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

同黎 2013. 3. 14. 13:51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 - 최종심급- 지배 내 구조
 
처음부터 문제는 "모순들의 복잡성"이다. 모순들의 복잡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체 구조 안에 특정한 방식으로 연루된 각각의 모순의 종별적인 실존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록 모순들의 복잡성의 외양(즉, "과잉결정의 외양")을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모순들의 복수성과 복잡성을 하나의 본질적인 모순으로 계속 환원하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알튀세르가 의존한다는 것은 따라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로부터 변증법의 대상("헤겔에겐 관념의 세계, 그리고 맑스에겐 실재 세계"(Althusser 1993: 91-93))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와 그것의 구조에 있어서 맑스를 헤겔로부터 정교하게 분리할 필요가 생겨난다.  러시아의 정세 속에서 전개된 모순에 대한 레닌의 독특한 사고와 그의 "약한 고리"론을 따라 알튀세르는 정세에 각인된 비-경제적인 '부차적' 모순들의 종별성을 변증법 안에 회복시키고 다양한 모순들의 물질적인 실존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경제적 모순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인다.

그리하여, 모순들의 복잡성의 문제는 다양한 모순들과 그것들의 측면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즉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모순들이 어떻게 다른 모순들에 종별적으로 관련될 수 있는지, 복수의 모순들이 다른 모순 안에 그 모순의 조건으로서 반영될 수 있는 그 독특한 방식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의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서, 핵심문제는 "자본-노동 모순이 결코 단순하지 않고 항상 그것이 그 안에서 작동하는 역사적인 구체적 형식들과 환경들에 의해 종별화 된다" (Althusser 1993: 106)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잉결정"은 알튀세르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가지고 들어오는 개념이다. 여기서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의 "과잉결정" 개념은 단지 전체 구조를 구성하는데 참여하는 심급이 여럿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사회구성체의 경제주의적인 이론화로부터 진정으로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경제주의자들은 '우리 또한 사회구성체 안에 많은 심급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답변할 그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경제주의적 관념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는 "경제에 의한 결정"에 의해 다양한 심급들 사이의 관계를 고정하려는 바로 그 시도 자체를 비판하는 곳까지 나가야만 한다.


심급들의 위계를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 각각의 심급에 그것의 본질과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의 관계들의 보편적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경제주의'(기계론)이고 진정한 맑스주의의 전통이 아니다. 과정의 필연성이 '상황에 따른' 배역의 교환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배역과 배우를 영원히 일치시키는 것이 경제주의이다. (Althusser 1993: 213)

 

아무 것도 고정되지 않는다. 모든 심급들은 '복잡하게 구조화된 전체'의 독특한 배치로서의 주어진 정세의 종별성 속에서 서로 서로 역할을 바꾼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러한 논리의 명백한 결과는 경제에 의한 결정이 바로 자신의 '결정'이라는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만일 모든 심급 및 그것의 의미가, 사실 그 자체 정세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다른 모든 심급들(과 심지어 자기 자신)의 독특한 배열에 의해(즉,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면,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론이 사회구성체의 다원주의적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따라서, 문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분명 경제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다원주의를 피해야 한다는 아포리아(aporia)와 마주친다.


  그러므로 사회구성체를 '과잉결정' 개념만 가지고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엔 그 개념 자체에 내적으로 구성적인 또 다른 개념, 즉 '과잉결정'으로 하여금 다원주의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또 다른 개념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이론적인 필요로부터 '최종 심급' 개념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이 따라나온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최종심급' 개념을 경제주의의 "억압된 것의 회귀"(프로이트)를 목도하지 않으면서 '과잉결정'의 개념 안에 각인시킬 수 있는지를 아는 일이다. 따라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메커니즘과 '최종심급'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알튀세르에게 핵심적인 일이 된다.


  모순들의 복잡성이라는 우리가 애초에 제기했던 그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모순과 그 측면들의 불균등성을 "변증법의 핵심"으로서 "설명하고 발전"시키려는 레닌과 마오의 노력을 따라가면서(Althusser 1993: 194), 알튀세르는 모순들의 주어진 복잡성이 단순한 기원적 모순의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논증해 보인다.

 

주요 모순과 그것의 주요 측면은 항상 이미 그것의 부차적 측면과 미리 주어진 복잡하게 구조화된 전체 안에서의 부차적 모순들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식이 아무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더 이상 어떠한 기원적인 본질도 없고 오직 항상-미리-주어져있음만이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어떤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고 대신 구조화된 복잡한 통일성의 항상-미리-주어져있음이 있다."(Althusser 1993: 198-99)

 

그러나, 모순의 구조의 이러한 도식화는 같은 말에 의해 거기엔 주요 모순이 있다는 것과 모순의 주요 측면이 있다는 것, 즉 구조화된 전체는 하나의 "지배 내 구조"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구조 안에는 그 어떤 지배적인 모순도 없고 그 어떤 지배적인 심급도 없다고 말하자마자, 우리는 모순의 모든 종별성이 전체 원의 중심, 즉 정신의 주변에 등질적으로 배치되는 구조적 동심원이라는 바로 그 헤겔적인 셰마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복잡하게 구조화된 전체 안에 '탈-중심화된 복수의 원들'을 갖는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다양한 심급들 사이에 위계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는 오직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을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알튀세르에게 있어 '최종심급' 없는 '과잉결정'이란 일종의 난센스에 불과하다.[주12]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의 설명은 어떻게 경제주의적인 설명과 구별되는가? 알튀세르는 결정에는 "전위"와 "응축"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보여준다(Althusser 1993: 210-11).

 

혹자는 이러한 정신분석학적 용어들이 맑스의 변증법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들이야말로 진정 "대립물의 동일성"이라는 바로 그 변증법적인 개념을 위한 완벽한 묘사이다.

