두 가지 원리는 모든 사람들의 동등성에 대한 인정과 타자의 존재에 대한 배려이다. 중세유럽의 도시코뮌에서는 이 두 가지 원리가 적어도 동업조합적 수준에서 실현된다. 반면 타자들이 단지 착취의 대상이나 상품판매의 수단 또는 경쟁의 수단으로 간주될 뿐인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두 가지 원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정당의회주의의 발전은 자본주의를 그야말로 완성시켜주는 것은 아닐까? 정당의회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본은, 한편으로 개입주의적 국가의 거추장스런 족쇄로부터 벗어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정당의 활동에 힘입어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로 안정적으로 통합시키면서, 자유로운 날개를 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유럽의 이른바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처럼 말이다.
이제 고난에 찬 투쟁을 통해 한국에서 정당의회주의가 일정하게 ‘정상화’되었지만, 그동안 민주화를 위해 힘겹게 투쟁해온 지식인들이 이제 투쟁의 성과에 만족하여 보수세력으로 전화할까봐 두렵다. 현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의회주의의 발전이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를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의회주의의 틀을 통해 생산관계와 사회관계의 민주화를 추진해야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관계와 사회관계에서의 민주화가 정치의 장의 성격변화를 도출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