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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요릿집엘 들어가고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원고도 스고 치부도 하고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영화관에도 가고애교도 있다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우리들의 전선은 당게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

文/詩 2013.06.09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으로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 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 오라.

文/詩 2013.05.28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 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울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압제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

文/詩 2013.05.18

사랑 - 박노해

사랑 박노해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며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文/詩 2013.05.17

짧은 여행의 기록 中 - 기형도

무등(無等)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 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 다방 2층에 앉아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저녁 6시. 광주에 도착한 지 2시간이 흘렀다. 터미널에서 부산이나 해남 혹은 이리 방면의 차표를 끊으려 예매처를 기웃거렸으나 너무 혼잡하고 더러워서 터미널을 버리고 길을 건너 신문들을 한 뭉치 샀다. 내가 써두고 온 기사가 나와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필름 한 통을 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보도 블록 위에 주저앉았다. 황지우..

文/산문 2013.05.05

봄편지 - 정한용

봄편지 정한용 두 점 사이에 우린 있습니다 내가 엎드린 섬 하나와 당신이 지은 섬 하나 구불구불 먼 길 돌아 아득히 이어집니다 세상 밖 저쪽에서 당신은 안개 내음 봄 빛깔로 써보냅니다 잘 지냈어... 보고픈... 나만의... 그건 시작이 아니라 끝, 끝이며 또한 처음 맑은 흔적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혹시 압니까 온 세상 왕창 뒤집혀 마른 잎 다시 솟고 사람들 이마에 꽃잎 날릴 때 그 너울 사이사이 흰 빛 내릴 때 그쪽 섬에 내 편지 한 구절 깊숙이 스미고 이쪽 섬에 당신 편지 한 구절 높이 새겨져 혹시 압니까 눈물겨운 가락이 될지 섭리가 될지 아프게 그리운 한 흙이 될지

文/詩 2013.05.05

그리움 - 이용악

그리움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文/詩 2013.05.05

죄와 벌 - 김수영

죄와 벌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文/詩 2013.03.21

너를 잃고 - 김수영

너를 잃고 김수영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侮辱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 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圓周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遊星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의 모욕..

文/詩 2013.03.21

임시 야간 숙소 - 브레히트

임시 야간 숙소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의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야간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 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

文/詩 2013.03.12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

文/詩 2013.03.12

사상의 거처 - 김남주

사상의 거처 김남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입만 살아서 중구난방인 참새떼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리만 살아서 갈팡질팡인 책상다리에게 물어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갈 길 몰라 네거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웬 사내가 인사를 한다 그의 옷차림과 말투와 손등에는 계급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노동자일 터이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요 선생님은 그의 물음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집회에 가는 길이라며 함께 가자 한다 나는 그 집회가 어떤 집회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따라갔다 집회장은 밤의 노천극장이었다 삼월의 끝인데도 눈보라가 쳤고 하얗게 야산을 뒤덮었다 그러나..

文/詩 201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