 

즉, 이 용어들은 어떻게 한 모순의 두 대립적인 측면이 서로에게 관련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그들 사이에 동일성을 형성하게 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전위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와 같이 리비도적이든 혹은 맑스에게 있어서와 같이 사회적이든 간에, 본질적으로 갈등적인) 에너지가 하나의 모순 혹은 모순의 한 측면으로부터 또 다른 모순 혹은 모순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동되는 형식적인 왜곡의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주요 모순은 전위에 의해 부차적인 모순과 자신의 역할을 교환하면서 그 자신이 부차적인 모순이 될 수 있고, 이는 그 주요 모순에 투여된 에너지가 특정한 국면 하에서는 또 다른 부차적인 모순 쪽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응축은 여러 가지 모순들이 하나의 모순으로 융합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종류의 형식적인 왜곡이다.

 

그것은 각각의 모순이 가진 에너지가 응축에 의해 폭발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 매우 빠르게 성공했다는 것은 단지 극단적으로 독자적인 역사적 상황의 결과로서 완전히 다른 힘들, 완전히 이질적인 계급 이해들, 완전히 반대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들이 융합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라고 레닌이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응축'의 이러한 현상에 관해 논하고 있었다(Lenin 1964: 302)).

 

일반적으로 이러한 두 가지 왜곡에 의해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는 모순들 사이에 주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의 역할을 할당하고, 또한 다른 국면들 속에서는 그 역할들을 재-할당한다.

 

따라서,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항상 다양한 모순들 사이의 위계적 관계들을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이유로 지배적인 심급(주요 모순)을 '최종심급'("고정된" 기본 모순)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배적 심급의 고정 및 다양한 심급들 사이의 관계 그 자체의 고정을 의미한다(이러한 고정으로부터 구조주의의 저 "조합"에 이르는 것은 단순한 용어의 교체라는 한 발자국으로 족하다). 알튀세르는 위에 인용된 경제주의 비판을 위한 자신의 진술에 이어 곧바로 다음과 같이 써내려간다.


 
사전에 영원히 최종심급에서-결정적인-모순과 지배적 모순의 역할을 동일시하는 것, 항상 이러 저러한 한 '측면'(생산력, 경제, 실천)을 주요 역할에 동화시키고 또 이러 저러한 또 다른 측면(생산관계, 정치, 이데올로기, 이론)을 부차적인 역할에 동화시키는 것이 경제주의이다 - 반면에, 실재의 역사 속에서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은 정확히 경제, 정치, 이론 등의 사이에서의 주요 역할의 치환 속에 행사된다. (Althusser 1993: 213,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알튀세르의 설명이 단지 경제주의와 다원주의의 타협에 불과한 것으로 고려될 수 있는가에 관해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여기서 우리는 글룩스만이 사회구성체에 관한 알튀세르의 이론을 가리켜 "타협적" 다원주의라고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여기서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경제주의를 가지고 다원주의를 공격하고('최종심급' 없는 '과잉결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를 가지고 경제주의를 논박하는(최종심급의 지배적인 심급에의 고정은 단지 경제주의일 뿐이다)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지 그 양자의 평형점을 찾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이는 훌륭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질문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알튀세르 자신이 여기서 그 어떤 공백이나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전도된 상들 사이의 거울상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장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정확히 어디에 알튀세르 자신에 의한 "인식론적 단절"이 놓여 있는가? 도대체 다원주의와 경제주의의 대상과 구별될 수 있는 그의 '최종심급' 개념의 독특한 대상이란 무엇인가?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 - 최종심급 II - 탈-다원화(De-Multiplication) 
 
'최종심급' 개념에 있어 알튀세르 자신의 '인식론적 단절'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최종심급에서..." 라는 엥겔스의 정확히 동일한 표현과 대결하는 곳으로 들어가야만 한다.[주13]

 

여기서 알튀세르의 엥겔스에 대한 비판의 모든 세부사항들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바의 요점을 먼저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엥겔스의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은 두 가지 수준에서 진행된다. 첫 번째 비판은 엥겔스가 경제적인 '필연성'과 상부구조적인 '우연들'의 관계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에 관련된다.

 

"한 없는 우연들 가운데서 ... 경제적 운동이 마침내 자신을 필연적인 것으로 드러낸다"(Marx/Engels 1962: 488)고 엥겔스는 쓴다. 이러한 엥겔스의 진술은 알튀세르가 보기엔 경제의 필연성을 그 "우연들에 완전히 외적인 것"으로서만 고려할 뿐인데, 왜냐하면 엥겔스는 사실상 그 자신이 상부구조만큼이나 많은 우연들로 구성된 경제가 어떻게 무한하게 흩어지는 우연들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결코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엥겔스는 상부구조적 요소들의 효과들을 단지 우연적인 것으로서 고려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부구조적 요소들의 효과성과 종별성을 인식하고 이론화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한다.

 

두 번째 비판은 다음과 같은 엥겔스의 도식화에 대해 행해지는데, 그것은 역사의 전체 운동의 결과라는 것은, 비록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역사의) 최종 결과 자체에 포함되는 개별적인 의지들의 합이라는 도식, 혹은 개별적인 의지들이란 "하나의 [최종적] 결과를 야기하는 힘들의 평행사변형들의 무한한 연쇄" (Marx/Engels 1962: 489) 안에 있는 그 구성적 힘들이라는 도식이다.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엥겔스는 그와 같은 설명에 의해 구성부분들에 대한 결과의 초월성이라는 테제를 생산할 뿐이다.

 

그러나, 결과라는 것은 우연들의 "공백들"을 축적함에 의해서 달성될 수 없다. 최초의 평행사변형(혹은 두 번째의, 혹은 세 번째의, 즉, 그 무한한 연쇄 가운데에 있는 것이면 어떤 평행사변형이든)의 끝에 주어진 결과힘은 그 무한한 평행사변형들의 연쇄에 의해 생산되는 실질적인 최종 결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그리하여 주어진 어떠한 중간적인 결과힘도 그것이 우연적이라는 점에선 여전히 "절대적인 공백"에 불과하다(Althusser 1993: 123). 엥겔스의 도식에서라면 우리는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을 주장하기 위해 심지어 최후에 주어진 결과를 애초에 기대된 결과와 몰래 바꿔치기 해야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비판의 핵심은 엥겔스가 결코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의 내재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엥겔스에게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단지 역사적 연쇄의 끝에 심어지는 어떤 것이고 기억의 회고적인 재구성을 통해 과거의 사건들 위에 사후적으로 부과되는 어떤 것일 뿐이다. 따라서, 경제에 의한 상부구조적 요소들의 결정의 이러한 내재성을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알튀세르에겐 '최종심급'의 전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필연적인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최종 결과가 우연적인 평행사변형의 무한한 연쇄로부터 연역될 수 없음을 증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쓴다.


