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 - 최원

同黎 2013. 3. 14. 13:51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
 
최 원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각의 진영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제안들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서 사회당과 사회주의정치연합(가칭)으로부터 나온 제안이 논쟁이 묶여 있는 하나의 매듭을 형성하는 것 같다.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은 사회당 측이 주장하듯이 오랜 동안 소위 좌파 진영을 규정해 왔으며(정성훈, "경선 비판과 사회주의대통령 후보 추대"를 참조하라) 좌파진영의 연대 그 자체를 좌초시켜온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이 좌파진영을 분열과 반목 속으로 몰아넣은 과거의 똑같은 질문을 현시점에서 다시 제기하면서 "통일"좌파를 외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이다. 논쟁은 여기 묶여 있으며 그것에 연루된 사람들, 조직들은 그 매듭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하나가 아니며 사회주의자들도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지점에서 명확히 갈라서는 입장을 보여준다. 용어들에 대한 회피를 차치한다면 여기서 대립은 실리주의적이고 계급협조주의적인 노선 대 혁명적이고 계급적대를 발본화시키는 노선이라는 구도로 나타난다. 즉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심적인 질문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사회당은 자신이 사회주의자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항상 '반자본'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그 양자가 반대 방향으로 사력을 다해 움직여 나가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10년동안을 항상 제자리에 맴돌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당이 말하듯 용어만 바꾸면서 10년 동안을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지루한 설전만을 반복해서 주고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양자가 그렇게 날카롭게 갈라서는 동안에조차 그들이 어떤 한 지점에서, 이를테면 그들 각자의 뒤편에서, 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꼬랑지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반대로만 움직이려 했으니 움직일 턱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두 개의 대립하는 입장의 가닥들이 하나의 '매듭'을 이루고 있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은 현재의 답보 중인 논쟁구도에 '파열구'를 내고 앞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매듭의 지점이 도대체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근대적인 정치 기획의 기본 단위인 '민족국가'의 근본적인 인정이라는 지점이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근대의 '부르주아적' 정치의 기획이라고 한층 더 정치하게 규정하고자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아우르는 근대 정치의 성격으로서의 '부르주아적임'은 결코 '자본주의적'인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것 또한 포괄하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의 테제를 제출하고자 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주의, 즉 모든 역사적 사회주의는 '일국사회주의'였다.

 

심지어 사회주의가 노동자 계급 국제주의를 강조하며 국제적인 연대의 틀을 사고했을 때조차 그것은 '민족주의적인 국제주의'로서의 소비에트 민족주의를 의미했을 뿐 진정한 '국제주의'를 실천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하게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주의에 대해 취한 이중적인 자세나 위선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근본 원인은 사회주의, 그리고 맑스주의 그 자체가 민족적 공동체에 대한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민족국가를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분석 및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의 가공 속에서 항상 부당전제했다는 데에 있다.

 

이는 약 10년전, 즉 '사회주의'가 진정한 민중운동의 전망으로 이야기되고 있던 바로 그 때 지배적이었던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이 이러한 민족 공동체적 경계들을 전제로 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적인) 국제주의의 헤게모니적 형태로서의 아메리카적 민족주의(팍스-아메리카라 일컬어지는―악의 무리와 싸우면서 진정한 미국적 생활 방식의 전지구적 전파를 꿈꾸는 초민족주의: 케인즈주의가 그 주된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의 헤게모니적 형태로서의 소비에트 민족주의(팍스-소비에트라 부를만한―악의 무리와 싸우면서 진정한 사회주의적 생활 방식의 전지구적 전파를 꿈꾸는 초민족주의: 혁명의 수출!)는 모두 민족주의적인 국제주의, 민족주의를 자체에 내장한 국제주의였던 것이다.

 

다른 한 편, 사회민주주의 또한 자본주의적 체제를 인정한 어떤 것이기 이전에 민족국가라는 단위를 인정한(부당전제한) 민족주의의 한 형태였다. 사회민주주의적 계급협조 노선의 물질적인 기반은 결코 국민들 다수에게 어필하는 온화한, 급진적이지 않은 사민주의자들의 정책기조에 놓여있던 것이 아니다! 사민주의의 진정한 물질적 토대는, 첫 째 중심과 주변의 분리라는 유럽적 민족주의('유럽'이라는 문명화된 민족!―이는 현재 다시 유럽공동체의 실제적인 출범으로 일깨워지고 강화되고 있는 환상이다)에 입각한 '신식민지적 초과이윤 착취'에 있었고, 둘 째 자본이 민족적 경계선 내에 존재하는 한에서 그것이 자국의 노동자계급에게 일정한 양보(기업내 노동자들의 시민성의 인정 및 그것의 타협적인 실현태로서의 '강력한 투쟁이 제거된 노동의 권리'의 인정으로 요약될 수 있는)를 해야만 한다는 그 자체로 민족국가에 긴박된 타협의 성사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환상은 정확히 '민족주의적인' 환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사회주의(그러나 도대체 '현실'이 아닌 사회주의란 무엇인가?―그것은 '종교'일 따름이다)가 무너지고, 사회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했으며, 미국의 헤게모니가 흔들리는 현재의 정세(9.11 테러리스트 공격은 바로 이러한 미국적 자유주의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사건이다)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르주아적 '민족국가'의 위기이며, '민족국가'를 내깃돈으로 걸고 제출되었던 상이한 근대적 정치적 기획들의 '공멸'이다. 자유주의적 국가부르주아들 뿐만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도 불리워지는 사회주의의 국가부르주아들의 그것까지, 부르주아적 기획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뭐라고 말했던가?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한 후에 그는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는 투쟁하는 두 계급 가운데 하나의 승리로 끝났거나, 두 계급 모두의 공멸(!)로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이러한 공멸인 것이다.

 

민족적-사회적 국가(national-social state)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진정 이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임에 분명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싸우는 당사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모두를 포괄,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의 '형해화' 속에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이제 자신의 고유한 '불안(anxiety)'을 경험하게 되며 따라서 더욱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전쟁 만들기는 바로 이것의 한 사례(아마도 가장 중요한)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순수한 동일성에 대한 욕망)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과거에 속하며 이제 그것을 묻는 것은 그 자체로 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현재 진행되는 ('야만'이 된) 민족주의와의 대결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엉덩짝 밑에 감추고 '부인'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공히 국제주의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현재 수행해야할 중차대한 임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는 더이상 우리의 질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질문은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발리바르)가 되어야만 한다.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질문을 넘어서 사회주의 내의 야만을 직시하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국제주의'에 하나의 이름 혹은 차라리 다수의 이름들을 주기 위해 우리는 오늘 투쟁의 '전선'을 꾸려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무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