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黎 2433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1 - 총설1

대정명기감 해설(大正名器鑑解說) 타카하시 소안(高橋箒庵) 총설(總說) 본편을 이름지어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이라 부른다. 대체 명기(名器)란 무엇일까. 지금 우리나라(일본)의 현재 상황에 임하여 말해보면, 정창원(正倉院) 어물(御物), 기타 제실(帝室) 소장의 기물도 명기가 되며, 전국의 오래된 사사(寺社)에 전해지는 집기도 명기가 되며, 고관·부호·명문가에서 소장하는 보물도 역시 모두 명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소위 명기에는 무기도 있고 악기도 있으며 혹은 실내 장식품도 있으며 기타 잡다한 종류도 있다 하더라도, 본편에서 명기라 칭하는 것은 단지 다기(茶器)만을 가리킨다. 고래 다인들 간에서는 유명한 기물을 명물(名物) 혹은 명기(名器)라 불렀다. 그 시대를 나누어서 혹은 대명물(大名物), 중흥명..

雜/대정명기감 2021.06.12

홋카이도의 국보·중요문화재 (수정)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시(札幌市)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北海道庁旧本庁舎)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北海道庁旧本庁舎 ●홋카이도 도립문서관(北海道立文書館) *하코다테 봉행소 문서箱館奉行所文書 167점 *개척사 문서開拓使文書 7832점 ●삿포로시자료관(札幌市資料館) *구 삿포로 공소원 청사旧札幌控訴院庁舎 ●홋카이도 대학(北海道大学) *홋카이도 대학 농학부 식물원·박물관北海道大学農学部植物園·博物館 4동 박물관 본관博物館本館 附 박물관 조사博物館鳥舎 박물관 사무소博物館事務所 附 박물관 변소博物館便所 박물관 창고博物館倉庫 식물원 문위소植物園門衛所 附 삿포로농학교 박물관 및 식물온실 수선공사서류철札幌農学校博物館及植物温室修繕工事書類綴 附 삿포로농학교 박물관 부속사무소 일동 신축서류철札幌農學校博物館付属事務所一棟新築書..

사천석굴탕방기 - 2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비로동毗卢洞2

비로동 관음당 절벽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감실에 수월관음을 새겼다 대단하다 높이 3미터 정도의 수월관음상 바위를 조각하여 꺽어지는 부분에 부드럽게 불상을 새겼다 마애불이라지만 엄청나게 입체적이다 북송시대의 불상으로 뒤편의 죽림 때문에 자죽관음이라고도 불린다 측면으로 가본다 과거의 채색이 그대로 남아 있어 더욱 신기하다 관음보살 뒤편의 작은 조각들대단히 정교하다 상호 대단히 회화적인 조각이다 높이는 대략 3미터 대좌부분 측면거의 투조에 가깝다 대좌 모습 대나무 대나무 한그루가 dlTek 뒤편의 조각들마치 불화의 배경처럼 대단히 회화적이다 정병과 화불 대좌 대좌 아래편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 이 작은 두 상은 뭔지 존명을 모르겠다 지옥 심판의 모습인 것 같다 시왕과 판관 연화화생하는 모습 관음보살 반대..

中/사천 답사 2020.10.18

사천석굴탕방기 - 2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비로동毗卢洞1

이제 다음 장소인 비로동으로 왔다 이곳은 사천성 안악현이다안악에는 100곳이 넘는 많은 석굴, 석각들이 있는데 그 중 와불원, 원각동, 천불채, 화엄동, 현묘관, 명산사, 공작동의 석굴은 안악석굴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로동은 별도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동 석굴은 비로동을 비롯해 유거동, 관음당, 천불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465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처음 조성은 오대십국시대의 후촉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북송때에 최 전성기를 이루었다. 특히 사천지역에서 융성한 밀교 조각이 풍성하며 송나라 때 새겨진 자죽관음은 채색까지 그대로 남아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불상이다 이제 안으로 들어간다 비로동 안내판 유거동 앞의 바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표석이 붙어 ..

中/사천 답사 2020.10.18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7일 귀국

이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간다생각보다 싼데? 지나치는 고관상대저기도 가보고 싶었는데 가이드북에 오전중에만 연다고 되어 있어서 못갔다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더라. 다음제 반드시 가야 할 곳 각종 천문기가가 보인다 공항 도착 국제선으로 공항 크다 교통카드를 반환하고 보증금을 환불받는다역까지 가야 한다 시간이 남아 식사를 하러 간느 중 마지막 식사는 버거킹 맛있다 3겹 패티가 보여 주문 이제 출국하러 간다 비행기 시간이 다 되고 안으로 들어간다 대기 중 마지막 기념사진 이제 한국으로 간다 일차답사지1일인천국제공항-북경수도공항-북경루쉬박물관-백탑사-광제사-유리창-지단공원-금정헌2일천안문광장-모주석기념당-정양문-천안문-사직단-자금성-경산공원3일중국국가박물관4일북해공원-곽말약 고거-공왕부-역대제왕묘-북경 고루5일원..