문제는 역으로, 혹은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단 번에!) 제기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역사적 사건을 비-역사적인 사건들의 (불확실한) 가능성으로부터 끌어내길 제안한다면,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일은 - 심지어 양질전화의 법칙을 환기함에 의해서조차 - 결코 불가능하다. 이러저러한 하나의 사건을 역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사건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스스로 역사적인 그 형식들 속으로의 그 사건의 삽입이다. (Althusser 1993: 126, 강조는 인용자)


알튀세르는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이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반드시 이미 역사적인 형식들, 즉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의 필연성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형식들 속에 삽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삽입"이라는 말은 그 용어의 가장 강한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은 그것이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역사의 주체들에 의해, 혹은 심지어 경제적인 필연성 그 자체에 의해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역사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식으로 설명될 때 사건들과 역사적인 필연성은 그것이 내재성의 외양을 취할 때 조차 여전히 외적으로 관련될 뿐이다.

 

"삽입"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들이 그 역사적 형식들의 필연성(즉 결정하는 것)과 반드시 똑같은 수준에 위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즉, 상부구조와 토대가 두 개의 수준이 아닌 하나의 동일한 수준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삽입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그것에 속한다는 것, 그 속에 놓여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정하는 것과 결정되는 것이 이론적인 구성의 같은 수준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우리는 진정 사건들과 그것을 역사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서로 서로에게 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심급들 사이의 이 같은 거의 폭력적인 압축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히 철학의 고전적인 문제 중 하나인 '하나와 다수(one and many)'라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철학적 문제를 풀기 위한 적어도 세 개의 주요한 (근대적인) 시도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즉,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쯔의 그것들 말이다.

 

데카르트는 실재적인 구별이란 본질적으로 양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세계 안에 많은 실체들이 있다는 사실과 실체란 스스로를 원인으로 갖는 사물이며 자신의 실존에 관해 자기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정의 사이의 논리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다. 많은 실체들이 존재한다고 그가 말하자마자 그는 그 다수의 실체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야만 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체 자체의 정의를 훼손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라이프니쯔 역시 자연 안에는 무한수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적어도 '하나와 다수'의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하나 제시했다. 그의 해결책은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것이었다.

 

즉, 서로 독립적인 모든 단자들이 궁극적으로 신(神)이라는 단자에게 의존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바로 그 예외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를 신에게 허락함으로써, 그는 세계의 질서와 그것의 하나임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주14]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스피노자는 실재적인 구별이란 순수하게 "질적이고 형식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무한수의 속성들이란 실체가 가진 그만큼의 많은 질들(qualities)이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두 속성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즉,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도움 없이 인식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로부터 그들이 두 존재를 혹은 두 다른 실체를 구성한다고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 하나[의 속성]은 다른 하나에 의해 생산될 수 없지만 각각은 실체의 현실 혹은 존재를 표현한다"(Spinoza 1988: 416).

 

따라서, 실체는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무한하게 다수이다. 이 사고의 체계를 이름 짓기 위해, 나는 '탈-다원화(de-multiplic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탈-다원화'는 '단일화(unification)'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를 단일화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형식적으로 다면화시키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구별이야말로 실재적인 구별이기 때문에 실체의 형식들(속성들)의 다양성은 결코 라이프니쯔의 경우에서 그렇듯이 실체에 환원될 수 있는 현상적인 다양성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그 형식들이 실체 그 자체의 "계보"(Deleuze 1992: 14)를 내적으로 구성하게되는 정도까지 실체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실체로서의 신의 무한한 현실들이고 무한한 역능들이다(Cf. Macherey 1997: 65-96). 바로 이러한 탈-다원화의 체계안에서 우리는 내재성의 의미를 진정으로 식별할 수 있다.

 

속성의 현실은 실체 그 자체의 속성과 똑 같은 정도로 현실적[실재적]이다. 이제 알튀세르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심지어 양질전화의 법칙을 환기시킴에 의해서조차 불가능하다."(Althusser 1993: 126, 강조는 인용자)

 

즉, 알튀세르에게 역사의 과정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이지만 그것은 그것의 형식들에 있어 다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에게 있어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의 핵심적인 성격은 바로 '탈-다원화'의 바로 그 의미 속에서 찾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복잡성이 자신의 핵심들 가운데 하나로 지배를 함축하게 되는지의 이유이며 지배는 그 구조안에 각인되어 있다"고 쓰고나서 알튀세르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단일성(unity)이 단순한 기원적이고 보편적인 본질의 단일성이 아니며 또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저 맑스주의에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인 '일원론(monism)' 에 관해 꿈꾸는 자들이 생각하듯이 '다원주의'의 신전에 단일성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당히 다른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맑스주의에 의해 논의되는 단일성이란 복잡성 그 자체의 단일성이라는 것, 복잡성의 조직화 및 분절의 양식이 정확히 그것의 단일성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것 말이다. 그것은 복잡한 전체가 지배 내에서 분절된 구조의 단일성을 갖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최종 분석에서 이러한 종별적인 구조가 모순들 사이의 그리고 그들의 측면들 사이의 지배의 관계들을 위한 기초이다. (Althusser 1993: 202, 강조는 인용자)


