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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부리 사내 - 안현미

혹부리 사내 안현미 사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건 157번 버스가 청량리 굴다리를 막 지나갈 때였다 밤새 홍등이 내걸렸던 골목에선 비릿한 사향 냄새 안개처럼 풀려 나오고 그 골목의 꽃들은 흡반처럼 그 안개를 빨아먹고 흐드러지고 있었다 수상하다면 수상한 날이었지만 수상하지 않은 날이 더 수상한 그 골목에서 그러니까 일상이 수상한 일들로 반복되는 그 골목에서 부리부리한 사내의 출현은 그닥 수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 골목의 포주들은 함부로 씨를 뿌리고 가는 사람들에게만 상냥했고 아침의 행인들은 무관심함을 가장했다 그 상냥함과 무관심 사이에서 사내는 어떤 환영처럼 유리벽 속에서 걸어 나왔던 것인데 사내는 왼쪽 볼에 씨방 같은 혹을 달고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나를 일갈한 뒤 수상하다면 수상한 벽처럼 걸어갔다 사내..

文/詩 2013.10.06

고장난 심장 - 안현미

고장난 심장 안현미 빨간 장미 서른 세 송이를 들고 여자가 나를 찾아왔어요 여자의 눈물이 너무 딱딱해 나는 캐낸 눈물로 당신의 심장을 끓이면 좋겠다 생각해요 모래시계를 들고 찾아온 죽음은 백년 동안의 고독이 매장되어있는 화장터에서 활활 타오르고 모래시계에선 시간이 자꾸 흘러내려요 흘러내리는 시간을 가시로 꽂아 놓으며 여자는 중얼거려요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내 아버지의 분노는 어디로 갔나요? 그 여름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서 끝내 시간을 놓아버린 내 엄마는요? 어디까지가 바닥인가요? 왜 生은 고장 투성이인가요? 당신, 생은 다 그런 거라고 눙치지 말아요 시시해요 詩까지 시시해요 시체처럼 평온했음 좋겠어요 내 영정사진 앞에서 향나무 향이나 실컷 마시다 배불렀음 좋겠어요 불도 들어오지 않는 다다미 방에서 돌아..

文/詩 2013.10.06

신 재망매가 - 최광임

신 재망매가 최광임 내 앞에 앉은 그대가 죽은 누이 이야기를 할 때 당신에게서 나 태어나기 전 죽었다는 오라비를 보네 당신 부모 당신 낳고 내 부모 나를 낳았는데 나는 왜 당신이 아플까 아파서 가슴 먹먹해지나 당신의 눈빛은 왜 그리 붉어지나 당신과 나 사랑보다 먼저, 저 깜깜한 외로움으로 만났던 것인데 어쩌면 우리 알록달록 어느 화엄에 들었을 때, 이미 오늘에 당도하도록 예견된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하는 것이네

文/詩 2013.10.06

다른 대륙에서 온 새 - 잘랄루딘 루미

다른 대륙에서 온 새 잘랄루딘 루미 하루종일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밤이 되어 말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안다 내 영혼이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돌아가리라는 것 나는 취했으나 이 취기는 다른 술집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완전히 술이 깨리라 그때까지 나는 이 새장 안에 앉아 있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다시 날아갈 그날이 오고 있다 지금 내 귓속에서 내 목소리를 듣는 이는 누구인가 내 입을 통해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내 눈을 통해 보는 이는, 영혼은 무엇인가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만일 그 해답을 한 모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술에 취해 이 감옥을 부술 수도 있으리 그러나 나는 이곳에 스스로 오지 않았으며 ..

文/詩 2013.10.06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도 안다. 행복한 사람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 생겼다. 마당의 나무가 구부러진 것은 토양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할 뿐이다. 내 눈에는 바다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은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이 보일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땅없는 농부의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지금이나 따스한데..... 시를 쓰면서 운을 맞추는 것은 내게는 사치스러운 일이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멸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의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文/詩 2013.10.06

월평 - 전윤호

월평 전윤호 월평 가는 버스는 언제 오나요 넘을 수 없는 절벽 아래 굽이쳐 돌아가는 시퍼런 강물을 바라보며 오래 기다리고 있어요 정류장의 낡은 표지판으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여름 햇살이 조약돌을 달구는 동안 수달이 길을 낸 동굴 어디쯤 푸른 지붕에 짐 보따리를 올린 버스가 오고 있나요 별들이 쏟아지는 한밤중 달맞이꽃들 사이로 반딧불이 날면 뱀장어처럼 매끄러운 옛 애인이 춤을 추는 곳 월평 가는 버스는 언제 오나요 이윤이 남지 않는 탄 더미처럼 마지막 기차역에 부려진 내 인생 세상은 공정하지 않아요 가진 자들끼리 붙어먹지요 월평 가는 버스는 언제 오나요 한 번쯤 멀리 서 온 귀빈처럼 온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날아오르고 싶어요 *월평- 정선 가리왕산 인근의 마을 이름

