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2차

일본 간사이 여행기 - 11일 이카루가1 (호류지法隆寺1)

同黎 2012. 12. 31. 04:41


드디어 숙소를 떠난다. 안녕 오테마에, 안녕 타니마치 욘초메.

다음에 또 보자, 너만한 숙소는 없는 것 같아.


비행기 출발 시각은 8시이다. 그러니까 최소 6시에서 6시 반까지는 간사이 공항에 가야한다는 것.

그리고 돈이 떨어져 라피도를 탈 수 없기 때문에 최소 5시 언저리에는 난바역에서 난카이선을 타고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략 4시 정도까지 볼 수 있다는 건데, 그래서 마지막 코스로 호류지

(법륭사)를 가기로 했다. 호류지는 7세기의 목조건물이 남아 있는, 단연 일본 최고의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지하철 풍경. 서울 지하철 2호선 풍경이랑 비슷하다.

 

 

처음으로 JR선을 타기로 했다. 호류지는 명성에 비하여 가는 방법이 매우 적다.

간사이 패스를 생각하면 킨테츠선을 타고 츠츠이나 코리야마로 가서 호류지행 버스를 타는 게

가장 좋으나, 나라에서 호류지행 버스는 1시간에 1대 뿐이라 잘못하면 낭패볼 수 있고,

나라교통은 간사이 패스가 안 되기 때문에 매우 비싼 버스비를 내야 한다.

예컨데 지난 번 12월 아스카데라에서 카시하라진구마에까지 서너 정거장을 가는데 무려 300엔을 냈으며,

츠츠이역에서 버스를 타도 300엔 정도가 나온다. 니시노쿄에서 호류지까지 버스를 타면 무려 780엔을

내야한다. 킨테츠선을 이용하면 버스 시간이 맞더라도 최소 1시간 이상을 예상해야 하는데, JR선을 타면

정확히 호류지 800미터 앞의 호류지역까지 갈 수 있고, 시간도 정확해서 여러가지 조건을 따져

보았을 때 JR선이 낫다. 비용도 380엔으로 거의 차이가 없을뿐만 아니라 40분이면

호류지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JR난바역에서 6시 57분발 열차를 탔다.  

 

JR선 내부. 거의 통근열차로 사용되는 듯 하다.

 

 

 

호류지역

 

 

 역에서 내려 이런 골목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으면 호류지 입구가 나온다.

 

 

 

호류지는 본래 법상종 사찰이었으나 분리하여 성덕종 총본산이 되었다.

호류지는 성덕태자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는데, 아스카데라, 시텐노지가 세워진 이후에 세워졌다고 한다.

크게 서원과 동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원에는 금당과 목탑 등이 동원에는 몽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이

세워져 있다. 20세기 말에 들어 쇼토쿠태자가 과연 실존인물인지 의문에 제기되면서 호류지의 건축 연대도

아스카시대에서 내려보려는 경향이 나타났으나, 동원에서 아스카시대의 유구, 즉 약초가람이 발견되면서

이제 호류지 창건연대는 7세기 아스카시대로 보는데 큰 이견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보물인 금당과 오중탑, 그리고 금당의 약사불과 석가삼존불이 전래되는

것처럼 7세기 초의 것인지, 아니면 7세기 말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점차 후자로 기울어지고 있는 듯 하다. 왜냐하면 소가노 이루카의 반란 때 이카루가가

전소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금당이 이 때 소실되고 다시 중건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쇼토쿠 태자의 생존 시부터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호류지 입구에서 남대문까지는 이렇게 장대한 소나무길이다. 아침 8시에 아무도 없는 소나무 길을 걸었다.

 

 

 

 

남대문

 

무로마치시대의 건물로 국보에 지정되었다.

무로마치시대는 우리로 치면 조선 전기에 해당하지만 호류지의 옛 건축 양식을 잘 살려 어울리게 지었다.

이제부터 담벼락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다.

 

 

 

 

 

 

남대문을 통과하면 좌우로 탑두사원이 늘어서 있고 저 멀리 중문과 오층탑이 보인다.

 

 

 

 

 

중문, 국보이다. 아스카시대, 즉 7세기 말의 건축이다.

공포 부분이 중국 고대 건축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다.


 

중문 안에 오층탑과 강당, 금당이 있다. 이 구역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금강역사상. 인왕상이라고도 한다. 간발의 차이로 8세기 초, 즉 나라시대의 것이 되었다.

중요문화재인데, 개인적으로 좀 이해는 안간다. 왜 국보가 아니지...


 

금강은 나라연금강과 밀적금강인데, 하나는 입을 벌리고 하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완전히 다문 건 아닌데 입을 연 것은 산스크리트어 알파벳의 시작인 아를,

입을 다문 것처럼 보이는 건 산스크리트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훔을 발음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계유산 호류지. 호류지와 그 옆의 호키지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입장시간이 아직 안 되어 잠시 옆의 건물들을 돌아본다.

