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도쿄의 호리코시 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同黎 2013. 7. 28. 22:34

한나 아렌트는 15년의 도피 끝에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은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를 지켜보고 쓴 저서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고 붙였다. 그녀는 자신은 다만 상부의 지시에 따랗을 뿐이라고 주장했던 아이히만을 보면서 그에게 부당한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한 죄목을 물었다. 아이히만은 충실한 군인, 착한 아버지, 독실한 신자였지만 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악인과 선인을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악은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 <바람이 분다>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그 애니매이션은 제로센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일생을 소재로 삼고 있다. 비록 아직 작품을 보지 못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짐작가는 점이 없지 않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주인공 호리코시는 군의 요구를 더 많이 받았지만 나름대로 대항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업고 가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 아버지도 전쟁에 가담했지만, 좋은 아버지였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가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라고 말했다. 비록 전쟁과 현대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한 미야지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지만 역시 식민지 민중의 감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단순히 물리학을 공부한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원자탄 투하를 명령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심지어 전승국의 국민이었던 그들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수 많은 젊은이를 성전이라는 이름의 전쟁에서 자살하게 내몰았던 제로센의 설계자를 단순히 하늘을 날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찬 젊은이로 그리고 있다.  더군다나 제로센은 전쟁 당시 일본의 열악한 경제사정을 반영하듯 항속거리와 무게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를 자랑하지만 조종사의 안전성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최악의 비행기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과연 호리코시는 책임이 없는가? 과학과 공학은 정치와 얼마나 거리를 둘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의 저작이 불편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너무도 쉽게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아프게 밝혀주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한 그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사회 구조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수행하지 않고 그냥 살아갈 때 우리는 다시 아이히만을 만나게 된다. 적어도 잘못 그 자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직접 애니매이션을 봐야 하겠지만 <바람이 분다>는 이러한 비판에서 결국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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