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하세데라(長谷寺) 예찬

同黎 2013. 6. 24. 03:58

하세데라(長谷寺) 예찬


내가 하세데라에 도착한 것은 2012년의 초가을이었다. 혼자 그곳을 찾았다. 아직 여름의 더위가 가시지 않고 가을의 정서가 완벽하지 않던 때였다. 일본의 여름이 한반도의 그것보다 다소 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직 여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그 날 일정은 이랬다. 새벽부터 부슬거리는 비를 뚫고서 JR을 타고 호류지(法隆寺)에 갔다가 근처의 호린지(法輪寺)와 호키지(法起寺)로 행했다. 호키지 앞에서 야마토코리야마(大和郡山)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데 무려 한시간 반이나 기다려야했다. 야마토코리야마에서 우네비고료마에역으로 가서 나라현립 가시하라고고학연구소의 부속 박물관을 보고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이 내려온 곳이라는 가시하라신궁에 가기로 하였다. 거기서 나는 나라 남부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나머지는 아스카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버스 시간을 맞추지 못한 탓으로 시간이 모자르게 되어 결국 가시하라신궁에 가지 못하고 나는 혼자 길을 떠났다. 이것저것 생각해 본 결과 정말 먼 곳에 있었던 나머지 답사지를 소화하려면 가시하라신궁을 포기해야 했다. 


일본에 그것도 간사이 지방만 4번이나 갔지만 혼자 움직인 것은 이번에 두번째였다. 처음 혼자 움직인 것은 2010년 일본에 갔을 때 입국 전날 너무 힘들어 혼자 쉬다가 잠깐 교토에 다녀온 것이었으니 본격적으로 혼자 움직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완전 시골인 나라 남부의 사쿠라이 등을 돌아다니는 건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나로써는 조금 모험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는 무로지(室生寺)였다. 12시 경에 출발하여 환승을하고, 잘 가다가 갑자기 멈추는 기차에 당황하였다가 환승해야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급하게 달려나가 마로구치오노(室生口大野)역에 도착했을 때는 2시에 가까워졌다. 한 시간에 한대 밖에 없다는 무로지행 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야 절에 도착한다. 계곡을 끼고 난 길을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빽빽한 삼나무 숲 때문에 금새 어둑해지고, 두려운 생각까지 든다. 계곡과 숲이 주는 특유의 상쾌함을 온몸으로 맞으며 헤이안시대의 국보 목탑 국보 불상들을 만족스럽게 보고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던 중 아직 4시가 체 안된 시간이 아까워서 역에서 아주 가까워 보이는 하세데라를 들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세데라역에 도착할 때는 4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다. 하세데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몇시가 폐관시간인지 알 수 없었고 역에서 2km라는 예상보다 긴 거리에 당황하며 요금을 생각할 시간도 없이 역 앞에서 대기하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렇게 5분 만에 절 앞에 도착한 나는 아직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급히 표를 끊어서 가람 안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는 갑자기 하세데라와 마주하게 되었다.


본존 관음보살이 모셔진 본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500여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인왕문에서 시작된 계단을 두번 크게 휘어지며 본당으로 향한다. 계단 위에는 비와 햇볕을 막을 수 있도록 긴 회랑인 등랑이 세워져 있다. 계단은 많지만 계단 좌우에 볼거리도 꽤나 있고, 계단 자체가 낮아서 크게 힘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땀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 땀을 뻘뻘 흘려가며 산 중턱까지 올라가니 거대한 크기의 건물이 나를 맞이한다.


