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同黎 2013. 5. 26. 00:49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종교학에서 신을 신앙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력신앙이고 또 하나는 타력신앙이다. 자력신앙이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신과 동등한 혹은 신에 근접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앙이다. 반면 타력신앙은 신의 능력과 도움을 통해 어떠한 단계 이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자력과 타력신앙 모두 단순한 소원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종교적 사상적 수준의 달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복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타력신앙이 강조되어온 반면, 아시아적 전통에서는 자력신앙이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인도의 힌두신앙은 수행을 통해 신과 비슷한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중국의 유교 역시 수신을 통해 성현(聖賢)이라는 이상적 인간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초기불교 역시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깨달음인 아라한과를 얻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력신앙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 신앙되는 대승불교는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 혼재되어 있다는 면에서 초기불교와는 조금 다르다. 초기불교와 상좌부불교(소승불교)가 오직 자기 수행을 통한 자력신앙에만 집중했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 수 많은 타력신앙의 대상들이 출현하였다. 특히 일반 신도들을 대상으로 이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신격(神格)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대승불교를 타력신앙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데, 초기 및 상좌부불교가 인간이 부처가 되는 단계를 부정한데 비하여, 대승불교는 보살이라는 단계를 삽입하여 인간의 직접적 성불을 인정하였다. 대승불교의 이러한 특징이 가장 확장된 것이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인정한 밀교이고, 타력신앙적 면모를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선종이다.

 

반면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철저히 타력신앙만이 인정된다. 애초에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에 의하여 구원받는 존재일 뿐이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성을 인지하고 철저히 신에게 의지할 때에만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신의 지혜(비밀)은 접근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다. 이것이 아시아적 전통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력신앙은 위험한 이단이 된다. 대표적인 것이 마니교와 그노시스파(영지주의)이다. 특히 신의 가장 비밀한 지혜에 인간이 직접 접근하여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가 가장 격렬하게 투쟁한 이단이다. 아시아에서는 신의 비밀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종교의 목표로 여겨지는 밀교가 아주 성행한 반면, 유럽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영지주의가 철저히 탄압받았다는 사실은 두 문화권의 종교관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삶은 어떤 면에서 종교와 같다. 우리는 자력과 타력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도 남의 도움도 필요하다. 독불장군으로 묵묵히 살 수도 없고, 남에게만 기대서 살아갈 수도 없다. 사람은 따로 또 혼자 그렇게 살아간다. 일상적인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약 어느 경지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종교와 삶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신이 없다는 것이다. 절대 선() 혹은 절대 지()로서의 신이 없다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물신에 기댄 타력신앙으로 어느 경지에 올라간다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에서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겠지만 신이 없는 인생에서는 결국 자력신앙이 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력신앙의 길은 매우 외롭다. 목표가 무엇으로부터 주어만 진다고 해도 그 길을 따라서 가는 여정이 훨씬 쉬울 것이다. 반면 인생에서의 자력신앙은 그 목표조차 내가 찾아서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물신을 섬기는 타력신앙의 길을 걷고는 한다.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자력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철저한 자력신앙을 추구하는 선방(禪房)의 승려들은 화두를 찾기 위해서 문이 없는 방으로 들어간다. 무문관(無門關) 수행이 그것이다. 결국 인생의 자력신앙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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