滿步記 - 프롤로그

첫 만주 여행기연변의 명동촌을 지나 윤동주의 고향을 거쳐 촬영이 금지된 발해 서고성 유적 그리고 마침내 백두산 천지는 간신히 장백폭포를 거쳐 마침내 집안으로 오회분에서 고구려벽화도 보고 장군총도 봤다 집안의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 오녀산성을 힘겹게 오르고 옛 고구려의 수도를 만난다 마침내 심양 만주족의 심장으로 요녕성박물관과 중산광장의 거대한 모택동 동상과 만주국시기의 건물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도 만나고 그들이 말하는 항민원조전쟁도 보았다 봉천군벌의 저택과 만주사변의 아픔까지 보고 고량주와 함께 귀국한 만주유람기가 곧 시작됩니다.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7일 우가예배사牛街礼拜寺

마지막으로 온 북경의 모스크 뉴제가에 있는 우가예배사입구에 새로 지은 모스크가 서 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오래된 오스크이다 회족 거리에 각종 소수민족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가예배당의 정문은 망월루위에 올라가 달의 움직임을 살펴 라마단 기간을 정하는 건물이라고 달천준로라는 현판우가예배사(牛街礼拜寺, 뉴제예배당)은 북경의 회족들이 다시는 모스크로 중국에서 가장 큰 모스크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요나라 때 처음 설립되었다고 한다. 예배당이 자리잡은 우가는 과거 오나라 남경의 중심지로 회족들이 할랄 소고기와 양고기를 취급하던 것에서 이름붙여졌다고 전해진다.이후 우가예바사는 계속 이어지는데 보통 모스크를 중국에서는 청진사라고 하지만 명나라 성화제가 예배명사라는 이름을 하사해주면서 이곳은 예배사라고 했다. ..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7일 법원사法源寺

이 번에 온 곳은 법원사라는 사찰 나무아미타불이 새겨진 거대한 영벽이 보인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석판 법원사(法源寺)는 북경의 사찰로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 오면서 죽은 병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하면 측천무후가 민충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안사의 난 당시 순천사로 잠시 바뀌었다가 당말 소실 후 다시 민충사로 바뀌어 재건하였다. 이후 오나라 때 유주 대지진으로 완전 소실된 것을 복구했고 금나라 때 송흠종이 이곳에 갖혀 있었다고 한다. 원말 명초 때 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정통제가 복구해 숭복사로 개칭했고 옹정제 때 대수리를 하면서 황실의 율종사원으로 황제에게 계를 전수하는 곳이 되어 법원사라고 개명하였다. 중화민국 시절에 법원사는 북경에서 가장 큰 사찰로 자리잡았고 신중국 이후 중..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7일 천단天坛3

천단에서 마지막으로 신악서에 간다신악서(神乐署)로 읽어야 할지 신락서로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곳이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던 곳이니 악이 맞을 것 같다. 신악서는 명 영락제 때 설치되었는데 이때는 도관이었다. 즉 진무대제 제사를 지낼 때 가무를 동원하는 곳으로 내부에 약방 등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는 이름이 신악관이었는데 건륭제는 이를 신악서로 바꾸고 제례악을 훈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장악원과는 다르게 도교적 성격이 일부 유지되었던 것 같다. 도교 중 선진파라는 종파가 많이 개입했다고이후 8개국 연합군의 병참기지로 만들어지며 신악서를 해체되었고 원세개는 이곳은 임예시험장으로 사용하였다. 일본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군대를 주제시키며 여러 화학, 의학 실험을 했다고 한다. 이후 신악서는 민가로..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7일 천단天坛2

이제 다음 장소로 갈 차례 기년전 정면 매점에서 문혁 판화를 이용한 포커를 판다세상에 기년전 옆문 기년문 정면세칸짜리 장대한 문이다 여기서 황궁우까지의 길은 도로 같지만 사실 지면에서 떨어져있는 다리로 단폐교라고 한다360미터나 되는 다리로 신로와 어로, 왕공대신이 다시던 왕로가 있다 단폐교 중간에 있는 이상한 건물 단폐교 안내문만 있고 다른 건 없는데 가 보니 매점이다아마 대기하는 장소 같은데 이런 걸 지어버리다니안내문 설치하고 좀 정비하지 황궁우 권역이 보인다 황궁우 북문인 성정문 크다 성정문 간촐하다본래 묘단사우의 건물은 간소해야 하는 법이다 황궁우 뒷면 둥그런 담에 둘러쌓인 1층짜리 원형 건물이다 거대한 측백나무 구룡백이라고 하는 나무수령 500년 안내문 황궁우에는 담이 있기 때문에 한바퀴 돌아 ..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7일 천단天坛1