본당은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이시야마데라(石山寺)의 본당과 함께 대표적인 무대조의 건물이다. 그러면서 지온인(知恩院)의 어영당과 삼문, 곤고푸지(金剛峯寺) 장왕당 등과 함께 모모야마시대에서 에도시대 초기에 권력자들에 의해 지어진 거대 사원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안에는 높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관음보살입상이 모셔져있다. 그러나 하세데라 본당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절벽 앞으로 한껏 내밀어져 산 아래를 볼 수 있도록 만든 본당의 무대이다. 본래 부처에게 춤과 음악을 바치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무대는 절벽 위에 돌출되어 멋진 베란다 역할을 하고 있다. 무대 위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하세데라 전체가 보인다. 그 대단한 광경과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절 전체를 휘감고 있는 묘한 향기 덕분에 계단 오백개를 올라오느라 쌓인, 그리고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생긴 피로가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본래의 참배로는 본당을 통과해 올라왔던 길의 반대로 가서 오층탑을 지나 내려오는 것이지만, 시간이 촉박하고 계단을 다시 내려오고 싶었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했다. 막 문이 닫히는 하세데라를 나왔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택시를 타고 쉽게 오는 바람에 길을 몰랐고, 상당한 거리를 이미 걸었기 때문에 조금 편하게 가고 싶었다. 역에서 오는 길이 내리막이었기 때문에 꽤 거리가 되는 오르막을 다시 갈 자신이 없었다. 매표소는 이미 닫혔고, 두리번거리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관리소가 있어서 무작정 가기로 향했다. 거기에는 아가씨 한 명이 있을뿐이었는데, 나는 일본어를 못하고 아가씨는 영어나 한국어를 못하니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간신히 "콜 다쿠시 구다사이" 라고 반복할뿐이었고, 수차례 대화를 시도하다가 이 자와는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착한 일본인 아가씨는 직접 택시 회사에 전화를 해줬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택시 회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무수한 정말 죄송하다는 "혼또니 모시와께 고자이마센"이라는 말을 들으며 사과인지 격려인지 건내준 사탕 하나를 받아서 터덜터덜 역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이 것은 잘된 일이었다. 만약 내가 그 2km를 걸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하세데라를 이렇게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을 나와 계곡을 따라 난 길을 걷다 보면 하세데라쵸(町)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길 옆에는 폭이 넓은 계곡이 콸콸 소리를 내며 계속 흐르고, 건너편에는 울창한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오던 계곡은 마을을 만나면 어느새 곁으로 사라지고 작은 마을길이 펼쳐진다. 옆에서 절로 가는 길을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은 아마도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하는 듯, 이미 폐문 시간이 지난 해질녘에는 인적도 보기 힘들었다. 해는 점점 가물가물하게 지고 있고, 이 길이 맞는지 물어볼 사람도 만나지 못한 체, 나는 계속 걸었다. 가끔 가다가 보이는 표지판만이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다행히 계곡과 숲이 주는 상쾌한 바람 덕분에 생각보다 힘들이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문제는 향이었다. 무로지에서부터 강한 향이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나무향이라기엔 너무 강하고 꽃향이라기엔 좀 옅은, 아주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흙냄새처럼 투박하지도 않은 은은한 향기를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었다. 무로지에서는 그저 절에서 피우는 향냄새라고 생각했고, 무로지를 나서서는 사찰 입구에 늘어선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점도 문을 닫고 절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그 향을 전혀 옅어지지 않고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길을 걷고 저녁 8시에나 숙소로 돌아와 골어떨어지는 생활을 반복한지 일주일 째인 나에게 2km의-그것도 중간에 급한 오르막이 있는-길은 결코 편하지만은 안은 길이었다. 그러나 하세데라 본당에서 느꼈던, 상쾌하다고 밖에는 더 표현할 길이 없는 그 묘한 향기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덜 힘들게 하세데라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에 도착해서 역무원에게 안되는 일어와 영어 손짓발짓을 섞어서 향기가 참 좋은데 무슨 향이냐라고 물었다. 친철한 역무원은 냄새에 대해 묻는 이 한국인이 신기했던지 역무실에서 나와 설명을 해주려고 하였다. 이 향기는 저 숲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다가 답답했던지 삼나무 삼자(杉)와 측백나무 백자(栢)를 써가며 필담을 나누었다. 그러니까 이 향은 바로 건너 계곡의 숲에서 나오는 삼나무와 측백나무의 향기였다. 숲의 향기였던 셈이다.


궁금증을 해결하고 하세데라역의 플랫폼 벤치에 몸을 뉘었다. 원래 급행열차은 다니지 않는 이 역에 시간 때문인지 준급열차도 끊겼고 내가 타야하는 완행 보통열차는 한참이 있어야 와야했다. 내려보아도 백 가구를 크게 넘지 않아 보이는 이 마을의 역에 사람이 있을리 없었다. 플랫폼에 누워서 노을을 바라보며 하세데라에서 역까지의 길을 되집었다. 울창하다 못하 검을 빛을 띠고 있는 숲,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땀이 식는 시원함, 신발 너머로 느껴지는 땅을 질감, 주차관리소 아가씨에게 얻은 사탕의 맛, 마을의 밥짓는 냄새와 일본 특유의 짠지 냄새, 그리고 숲의 향기까지. 답사라는 명목으로 허겁지겁 다녔던 다른 곳과는 달리 여기만은 정말 다 보았다라는 만족감을 느끼며 오사카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다시 그 냄새가 났다. 알고보니 일본인들은 그 삼나무 향기를 좋아해서 방향제로 자주 쓴다고 했다. 그후로 나에게 삼나무 냄새는 일본의 향기로 남았다. 그리고 하세데라의 기억은 마음 속의 전설이 되었다. 일본을 떠올릴때마다 나는 그때 혼자 만났던 하세데라의 향기를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낯선 곳과 동화되는 여행을 즐거움이 마치 깨달음처럼 다가왔다. 


오늘 한국에서 내가 해야하는 온갖 의무와 내가 해결해야 하는 모든 고민들을 뒤로한 체 바로 오사카행 비행기를 타는 꿈을 꾼다. 잠깐의 일탈이 주는 그 상쾌함과 해방감을 빌려와서 다시 한국에서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싶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고향에도 느끼지 못하는 향수를 하세데라에 두고 왔다. 다시 찾을 날을 기다리며. 



하세데라 본당으로 가는 등랑


본당 무대에서 바라본 정면


하세데라 본존 관음보살입상


본당 무대 전경


무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하세데라쵸 거리 풍경


하세데라역


기차를 기다리며


하세데라 답사기

http://ehddu.tistory.com/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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