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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과대표 - 홍치산

바보 과대표 - 홍치산 우리학교 1학년에 바보 과 대표가 한명 있다 술만 먹으면 개가 되고 밍맹몽, 007빵 무얼 하더라도 진짠지 가짠지 야튼 맨날 걸려 얻어 맞으며 히히 웃고 벌주 발칵발칵 마시며 배꼽 뚜딜겨 뽕짝 걸판지게 뽑아대는 천하에 바보가 있다 항상 그 바보 곁에는 사람들이 드글거리고 그의 수첩에는 120명 동기 이름 모두 적혀 있다 누구누구와 언제 만났고 누구의 고민은 무엇이고 누구와는 아직 얘기 못해보았느니 멋있는 싯구 하나 없지만 그런 것들이 잔뜩 쓰여 있다 수업에 안 들어오는 애들 리포트 알려주고 시험 때는 쏘스 제비 벌레 물듯 물어와 노놔주고 역사 연구반이니, 사회 과학 연구반이니 소수의 의식화를 위한 것보다 바둑반이니 농구반이니 그런 모임을 만들어 120명 모두를 함께 하는 고민으로 ..

文/詩 2013.03.08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文/詩 2013.03.04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브레히트 (낭독 이자람)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리마에서 건축 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

文/詩 2012.12.16

젊은 날 - 백기완(낭독)

젊은 날/ 백기완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하나를 알면 열을 행하고 개인을 이야기하면 역사를 들이대고 사랑이 튕기면 꽃본 듯이 미쳐 달려가던 곳 추렴거리도 없이 낚지볶음 안주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 돈벌이에 미친 자는 속이 비었다 하고 출세에 연연하면 호로자식이라 하고 다만 통일 논의가 나래를 펴면 환장해서 날뛰다 밤이내려 춥고 떨리면 찾아가던 곳 식은 밥에 김치말이 끓는 화로에 내 속옷의 하얀 서캐를 잡아주던 말없는 그 친구가 좋았다 그것은 내 이십대 초반 민족상잔 직후의 강원도 어느 화전민 지대였지 열 여섯쯤 된 계집애의 등허리에 핀 부스럼에서 구데기를 파내주고 우리는 ..

文/詩 2012.12.16

레베카 솔니트,「희망을 점령하는 것에 대한 편지」중에서

나는 당신에게 이 놀라운 1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절망의 힘에 대해, 희망의 크기에 대해, 그리고 시민사회의 연대에 대해. 당신의 삶은 짧았지만 죽음의 의미는 거대했고 '아랍의 봄'을 통해 많은 독재자들이 몰락하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았으면 합니다. (……) 힘없고 희망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몸에 불을 붙인 당신이지만, 하나의 작은 희망을 놓고 떠났습니다. 넉넉한 수입을 올리거나 경찰에게 공정한 대우를 받을 힘은 없었지만 당신은 저항할 힘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희망은 많은 이들의 꿈이었으며 99%의 꿈이었기 때문에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튀니지인들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전복시켰고 이집트, 바레인, 시리아, 예멘, 리비아로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튀니지의 벤 ..

文/산문 2012.12.16

김규항의 문장론

나의 문장론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

文/산문 2012.12.02

석서(碩鼠) - 큰 쥐

석서(碩鼠) - 큰 쥐 碩鼠碩鼠 無食我黍 (석서석서 무식아서) 三歲貫女 莫我肯顧 (삼세관여 막아긍고) 逝將去女 適彼樂土 (서장거여 적피락토) 樂土樂土 爰得我所 (락토락토 원득아소) 碩鼠碩鼠 無食我麥 (석서석서 무식아맥) 三歲貫女 莫我肯德 (삼세관여 막아긍덕) 逝將去女 適彼樂國 (서장거여 적피락국) 樂國樂國 爰得我直 (락국락국 원득아직) 碩鼠碩鼠 無食我苗 (석서석서 무식아묘) 三歲貫女 莫我肯勞 (삼세관여 막아능로) 逝將去女 適彼樂郊 (서장거여 적피낙교) 樂郊樂郊 誰之永號 (락교락교 수지영호)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을 먹지 말지어다 3년 동안 너와 알고 지냈거늘 나를 즐겨 돌아보지 않을진댄 떠나서 장차 너를 버리고 저 즐거운 땅(樂土)으로 가리라 악토(樂土)여, 악토(樂土)여 이에 내 살 곳을 얻으리로..

文/詩 2012.08.16

대중적 글쓰기에 대하여

" ... 물론 내가 쓰는 책은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서다. 학술 이론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생산된 이론을 쉽게 가공해 많은 독자들에게 확산시키는 게 목적이다. 사실 이런 글쓰기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질 수 있다. 첫째는 전문 학자의 몫이다. 학자와 대중서라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 싶지만 그렇게 여겨지는 건 우리 사회에 팽배한 학문적 엄숙주의의 탓이다. 스티븐 호킹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가 라는 현재 물리학의 '대중서'를 쓰고 움베르토 에코 같은 세계적인 기호학자가 같은 '소설'을 쓴 의도를 생각하면 왜 학자들이 이 분야에 참여해야 하는 지 알기 쉽다. 둘째는 지식 보급자의 몫이다. 지식 보급자는 학자만큼 해당 주제에 해박하지 못하지만 학자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크로스 오버가..

文/산문 2012.07.25

보임소경서(報任小卿書)

소경족하(少卿足下) 지난번에 보내주신 편지에서 저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인재를 천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시는 뜻이 너무도 간절하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속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고 생각하시고 책망하시는 듯합니다만 저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군자들의 가르침만은 거듭 귀에 담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자신은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행동을 하기만 하면 남의 비난을 받으며, 더 나아지고자 하나 도리어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우울하고 절망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습니다. 속담에 말하길 '누구를 위해 하는가,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가‘ 했습니다. 종자기(種子期)가 죽고 난 후 백아(伯牙)는..

文/산문 201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