오늘은 마지막 날 짐을 호텔에 맡기고 천단으로 간다 천단역에서 하차 월요일인데도 사람이 바글바글 하다 서문으로 입장 천단 경내도면적에 비해 건물이 많은건 아니다. 천단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구단(혹은 환구단)과 기곡단이 있는 곳으로 가장 중요한 제사 중 하나인 원구를 올리는 곳이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남경에 천지단을 세운다. 이후 명의 가정제는 남경의 천지단을 옮겨 황천에 제사지내는 천단과 후토에 제사지내는 방택을 세우고, 이후 천단에 있던 기곡전을 대향전으로 바뀌었다. 청나라 때 대향전을 기년전으로 바뀌고 건륭제 때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원래의 모습을 지켰다. 1900년 8재국 연합군이 천단 재궁에 사령부를 설치하난 바람에 많은 제기와 유물들이 사라졌다. 중화민국 수립 후 원세개가 한번..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6일 북경대학 홍루北京大学红楼

장안가를 달리다보니 거대항 몰도 보이고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동교민항이라고 불리는 옛 대사관, 은행이 몰려있는 곳중국은행 구 본점이다 지금은 대부분 관공서가 되어 접근이 힘들다고 북경시 인민정부 건물도 보인다 그리고 장안가를 지나 오사로라고 불리는 도로의 오사운동 기념탑 근처에 북경대학 홍루가 나온다 현재는 북경신문화운동기념관으로도 쓰이는 곳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제1호인 북경대학 홍루 북경대학 홍루(北京大学红楼)는 현재 북경대학 캠퍼스에 없다. 북경대학이 옮겨갔기 때문이다.이 건물은 1916년에 북경대학이 벨기에에서 돈을 빌려 짓기 시작한 건물로 1918년 완성되었다. 본래 기숙사로 쓰려 했으나 대신 베이징대의 교부와 도서관, 문과 교사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진독수, 이대조, 노신, 호적 등이 교수..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6일 중국군사박물관中国人民革命军事博物馆

다음으로 온 곳은 중국군사박물관 정식 명칭은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中国人民革命军事博物馆) 보통 그냥 군사박물관이라고 부른다.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앙군사위원회의 정치공작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군영 박물관이다. 1959년에 건립되었으며 중국 유일의 군사박물관이다. 박물관 건물이 조금 이색적인데 당시 소련의 도움으로 지은 건물이다. 그런데 마침 방문했을 당시 내부가 대대적은 리모델링 중이라 야외전시장만 공개 중이었다 지붕 끝 첨탑에 거대한 별리 달려있다 뭐 아쉬운데로 야외전시장부터 간다 주로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라고 한다 미사일도 보인다 탱크들 많다 중국 70식 130미리 이대자행화전포 요인들이 타던 승용차들 주더의 세단 모택동이 사용하던 소련제 세단 군용차들 중국에서 장정 2호를 발사할 때 사용했던..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6일 백운관白云观2

구사전 뒤로 나가면 2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1층은 사어전 2층은 삼청각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사어전도교의 중심 신 4명을 오시는 곳이다. 중앙에 옥황상제, 좌측에 장생대제(남극노인), 천황대제, 우측에 자미북극대제를 보시고 후토황지기를 같이 모신다 장생대제와 천황대제 옥황상제 후토와 자미대제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의 모습 내려다 보는 향로 2층 삼청각 내부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삼청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 원시천존 영보천존 도덕천존=노자 신이 정말 많다 믿으려 내려가 이제 중로 대신 동서로의 크고 작은 전각을 살펴본다 원군전 천선성모벽하원군 즉 태산성모를 모신 곳이다신 정말 많다 내부의 벽하성모 협시로 최생낭낭, 송자낭낭 안광낭낭, 천화낭낭의 여신들을 모시고 있다 다음은 문창전 원군전 문창전 앞의 동상 북두칠..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6일 백운관白云观1

다시 택시를 타고 도교 도관인 백운관으로 간다 백운관의 영벽 화려한 패방이 서 있다영성문이라고 하며 명 정통제 때의 건물이다 백운관(白云观)은 북경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도관이자 전국적으로도 중요한 도관이다. 도교에서 북종이라고 하는 북중국의 대표적 분파인 전진도의 중심 도관이기도 하다. 당현종이 노자를 위해 처음 천장관이라는 이름으로 세웠다고 하며 이후 금, 원을 거치면서 장춘궁이라고 하여 중국 전체 도교를 관할하는 도관으로 성장하였다. 명나라 초기 중건하면서 백운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전국을 관할하는 도관으로 바꾸었고 청나라 순치제 때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옹정제와 서태후 등 많은 황족들과 태감들의 후원을 받아서 후원을 받았다. 특히 서태후는 이곳 도사를 크게 의지하여 제정 러시아가 이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