복잡성 그 자체의 단일성! 이보다 더 탈-다원화의 의미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위에서 이미 논의되었듯이 다른 모순들 및 심급들 사이의 위계 관계들의 치환으로서의 바로 그 '지배 내 구조'를 생산하는 것은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의 기능이다. 알튀세르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한 정세의 단일성 안에서 다른 구조들에 대하여 갖는 한 구조의 이러한 '지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구조에 의한 비-경제적인 구조의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원칙을 참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고 이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야말로 효과성의 위계 속에서의 구조들의 전위나 전체의 구조화된 수준들 사이에서의 '지배'의 전위의 필연성 및 인지가능성을 위한 절대적인 사전조건이라는 것을 보여줬으며, 오직 이 '최종심급에서의 결정'만이 그런 전위들에 하나의 기능이라는 필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관측가능한 전위들의 자의적인 상대주의를 피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Althusser/Balibar 1979: 99, 강조는 인용자)

 

알튀세르에게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전체 사회구성체의 탈-다원화의 형식 속에서 작동한다. '탈-다원화'는 각 심급의 물질적 실존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 구조의 심급들의 독자적인 배치에 불과한 정세의 형성을 이론화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다. 따라서, 만일 알튀세르가 '최종심급'의 이론적인 개념을 발전시킨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이 '탈-다원화'의 의미를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뒤이은 절에서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어떻게 이 일을 수행했는지, 또 어떻게 그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다원주의와 경제주의로부터의 동시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탈-다원화'의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으로서의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생산할 수 있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 - 최종심급 III - 단락(Short Circuit) 
 
 『자본을 읽자』의 '이탈리아 판 서문'에서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지배, 과잉결정, 생산과정 등"의 "범주들"은 "'구조주의'에 이질적"인 것들이라고 쓴다(Althusser/Balibar 1979: 7). 따라서 '구조주의'가 여기서 그 범주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그 범주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물론 맑시즘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저 범주들이 심오하게 그 본질에 있어 정신분석학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특히,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아니 차라리 결과적으로 우리는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도 역시 그 개념이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에 구성적인 정도까지 깊이 정신분석학적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는 알튀세르의 사회구성체에 관한 이론적인 구성과 프로이트의 정신과정에 관한 이론적인 구성 사이의 비상한 유사성을 보고 놀라게 된다. 


  여기서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학 상의 잠재적인 꿈-사고, 명백한 꿈-사고 및 (꿈-작업으로서의) 무의식 사이의 관계에 관한 슬라보 지젝의 설명을 우회해보자.

 

지젝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의 '범-성주의(pan-sexualism)'에 대한 경멸들의 대부분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역설에서 찾는다. 즉, 프로이트는 꿈 속에서 분절되는 욕망이 본질상 성적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의해서 분석된 많은 사례들에서 실재로 발견되는 욕망들은 특별히 성적일 것도 없는 것들이라는 역설 말이다(Zizek 1998: 12).

 

그러나, 지젝은 이러한 정신분석학에 대한 경멸은 특정한 분석에 의해 마침내 발견되는 '잠재적인 꿈-사고'가 꿈에서의 '무의식적 욕망들'이라는 식의 근본적인 이론적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프로이트가 줄곧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정확한 반대인 것이다: "'잠재적인 꿈-사고' 안에는 아무 것도 '무의식적인 것'이 없다."(Zizek 1998: 12). 잠재적인 꿈-사고란 일상 언어 안에서 분절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정상적인(일상적인) 사고인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이론적인 토픽 안에서 차라리 의식/전-의식의 심급에 속하는 것이다. 실재로 발생하는 일은 이러한 잠재적인 꿈-사고가 특정한 상황 속에서 (무의식적인) 1차 과정 속으로 끌어당겨지는 것이다(Freud 1995: 498).

 

따라서 잠재적인 꿈-사고와 명백한 꿈-사고 사이의 관계는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상적인(비록 전-의식적이고 파편화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상적 사고들과 그것들의 꿈-서사(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으로부터 기억하는 내용이다)로의 생산 사이의 관계이다.

 

'전위'와 '응축'의 수단을 통해 이러한 잠재적인 꿈-사고를 (서사적인) 맹백한 내용들로 생산하는 것 안에 개입해 들어오는 것이 바로 꿈-작업으로서의 무의식이다(이것이 바로 왜 프로이트에겐 꿈의 해석이 정상적 꿈 텍스트에 대한 비정상적인 취급법이 되는가의 이유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작동하는가? 지젝이 말하는 바를 조심스럽게 읽어보자.


 

이러한 '정상적인' 의식적/전-의식적 사고는 단순히 의식에 대해 갖는 그것의 '불쾌한(disagreeable)' 성격 때문에 억압되어 무의식 쪽으로 끌어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억압되어 무의식 안에 위치된 또 다른 욕망(즉 '잠재적인 꿈-사고'와 아무 관계도 없는 욕망)과 그것이 일종의 '단락(short circuit)'을 이루기 때문이다. (Zizek 1998: 13, 강조는 인용자)

무의식은 항상 전의식적인 잠재적 꿈-사고와 단락된 것으로서만 작동한다. 즉, 아무리 열심히 우리가 하나의 심급으로서의 무의식을 절망적으로 찾아 헤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단순하게 무의식을 꿈 형성 안에서 다른 (전-의식적/의식적) 심급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엄격하게 말해서, 무의식은 오직 그것이 다른 심급들의 표면에 균열을 가하는 방식 속에서만 실존하기 때문이다.[주15]

 

그리고, 만일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학과 알튀세르의 사회구성체에 관한 이론화 사이에서 변증법의 형상에 관한 유비가 이 지점까지 연장되는 것이 허용된다면,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으로서의 '단락'이야말로 '최종심급에서 결정적인' 심급이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움직이는 방식과 맞아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즉, 맑스주의 안에 도대체 '단락'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나는 알튀세르의 제자이기도 한 에티엔 발리바르에 의해 주어진 맑스의 "이론적 단락"에 관한 설명을 참조하고자 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맑스의 정치 경제학 "비판"의 의미는 특정한 사법적 매개들에 의한 정치와 경제의 바로 그 분리(즉,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 및 시민 사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비판이다.

 

맑스에게 노동관계는 즉각적으로 어떠한 매개도 없이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데, 이는 임금-노동 관계가 부등가 교환이라는 (즉, 그것이 착취라는) 사실의 폭로가 그 자체 정치적인 계급적대를 경제적 과정의 한가운데에 위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경제학은 계급 적대를 경제적 과정의 바깥에 위치시킴으로써 계급투쟁을 자본주의 사회에 종별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닌, 즉 우연적인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자연적 갈등으로 표상한다. 정치 경제학은 어떻게 그러한 정치적이면서 경제적인 계급 갈등들을 경제적 과정으로부터 몰아내는데 성공하게 되는가?