文/詩 2013.10.06

헤어진 다음 날 - 김도언

헤어진 다음 날 김도언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길가에서 죽어 있는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 목욕하는 여인을 상상하지 않았다, 골목마다 가득 버려진 헌책들의 나른한 저자가 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지 않았고, 기침이 심한 시내버스 기사에게 첫사랑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거스름돈을 자꾸 틀리는 편의점 여자에게 머리칼을 짧게 자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순식간에 버렸다, 배고픈 고라니가 순수한 눈동자를 버리듯, 너와 헤어진 다음 날, 나는 겨우 존재하는 나를 닮은 것들에게 시비걸지 않았다, 눈이 구두코 위에 쌓이는 밤 나는 산타클로스의 평균수명에 대해 상상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출근길에 마주치는 지나치게 빠르게 걷는 어떤 사내의 다음 생애를 떠올려보았을 뿐, 평생 빨리 걷는 사람들의 비애와 그 비..

文/詩 2013.10.06

자화상 - 오세영

자화상 오세영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낟알 한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人家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은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文/詩 2013.10.06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김명리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명리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신이 마악 떠나려던 그 순간 당신이 마악 돌아서던 그 순간 희미하게 힘차게 당신의 속눈썹 마악 내리깔리던 그 순간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예정된 이별의 예기치 않았던 그 순간 예기치 않았던 이별의 예정된 바로 그 순간 (니 맘 내 다 안다...) (니 맘 내 다 안다...) 당신이 마악 떠나버린 그 순간 당신이 힐끗 돌아보던 그 순간!

文/詩 2013.10.06

작아지는 것들을 위하여 - 도종환

작아지는 것들을 위하여 - 도종환 작아지는 우리의 정신을 위하여 깊은 밤 가장 큰 소리로 너는 내게 온다. 이기지 못한 것들 거대하게 남겨둔 채 바람벽 안 안온함 속에 숨어들어 어깨에 휴식과 온기를 묻히려 할 때 안개 속에서 벌판 끝에서 맥박 속에서 보도블럭 위에서 등불 밑에서 거침없는 소리로 너는 달려온다. 잔혹한 문자들을 빼고 더하다 가느다란 손끝에 꽈리처럼 잡힌 물집을 터뜨리며 골목 골목 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외롭다고 말하며 답답하다고 말하며 너는 우리의 이름을 찾는다. 작아지는 것들을 위하여 작아지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를 가볍게 무찌르던 적들이 모두 차광막을 내리고 평온하게 돌아간 밤 야광시계의 분침 사이를 전전하며 시간이 갈라 세우는 이분법을 무시하며 너는 노래로 살아서 비겁하지만 그러나 비겁하..

文/詩 2013.10.06

이젠 안녕 -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이젠 안녕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세상의 수많은 시에 나도 몇 줄 보탰지만 그것들이 귀뚜라미 소리보다 더 현명할 것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 용서해 달라 이제 그만 작별을 고하리라 그것들은 달에 내디딘 첫 발자국도 아니었으며 어쩌다 잠깐 반짝거렸다 해도 그 자체의 빛이 아니라 반사한 것이었다 나는 다만 언어를 사랑했다 시는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있어 왔다 사랑처럼 굶주림처럼, 전염병처럼, 전쟁처럼 때로는 나의 시가 당혹스러울 만큼 어리석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변명할 생각은 없다 아름다운 단어들을 찾는 것이 사람을 죽이고 살생하는 일보다 한결 나은 일이라고 믿으니까

文/詩 2013.10.06

너라는 문장 - 공광규

너라는 문장 공광규 백양나무 가지에 바람도 까치도 오지 않고 이웃 절집 부연 끝 풍경도 울지 않는 겨울 오후 경지정리가 잘 된 수백만평 평야를 흰 눈이 표백하여 한 장 깨끗한 원고지를 만들었다 저렇게 크고 깨끗한 원고지를 창 밖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오래갈 문장을 생각했다 대밭에 나가 푸른 대나무 수천그루를 붓으로 만들어 까만 밤을 강물에 가두어 먹물로 쓰려고 했으나 너라는 크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만한 사람이 나 말고는 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아서 그만 두었다 저 벌판에 깨끗한 눈도 한 계절을 못 넘길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결심하였다 발목이 푹푹 빠지던 백양리에서 강촌을 가던 저녁 눈길에 백양목 가지를 꺽어 쓰던 너라는 문장을

文/詩 2013.10.01

앞날 - 이성복

앞날 이성복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어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文/詩 2013.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