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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박노해

사랑 박노해 사랑은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사랑은 갈라섬,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사랑은 회오리,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일어서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며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고요의 빛나는 바다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文/詩 2013.06.17

겨울 사랑 - 박노해

겨울 사랑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내 언 몸을 녹이는 몇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 하고자기를 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아 아 겨울이 온다추운 겨울이 온다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文/詩 2013.06.17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文/詩 2013.06.17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文/詩 2013.06.17

싸움 - 김상혁

싸움 김상혁 강함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비좁은 보행로를 걸어가는 권투선수의펼쳐진 왼손처럼, 건널목에 서게 되면 건널목만 생각하는 머리속처럼무심하고 고양되지 않는다.눈빛이 마주칠 때 무서운 건 무엇인가.실제로 아무런 싸움도 나지 않는데 이렇게 등을 돌리고 누우면 강함은 너의 침묵 속에 있다.고요함은 나에게 네가 울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눈빛이 마주치지 않는데 깜깜한데내일의 너는 멀고 무더운 나라낯선 이웃들이 자꾸 인사하는 어떤 문밖에 서서우리의 침대를 태우고 있거나 그런 비슷한 종류의 모든 문밖에 계속 서 있을 것만 같은.실제로 아무런 눈물도 흘들리지 않는데 어둠 속에서 너에게 나는 웃는 사람인가.네가 나에게 등을 돌릴 때 나는 너에게 강한가.내가 주먹을 내지른 공간이 건너편 방의 침묵 속..

文/詩 2013.06.17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을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文/詩 2013.06.17

대장의 접시 - 체 게바라

대장의 접시 체 게바라 식량이 부족해 배가 고플수록 공평한 분배에 더욱 세심해야 한다. 오늘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취사병이 모든 대원들의 접시에 삶은 고깃덩어리 두 점과 감자 세 개씩 담아 주었다. 그런데 내 접시에는 고맙게도 하나씩을 더 얹어주었다. 나는 즉시 취사병의 무기를 빼앗은 다음 캠프 밖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는 단 한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평등을 모독했다.

文/詩 2013.06.17

죄와 벌 - 김수영

죄와 벌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우리들의 옆에서는어린놈이 울었고비오는 거리에는사십 명 가량의 취객들이모여들었고집에 돌아와서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아는 사람이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아니 그보다도 먼저아까운 것이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文/詩 2013.06.17

폭포 - 김수영

폭포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을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文/詩 2013.06.17

너를 잃고 - 김수영

너를 잃고 김수영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圓周)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유성(遊星)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億..

文/詩 2013.06.17

이별 후에 - 문정희

이별 후에 문정희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이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 넣는 일이다 옛날옛날적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文/詩 2013.06.09

거대한 뿌리 - 김수영

거대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팔이오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천팔백구십삼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남자로서 거기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다 그리고심..

文/詩 2013.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