 

물론, (임금과 교환되는 교환가치로서의) 노동력을 (그것의 사용가치로서의) 노동 그 자체와 혼동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경제학의 혼동은 노동자가 자본가만큼이나 교환의 자유로운 주체라는 자본주의적 소유법의 사법적 환상(즉, 임금노동은 그것이 두 자유로운 경제주체들 사이의 자발적인 교환이기 때문에 어떠한 착취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환상)을 통해서만 오직 가능한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그렇게 경제와 정치 사이에 법적 매개를 삽입함에 의해 생산관계를 탈-정치화시킨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의 비판은 당연히 바로 그 매개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주16]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부불의 잉여노동이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추출되는 종별적인 경제적 형태가 지배, 종속관계를 결정한다. 이 지배, 종속관계는 생산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하지만 또한 생산에 결정적 방식으로 반작용한다.

 

생산관계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적 공동체의 전구조와 동시에 그것의 종별적인 정치적 형태는 이 종별적인 경제적 형태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리가 전체 사회구조의, 그리하여 또한 주권, 종속 관계의 정치적 형태, 요컨데 그때 그때의 종별적인 국가형태의 가장 깊은 비밀과 은폐된 토대를 찾아내야 하는 곳은 [...] 언제나 직접적 생산자에 대한 생존조건 소유자의 직접적 관계 속에서이다. (Marx 1991: 927, 강조는 인용자)

발리바르가 여기서 강조하는 단어는 "직접적[unmittelbar - imm diat]"이라는 단어다. 정치적인 "지배, 종속 관계"가 노동과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매개 없이 나온다.

 

맑스는 여기서 명확하게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엔 어떤 매개도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인 공동체와 정치적 형태 양자 모두가 생산의 실재적인 관계로부터 나오고 그것에 의존한다. 발리바르는 만일 매개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에 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 과정의 한편과 경제적 공동체 및 국가의 다른 한편 사이에 온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인 인과율로서의 노동관계가 각각 정치적 매개들이나 경제적 매개들을 통해서 그 두 영역에서 동시적으로 전개된다. 국가와 경제적 공동체 사이의 상관관계는 그리하여 그 이질적인 두 가지의 "평행한"(스피노자) 관계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결정"은 경제에 의한 정치의 결정이 아니다. 만일 "지배, 종속 관계"가 직접적으로 생산관계로부터 매개 없이 나온다면, 즉, 생산관계가 무매개적으로 정치적이라면, 정치적인 형태와 경제적인 공동체 양자 모두를 결정하고 형상화하는 그 토대(base)는 아직 그 용어들의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라고 불릴 수 없는 관계이다.

 

그것은 정치와 '정치의 타자'로서의 경제 사이의 "이론적 단락"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는 독특한 물질성인 것이다(그리고, 이 단락된 관계는 개념들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시간적인 순서와는 별 상관없는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배치 상에 있어 단락되고 있는 그 양자를 선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으로부터 '계급관계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혹은 차라리 '계급투쟁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으로 교체, 수정해야할 부인할 수 없는 이론적인 필요인 것이다. 즉 여기서 경제와 '최종심급'의 바로 그 동일화를 의문시해야할 필요성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한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재빨리 다음과 같이 말하자. 즉, 그 같은 이론적인 필요가 결코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문제틀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정치와 경제의 이론적 단락은 그 양자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우리가 만일 이 이론적 단락을 최대한 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또 다른 테제로 인도되는 듯 보인다. 즉, 이론적인 단락은 사회구성체의 수직적인 구성을 그 안에서 다양한 심급들을 구별할 필요 없는 그것의 수평적인 구성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다른 심급들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담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는 단지 '절대 과학'이라는 이론적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차라리 이제 우리는 사회구성체의 이론을 그것의 수직적인 구성과 그것의 수평적인 구성 사이의 상호적이고 동시적인 전위(transposition)의 가능한 형식 속에서 제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는 정태적인 방식으로 수직적인 것으로만 혹은 수평적인 것으로만 표상될 수 없으며, 오직 그 양자의 역동적이고 항상적인 전위들로서 표상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수직적인데 왜냐하면 거기엔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고 서로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복수의 다른 심급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수평적인데, 왜냐하면 거기서 심급들이란 항상 다른 심급들에 단락됨으로써만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마 그 양자가 교차하는 바로 그 점이 '정세'라는 것의 가장 엄격한 정의일 것이다. 즉, 각각의 구체적인 정세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다양한 구조적인 심급들이 단락되는 그 종별적인 방식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정세는 이러한 복수의 심급들의 비틀리고 다시 풀어지는 운동들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이러한 식으로 정치와 경제의 이론적 단락은 '탈-다원화'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발본화시킨다.[주17]


  혹자는 여전히 어떤 실증적인 증거를 요구하면서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의 바로 그 의미로서 생산했다고 발리바르가 1983년에 쓰여진 자신의 텍스트에서 주장한 그 이론적인 단락이 알튀세르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ISA가 쓰여진 것과 정확히 같은 해(1970년 1월)에 쓰여진 알튀세르의 「맑시즘과 계급투쟁」이라는 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계급투쟁은 사회 계급들의 실존의 (도출된) 효과가 아니다. 계급투쟁과 계급들의 실존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계급투쟁은 『자본』을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고리'이다. 맑스가 『자본』에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주었을 때, 그는 단지 고전적인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적) 경제주의적 환상을 비판하자고 제안한다고 말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는 생산 및 경제적 교환의 활동을 사회적 계급들, 정치적 투쟁들 등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분리하는 부르주아적 환상을 발본적으로 비판하길 원했다. (Althusser 1976: 63, 강조는 인용자)


 

알튀세르는 계속해서 이렇게 써내려 간다.


