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늦봄

同黎 2013. 5. 22. 01:29

늦봄

 

꽃이 졌습니다. 지난 봄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꽃잎은 모두 흩날려서 사라지고 이제 제법 더운 기가 느껴집니다. 그래도 아직 밤에는 선선하여 술을 마시기 적당하고, 가시지 않은 봄 향기가 코끝을 맴돕니다. 늦봄입니다. 책 읽기 좋고, 생각하기 좋고, 술 마시기 좋은 날이니 왜 문익환 목사님이 자신을 늦봄이라고 불러 주길 바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한 때는 봄을 좋아했습니다. 중춘(仲春)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합니다. 겨울동안 숨죽였던 식물과 동물이 저마다 세상으로 나오고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려는 시기가 바로 중춘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색깔과 향기를 총동원합니다. 이 들뜬 축제와 같은 시기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봄은 짧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만약 그 술과 같은 향기로운 봄이 계속된다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입니다. 잠시 취할 때는 행복하지만 그 다음날의 숙취는 오히려 삶을 더 무기력하게 만들테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중춘보다는 저물어 가는 봄, 모춘(暮春)이 더 좋습니다.

 

늦봄은 화려했던 봄을 정리하고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한낮의 햇살은 앞으로 올 시련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여 마음을 긴장시킵니다. 그러나 지난봄의 꽃향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체 은은하게 남아있고 저녁의 선선한 공기는 조금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만듭니다. 여유와 준비의 이중주가 이루어지는 시기가 바로 늦봄입니다.

 

이제는 조금 쓸쓸한 늦봄이 마음에 더 들어옵니다. 들떠있는 쇠는 불에 들어가면 밝게 빛나지만 식으면 곧 부서져버립니다. 이런 쇠로는 절벽에 걸려 있는 건물을 바치는 높은 쇠기둥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들뜨지 않고 단련된 쇠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봄 그 한가운데보다 앞으로 있는 여름을 준비하게 하는 늦봄을 더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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