 

 

 삼경원과 서실. 가마쿠라시대의 건물로 각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하나의 건물인 것 같은데 앞이 삼경원,

뒤가 서실로 각각 독립된 건물로 취급한다. 들어갈 수가 없으니 내부 구조가 어쩐지는 모른다.

본래 승방이었는데 화재 후 재건하면서 삼경원은 불당이 되었다. 삼경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쇼토쿠태자가 직접 유마경, 법화경, 승만경의 3경 의소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장한다.

회랑 역시 아스카시대의 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금당, 중문, 오층탑의 나란한 모습

 

 

오층탑의 모습. 안은 통층이다. 금당과 병렬로 나란히 있는데,

이로 보아 금당과 탑이 동등한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말 아스카시대 건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이다.

 

 

 

 

난간이나 공포 모두 고식을 뽐내고 있다. 1300년도 더 된 탑이 그대로 남아 있다니...

 

 

 

기둥에 용장식이 있는데, 에도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탑 내부에는 사면으로 소조상이 모셔져있다. 독립된 상이라기보다는 마치 작은

석굴사원을 보는 느낌이다. 상의 크기가 매우 작다. 711년, 즉 나라시대 초기의 것이다.

위의 사진은 남면 미륵상인데 해석하자면 미륵하생경변상 정도이려나?


동면의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대화 장면이다. 유마경변상 정도가 되겠다.

 

서면의 사리배분장면이다. 전신사리경변상 정도가 될 것이다.

 

가장 유명한 북면의 열반장면이다. 오열하는 제자들의 모습 때문에

우는 부처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역시 열반경변상 정도가 되겠다.

 

쇼토쿠태자의 자리

 

다음은 금당이다.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당시는 탑과 금당 모두 내부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고, 당과 탑 내부의 접근 또한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사실 매우 비좁다. 시대가 올라가는 사찰일수록 이런 특징을 보여준다.

 

 

측면을 통해 입장한다. 

 

뒷면

 

 

 

 

 

역시 탑과 마찬가지로 에도시대에 덧붙여진 장식들이다. 고대 건축은 저런 화려한 장식은 거의 없고

오로지 선과 면이 만들어내는 미학만을 보여주는데 비하여 중세의 건축은 기교가 많이 들어간다.

 

 

금당 내부의 불상과 벽화 구조


금당 내부. 가운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우측에 약사불, 좌측에 아미타불이 있고,

본존 좌우에는 길상천과 비사문천이, 사방은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본존 금동석가삼존상. 중국의 북조-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형식적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7세기 말 아스카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약사여래불. 석가불과 약사불 모두 국보이다. 이 두 불상에는 모두 명문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두 불상 모두 607년 쇼토쿠태자의 발원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용어의 문제나, 양식의 문제 때문에 둘 다 7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고 있다.

 

아미타불. 가마쿠라시대에 아스카시대의 풍으로 만든 것이다.

좌우 보살상은 관음보살, 세지보살인데, 관음보살은 아미타불과 함께 만들어진 가마쿠라시대의 것이다.

반면 세지보살은 잃어버려 새로 만든 것인데, 개인 미술관에서 찾았다고 한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은 중요문화재이다.

 

사천왕상. 아스카시대의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이다. 이후 사천왕상과

비교해보면 사뭇 다른 데, 사각진 얼굴이라던가 밟고 서 있는 괴수의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아스카에 가면 아스카시대의 독특한 조형물들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그 느낌이 난다. 모두 국보이다.

 

길상천입상, 국보. 나라시대의 것이다.

 

금당의 사면벽화. 1층에는 12개의 대형 벽화가 있는데 담징이 그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양식상의 문제로

요새는 부정되고 있다고 한다. 1950년대 대수리 때 금당에 불이 나면서 벽화와 기둥 일부가 훼손되었다.

 다행히 불이 나기 전 모사본을 그려놔 현재는 불탄 벽화는 수장고에 들어가있고 모사본이 걸려있다.

벽화는 완전 파손된 것이 아니라 현재 마치 흑백사진을 반전시켜 놓은 상태라고 한다.

살아남은 벽화는 이 층의 벽화 한 점으로 대보장전에 전시되어 있다. 위 사진은 6호 아미타정토도

 

2호 일광보살도

 

1호 석가정토도

 

3호 관음보살도

 

4호 세지보살도

 

5호 월광보살도

 

8호 문수보살도

 

7호 성관음보살도

 

10호 약사정토도

 

9호 미륵정토도

 

12호 십일면관음보살도


11호 보현보살도


대강당, 헤이안시대의 건물로 국보이다. 현재는 회랑 안에 있으나 본래는 회랑 밖에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회랑 내부의 불상. 약사여래삼존상, 헤이안시대의 것으로 국보이다.

 

종루, 국보. 헤이안시대 건물이다. 안에 있는 범종은 아스카 후기의 것이다.

 

 

경장. 나라시대 건물로 국보이다.

여기에 백제승려로 일본 두 번째 승정이 된 관륵의 상이 있다고 한다.

비불인데, 호류지의 주지가 바뀔 때 딱 한 번 공개한다고 하니 인연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