 

생산력들은 생산관계들, 즉 착취관계들의 지배하에서 노동과정 내에서 작동하도록 만들어진다. 노동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임금을 지불 받는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착취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만을 소유하고있고 그것을 팔도록 강제당하는(배고픔에 의해: 레닌) 임금노동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고 착취를 위해, 즉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해, 노동력을 사는 자본가가 있다는 것이다. 적대적인 계급들의 실존은 그러므로 생산 그 자체의 한 가운데에, 생산관계들 안에, 각인되어 있다. (Althusser 1976: 63-64, 강조는 인용자)


 

무엇이 이곳에 없는가? 단지 그것은 '단락'이라는 이름 뿐이다(그가 엥겔스의 최종심급에 대해 논의했을 때 그는 대신 "삽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하자)! 확실히 이름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여기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경제와 정치의) 이론적 '단락'이야말로 알튀세르 그 자신의 핵심적인 문제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로지 그럴 때에만 우리는 왜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 '과잉결정'과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범주를 제안한 이후 ISA에서의 생산과 재생산의 셰마를 향해 움직여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재생산의 셰마를 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바로 그 개념의 이론적인 정교화로서 제시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재생산 셰마에 관한 뒤따르는 논의 속에서 잊혀지는 도입부에 불과한 어떤 것이 아니다. ISA의 첫머리에서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건축물의 은유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토대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을 표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 맑스주의적 토픽, 즉 건축물(토대와 상부구조)의 공간적 은유의 커다란 이점은 [...] 그것이 결정이라는 질문이 [...] 결정적이라는 것을 폭로한다는 것이다 [...] 건축물의 공간적 은유에 의한 모든 사회구조의 이러한 표상이 갖는 가장 큰 불리한 점은 명백히 그것이 은유적이라는 사실, 즉 그것이 묘사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Althusser 1972: 136)


 

알튀세르에 관하여 적어도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자라면 그는 확실히 알튀세르에게 있어 "묘사적"이라는 용어가 특별히 개념 형성을 위한 생략될 수 없는 필연적 계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사실, 발리바르는 이를 아예 "묘사적 개념"이라고까지 부른다(Cf. Balibar 1991: 59-89)).

 

그렇다면, 무엇이 여기서 필연적인 계기인가? 알튀세르가 여기서 작은 따옴표를 가지고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을 "경제적 토대에 의한"이라는 구절로부터 주도면밀하게 분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즉, 필연적이고 생략될 수 없는 것은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다. 의문시 되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건축물의 은유이며 '최종심급'의 "경제적 토대"와의 동일화인 것이다. 요컨데, ISA 전체가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을 모든 가능한 형태의 경제주의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키려는 이론적인 시도로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제 ISA는 경제와 정치의 이론적 '단락'이라는 문제틀의 최대화로서 읽혀질 수 있다. 즉, 이미 단락된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의 또 다른 타자, 즉 '타자의 타자'로서의 이데올로기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이론적인 '단락'에 의한 '단락'의 문제틀 그 자체의 최대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사이의 이중적인 '단락'이야말로 알튀세르가 탈-다원화의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최종심급' 개념 내에서 생산해낸 인식론적 단절의 바로 그 부인될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최종심급 IV - 물질성(들)

 

그러나 아직 나에겐 하나의 질문이 더 남아 있는 듯 하다.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이 이론적인 '단락'의 문제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종심급' 개념 그 자체는 그것이 인식론적 단절을 생산하자마자, 즉 그것이 자신의 이론적인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사라져버리는 것이라고 말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알튀세르가 수행한 저 이론적인 '단락'의 내용이 스스로의 실존 및 효과성을 갖는 복수의 심급들의 '탈-다원화'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왜 아직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을 필요로 하는가? ISA에 있어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의 종별적인 지위와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관한 조사를 위해 내가 여기서 가져오고자 하는 것은 ISA가 기능주의라는 알튀세르에 가해졌던 빗발치는 듯한 비판들이다. 왜 ISA가 기능주의인가?

 

비판들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ISA의 논리가 이러 저러한 주체들, 즉 그들의 활동 및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알튀세리앵이라면 그는 알튀세르가 단지 우리에게 주체의 죽음에 관한 이론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체의 구성에 관한 이론을 주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비판을 논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지배와 지배의 보존을 위한 특정한 기능의 담지자들로 주체들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론이 아니었는가? 단적으로, 어디에 사회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가? 이로부터 역시, ISA는 알튀세르가 가진 이론적 '비관주의'의 표현이라는 주장이 따라 나온다(예를 들어, Elliot 1987: 177-85). 나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판에 강하게 답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계급투쟁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을 생산/재생산의 수평적인 셰마 안에 단단히 (재-)각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생산의 수평적인 구성 전체가 계급투쟁의 조건들 및 효과들로서 이해된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재-)각인에 의해,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주체들을 지배적 질서의 기능들의 담지자들이 아닌,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안에서 전개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투쟁의 바로 그 당사자들로 만들어야만 한다(그리고 이것이 주체의 철학이라는 오래된 테마('주체의 능동성')로 돌아가지 않고 '저항'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지배이데올로기가 있는 이유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비대칭성과 불균등성 때문이다. '계급투쟁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 없다면 재생산 이론은 단지 지배, 종속 구조의 영원한 재-생산 이론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이제껏 ISA 전체가 '계급투쟁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의 정교화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고집해왔고 또한 증명했다. 따라서 ISA가 기능주의라는 비난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자신의 미발표 에세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노트」[주18]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위한 투쟁은 항상적인 미완의 투쟁이며 그것은 언제나 계급투쟁에 종속되면서 항상적으로 재개되어야만 한다."(Althusser 1983: 455-56), 그러므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의 지위와 역할은 사회구성체의 이론적인 구성 한 가운데에 계급투쟁의 물질성, 즉 계급투쟁의 실증성을 표시하는 그 개념의 이론적인 강제력 안에서 정확히 발견된다. '최종심급'은 우리가 이론 안에서 사회구성체의 변증법적인 형상화로 하여금 전적으로 유물론에 의존하게끔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이다. 따라서, '최종심급'은 부정적이거나 초월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정 반대로 완전히 긍정적인 방식으로 정의되는 개념인 것이다.[주19]

