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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단(伐檀) (시경-국풍-위풍)

坎坎伐檀兮(감감벌단혜) : 쩡쩡 박달나무 베어서 寘之河之干兮(치지하지간혜) : 황하의 물가에 둔다 河水淸且漣猗(하수청차연의) : 황하의 물은 맑고 잔물결진다 不稼不穡(불가불색) :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胡取禾三百廛兮(호취화삼백전혜) : 어찌 벼 삼백 전을 가지는가 不狩不獵(불수불렵) : 사냥을 하지도 않으면서 胡瞻爾庭有縣貆兮(호첨이정유현훤혜) : 어찌 뜰에 내걸린 담비가 보이는가 彼君子兮(피군자혜) : 군자는 不素餐兮(불소찬혜) : 일 하지 않고는 먹지 않는데 坎坎伐輻兮(감감벌폭혜) : 쩡쩡 수레바퀴살 용 나무 베어서 寘之河之側兮(치지하지측혜) : 황하 주변에 놓아둔다 河水淸且直猗(하수청차직의) : 황하의 물은 맑고 곧바로 흘러간다 不稼不穡(불가불색) : 농사도 짓지 않고서 胡取禾三百億兮(호취화삼백억혜)..

文/詩 2013.07.28

절교 - 전윤호

절교 전윤호 이제 내가 죽을 만큼 외롭다는 걸 아는 자는 없다 그대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짐을 챙긴다 밖으로 통하는 문은 잠겼다 더 이상 좁은 내 속을 들키지 않을 것이다 한잔해야지 나처럼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들과 정치를 말하고 역사를 말하고 비난하면서 점점 길어지는 밤을 보내야지 한 재산 만들 능력은 없어도 식구들 밥은 굶지 않으니 뒤에서 손가락질 받지 않고 변변치 않은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 남들 앞에서 울지만 않는다면 나이 값하면서 늙어간다 칭찬 받고 단 둘이 만나자는 사람은 없어도 따돌림 당하는 일도 없겠지. 멀 더 바래 그저 가끔 울적해지고 먼 산 보며 혼잣말이나 할 테지 이제 내가 죽을 만큼 아프다는 걸 아는 자는 없다

文/詩 2013.07.14

길 위에서 - 나희덕

길 위에서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바닥으로 문질러 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 거리다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 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文/詩 2013.07.05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기타만 기억하네 - 박정대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기타만 기억하네 박정대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그대는 어느 먼 길을 걸어 왔는지바람이 깍아 놓은 먼지조각 처럼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내 가슴의 푸른 샘물 한 줌으로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주고 싶었지만아,나는 집시처럼 떠돌다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네가슴 속 푸른 샘물도내 눈물의 길을 따라바다로 가버렸다네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쏟아지는 햇살 아래서기타의 목덜미를 어루 만지면가응 가응, 나의 기타는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그대 몸의 먼지들 날려 버릴 수만 있다면이 먼지나는 길 위에서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나 집시처럼 떠돌다 이제야 그대를 만났네그대는 어..

文/詩 2013.06.28

포도밭 묘지 2 - 기형도

포도밭 묘지 2 기형도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이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들. 기억하느냐, 그 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

文/詩 2013.06.28

포도밭 묘지 1 - 기형도

포도밭 묘지 1 기형도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 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속에서 내 약시(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였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

文/詩 2013.06.28

기형도 / 죽음을 예감했던 마지막 시 「빈집」- 하재봉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1월,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평에서였다. 기형도는 당선되지 못했고, 최종 심사평에 그의 시 일부가 언급되어 있었다. 당선시가 아니라 최종 심사 대상에서 거론되다가 낙선한 시의 일부가, 심사평에 자세하게 소개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최후까지 고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시 동인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감수성과 어법으로 무장된 새로운 시인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80년 12월, 하재봉·안재찬·박덕규 세 사람이 함께 시집을 낼 때부터 우리는 3인 시집이 아니라 라고 못을 박았고, 이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한기찬, 경희대에서 함께 시를 썼던 이문재, 《동아일보》로 등단한 남진우 등등이 동인활동에 합류했었다. 또 박..

文/詩 2013.06.27

시가 내게로 왔다. - 파블로 네루다 (김현균 역)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文/詩 2013.06.22

시가 내게로 왔다. -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역)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詩)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어. 내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

文/詩 2013.06.22

긍지의 날 - 김수영

긍지의 날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젓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

文/詩 2013.06.21

나쁘게 말하다 - 기형도

나쁘게 말하다 기형도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어떤 그림자는 캄캄한 벽에 붙어 있었다눈치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멈칫했다, 석유 냄새가 터졌다가늘고 길쭉한 금속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검은 잎들이 흘끔거리며 굴러갔다손과 발이 빠르게 이동했다담뱃불이 반짝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이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文/詩 2013.06.18

묏비나리 - 백기완

묏 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백기완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로 언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띠기로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 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 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 한 몸만 맴돌라함이 아닐세 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시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엄의 살이 맺혀오면 또 한 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힐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타보고 썩은..

文/詩 201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