 

「아미엥에서의 주장」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맑스의 유물론(여기에 변증법의 질문이 의존합니다)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내가 따라 오려고 노력한 상당히 훌륭한 길이 존재합니다. 즉,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길 말입니다. (Althusser 1976: 151)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자. 왜냐하면, 만일 '최종심급'이 그리하여 경제가 아닌 물질성의 표시(즉, 계급 관계의 실증성의 표시)로서 주어진다면, 우리는 또한 여기서 하나의 결정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동될 수 있는 전적으로 새로운 이론화의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즉, 왜 '계급투쟁'만이 사회의 유일하게 가능한 물질성인가? 이 질문은 완전히 정당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데올로기가 경제 및 정치와 단락된다면 단지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뿐만 아니라 계급관계와는 환원 불가능하게 구별되면서도 계급관계만큼이나 스스로 물질적인 다른 복수의 사회적인 갈등과 차이들(예컨데, 인종적 갈등, 성적 차이, 지적 차이 등)이 동시에 이론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 역시 계급적대만큼이나 보편적인 것이 사실 아닌가? 각각의 사회적 관계들이 자기 이외의 다른 사회적 모순과 차이들을 통해 작동해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투쟁 역시 다른 사회적인 모순과 차이들 속으로 으깨어진 것으로서 등장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이론적인 교체(혹은 정정)의 필요성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즉, '계급투쟁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으로부터 ... 그러나 이번엔 무엇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란 말인가? 모든 것에 의한?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마침내 마주친 아포리아이며, 여기서 그는 '최종심급'의 개념을 하나의 "한계 개념"으로서 제안하는 듯 하다.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인터뷰(1984-87년)에서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이 '최종심급에서'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지배할 수 있습니다. 맑스는 지배의 전위에 대한 암시적인 이론에서 아테네의 정치와 로마의 종교에 관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이것이 발리바르와 내가 『자본을 읽자』에서 이론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부구조 그 자체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역시 그것의 물질성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상부구조와 모든 이데올로기의 사실상의 물질성을 강조하는데 그토록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ISA)에 관련하여 그것을 보여주었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각각의 구체적인 정세 안에서의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최종심급에서 항상 결정적인 물질성의 전위를 말입니다. (Althusser 1994: 44, 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최종심급' 개념은 하나의 '한계 개념'인데, 왜냐하면 각각의 구체적인 정세 안에서 '최종심급'에서의 물질성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한계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정치이고 정치적 실천들이고 정치적 조직들이며 그 조직들의 이데올로기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역사와 미래를 향해 완전히 열려있다. 한 유물론자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용감하게 걸어온 이 훌륭한 길, 즉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이 길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긴 미래이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Althusser 1992) ------------------- 주(主) 1) 데리다가 모든 포스트-구조주의의 입장들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포스트-구조주의의 범주 자체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몇몇의 이론가들에 의해 대표되기엔 무리가 있다. 나는 이 에세이에서 포스트-구조주의와 관련하여 데리다를 논의하는데 나 스스로를 한정시키기로 한다. 2) '토픽'의 의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알튀세르의 설명을 참조하라: "이러한 [토대/상부구조의] 형상은 어떤 토픽의 형상, 말하자면, 공간 내의 장소들에 주어진 현실성들을 할당하는 공간적인 배열의 형상이다."(Althusser 1976: 138) 한 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토픽은 위상학이 아니다. 양자 모두가 특정한 공간적 형상화에 관련되어 있을지라도, 위상학은 차라리 그 기원 및 본질에 있어 수학적이라면 반면 알튀세르(와 프로이트)에게 토픽은 종별적으로 수학과는 별 상관 없는 모순과 모순의 변증법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3)

 

여기서 수직적인 구성이란 맑스의 "건축물"의 은유에서 상부구조가 토대로서의 하부구조 위에 위치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차라리 사회구성체의 '공시적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수평적인 구성이란 그것이 시간선 상에서 생산(즉, 생산관계 및 생산력)과 재생산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통시적'이라 볼 수 있다. 알튀세르는 ISA의 도입부 에서 단 한번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을 논한다. 비록 그가 그것을 다시 논의하는 추기를 삽입하지만 이는 - 외관상으로 - ISA의 핵심적인 주장들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논점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4)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새로운 인식 안에서 '본질적 단면'을 만들려고 애쓴다면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불균등한 단면을 상대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즉, 기차들의 늦거나 빠름이 SNCF의 게시판에 공간적인 앞서있음이나 뒤져 있음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시간적인 공간 안에 하나의 시간이 다른 시간에 대해 앞서있거나 뒤져 있는 것이 그 안에서 묘사되는 층져있거나 들쭉날쭉한 단면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이다."(Althusser/Balibar 1979: 105). 또한 이 점에 관해 발리바르의 에세이 "From Bachelard to Althusser: The Concept of 'Epistemological Break'"(Balibar 1978: 207-37)을 참조하라. 5) 글룩스만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단지 알튀세르의 이론에 관한 그의 오해를 폭로할 뿐이다: "이것은 구조주의로부터 그의 맑스주의를 차별지으려고 시도하는 [알튀세르의] 두 번째 방식으로 우리를 다시 이끌어 간다. 그가 말하는 것이라고는 맑스 안에서 발견되는 '결합'이 [레비-스트로스의] 조합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며 그가 사용하는 범주들, 즉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지배, 과잉결정, 그리고 생산 과정 등이 '구조주의에 이질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

 

알튀세르가 조합적인 것으로부터 결합을 구별하기 위해 지적하는 유일한 차이는 역사의 질문이고 유물론/관념론의 질문이다. 그는 명백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가 제기하는 쟁점들은 별로 내용이 없다"(Glucksmann 1974: 172). 6) Darstellung은 상연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상연과 재현(Vorstellung) 사이의 차이는 재현이 연극의 원본(작가, 그리고 그의 의도와 관념)을 연극의 바깥에 위치시킴으로써 연극을 하나의 독자적인 현실로 사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반면, 상연은 연극을 하나의 현실로서, 즉 작가 없는 현실로서 사고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상연은 그렇게 해서 "주체도 목적(들)도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가 표현하는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Cf. Althusser/Balibar 1979: 187-93). 7) 알튀세르는 1962년에 쓰여진 자신의 에세이 「'피콜로 극장': 베르톨라찌와 브레히트」(Althusser 1993: 129-52)에서 "잠재적 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워렌 몬탁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피에르 마슈레의 이의를 받아들여 이 개념을 차후에 기각한다. 마슈레의 『In a Materialist Way』에 대한 몬탁의 소개(Macherey 1998: 1-14)를 참조하라. 8) 데리다가 스프링커와의 대담(1993)에서 계속 강조하는 알튀세르의 오류 가운데 하나는 그가 하이데거에 의해 영향받으면서도(특히 '인간주의'의 문제에 관해서) 하이데거를 철저히 상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알튀세르로서는 하이데거적인 담론을 기각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정확히 하이데거의 초월철학의 입장이 내재성이라는 스피노자주의적인 노선의 정확한 반대였기 때문이다. 아마 '인간주의'(우리는 물론 여기에 "이론적인"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에 반대하는 방식이 단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9)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스피노자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효율적인 인과율이 있다.

 

즉, 효과의 본질과 실존이 원인의 본질과 실존으로부터 구별되는 혹은 효과 그 자체가 자신의 본질과는 다른 실존을 가지면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원인을 다른 어떤 것에 참조하게 되는 인과율 말이다. 그리하여 신은 만물의 원인이다. 그리고 모든 실존하는 유한한 사물은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원인으로서 또 다른 유한한 사물을 참조한다. 본질과 실존에서 구별되면서, 원인과 효과는 어떤 것도 공통으로 갖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 하지만, 어떤 다른 의미에선, 그들이 공통으로 갖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속성[이다] ... 그러나 원인으로서의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은 효과의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 본질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Deleuze 1988: 53, 강조는 인용자) 요컨데 스피노자에게 신에 의한 사물의 결정은 형식들의 결정이다.

 

"속성"에 대한 설명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쓴다: "실체가 각각의 속성에 질적으로 혹은 형식적으로(수적으로가 아니라) 상응한다고 말해야 한다. 순수하게 질적인 형식적인 다면성은 ... 하나의 실체를 각각의 속성과 동일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Deleuze 1988: 52, 강조는 인용자) 10) 본질적 독해는 헤겔주의적이다. 그것은 텍스트의 본질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는다. 11)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러므로 정확히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정치 경제학을 그것의 바깥으로부터(즉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럴 수도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그것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야만 했으며 독특한 방식으로 그것을 읽음으로써 하나의 분할선을 그어야만 했다. 이로부터 그의 고유한 이론적인 대상이 그의 이론적인 지평에 마침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12) 따라서, 데리다의 "과잉결정은 ... "최종심급에서의"라는 ... 것을 희생시킨다는 대가로 나를 만족시킵니다"(Spinker 1993: 204) 라는 언급은 알튀세르에겐 부조리한 것이다. 13)

 

여기서 문제가 되는 텍스트는 엥겔스의 「블로흐에게 보낸 편지 - 1890년 9월 21-22일 」(Marx/Engels 1962: 488-90)이다. 알튀세르는 엥겔스의 '최종심급'을 『맑스를 위하여』의 3장 "모순과 과잉결정"의 "부록"(Althusser 1993: 117-28)에서 논한다. 14) "이제 우리가 말한 것으로부터, 각각의 실체는 신을 제외하고서는 모든 다른 것[단자/실체]들로부터 독립적인, 하나의 동떨어진 세계와 같다는 것이 뒤따른다."(Leibniz 1995: 611) 15) 프로이트는 (전)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단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데 있어 꿈을 비할 나위 없이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의식이 자아 속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갈 때, 그것이 자신의 작업의 양태들을 자신과 함께 가져오게 되는 상황이다. 이는 무의식적인 질료(material)가 그 안에서 자신의 표현을 찾는 전의식적인 사고들이 꿈-작업의 과정에서 마치 이드의 무의식적인 부분인 것처럼 처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프로이트 1961: 40-41, 강조는 인용자) 16)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치와 경제 사이의 이러한 매개들의 거리, 즉 분리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정치의 장소를 발견할 수 없게되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순수한 교환의 영역으로 나타나는 반면 정치는 그 안에서 부르주아 분파 사이의 갈등을 단순히 조정하는 영역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시민 사회와 국가의 대당은 이러한 '노동의 정치'의 완전한 은폐라는 효과를 생산한다(Cf. Balibar 1985). 17) 나는 심지어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까지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것은 그 자체로 공간의 시간화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공간화라고 말이다(이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는 결론인데 왜냐하면 최종심급은 구조 내의 일개 심급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지연(遲延)" - '최종심급이라는 고독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라는 알튀세르 자신의 말과 함께 "최종심급(last instance)"이라는 말이 "마지막 순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확실히 데리다의 '차이(differance)'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나는 단지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의 개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하나의 '차이'로 혹은 그것의 작동태로 고려될 수 없다는 점(왜냐하면 알튀세르의 그 개념은 여전히 계급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 개념을 끌어안기 때문인데 '차이'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 개념을 파괴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양자는 모두 자연과 역사라는 저 오래된 개념적 대당을 "해체"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18)

 

이 텍스트는 원래 1976년에 쓰여졌고 77년에 「Anmerkung ber die ideologischen Staatsapparate (ISA)」라는 제목으로 Ideologie und ideologische Staatsapparate: Aufs tze zure marxistischen Theorie, Hamburg/Westberlin: VAS에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 텍스트의 발췌본이 영어로 1983년에 마이크 게인의 에세이 "ISA 에피소드에 관하여"(Gane 1983: 431-67)의 부록으로 나온 바 있다. 19) 따라서 '최종심급'이 알튀세르에게 '형이상학적인 정박점'이라는 데리다의 비판은 그 어떤 타당성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부정적이거나 초월적인 방식으로 이론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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