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거리

운동권 혐오를 누가 만드는가 - 뉴리버럴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 (채효정)

同黎 2016. 12. 30. 16:51

'운동권 혐오’를 누가 만드는가 
- 뉴리버럴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

운동진영의 사상에 대해서, 주장에 대해서, 입장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나도 있으니까. 그런데 사상, 주장, 입장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취향으로서의 반대라면 그것은 문제다. '운동권 혐오'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지금과 같은 ‘꿘들은 싫다’, ‘꿘들은 아니다’식의 일반론적 혐오의 확산은 더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가 아닌 듯 하여 이 글을 쓴다. 이대사태 당시의 일반학생들과 운동권학생들의 분리, 그리고 순수한 촛불시민과 불순한 운동권들의 분리. 그런데 과연 이러한 분리의 프레임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이미 '운동권'이란 용어 자체도 취향의 혐오가 들어 있는 용어다. 예전에 그것은 극우-보수주의자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운동권을 박멸하고 싶어 했던 공안당국이 주조해낸 이 용어를 지금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지금 나오는 말들은 그보다 더 하다. '꿘충' '시위꾼' '업자들' '선수들' 같은 말들. 언어를 다루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언어 자체가 얼마나 편견을 조장하고 혐오의 딱지를 붙이는 말인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 분석을 하면 아마 운동권 – 빨갱이가 거의 한 세트로 검색될 것이다. 그런데 '빨갱이'와 다를 바 없는 이런 용어들을 이제 시민들이, 그것도 '보수 애국 시민'이 아닌 시민들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용한다는 것이 문제다. 정치학적으로 볼 때 이런 언어들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면 타인이 내세우는 그 목표와 방식이 나와 다르며 왜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가를 말하는 것이 '비판'인 것인데, '운동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어지고 비판이 실종되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내용에 대해서는 왜 인지 말하지 않고 '방식(스타일)'에 대해서만 싫다고 한다. 스타일이 싫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스타일, 옷 입는 스타일, 투쟁하는 스타일, 그런 것이 싫다는 것이다. 보수인사들이 운동권을 대놓고 욕한다면 이들은 대신 '올드하다'고 그럴싸하게 말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을 올드 보이, 낡은 사람들로 만드는 건 어쨌든 취향의 혐오이고 스타일 비평이다. 그런데 스타일이 싫다는 것은 '꼴 보기 싫다' 는 것 아닌가?

보기 싫은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선이 된다. 구태라서 문제라면 사라지는 것이 답이 아닌가. ‘낡은 사람들’은 새로워지거나,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폭력적이다. '올드하다'고 스타일 비평을 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전혀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취향의 소수자들에게는 '나는 당신의 주장에 반대합니다'라는 정면반론보다 더 폭력적이다. 자기의 성적취향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것이 소수자의 성적취향을 위협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보자면 나치의 '유대인 절멸'의 프로젝트도 그런 미적 취향의 혐오 논리에 의해 작동된 것이다.

게다가 '운동권은 이제 올드하지' 라고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언어일까? 나는 그것이 그냥 일반 사람들의 생활세계에서 탄생한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언론과 지식사회가 함께 만들어낸 문장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수언론, 보수학자들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보수는 진보 좌파에게 올드하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틀렸어’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파에게 좌파는 적대적 존재이지 촌스러운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을 올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집단 내의 뉴제너레이션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진보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 이들이 말하는 새로운 (new) 것이란 무엇일까? ‘운동권은 올드하지’라는 부정적 문장을 뒤집으면 그것은 ‘촛불(만)이 훌륭하다’는 긍정적 문장으로 발화한다. 이들에게 촛불은 ‘새로운’ 운동양식을 대변한다. 그들은 그 속에 담겨있는 민중의 의지와 내용적 변혁의 열망보다 형식의 미학에 집착하고, 내용적 전복은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형식의 전복 (축제와 같은 혁명 등등)으로 유도하고 대체하려 한다.

촛불이 새롭다고 새로운 운동만을 끊임없이 찬양하고 신세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서 나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스타일의 새로움 말고는 (나로서는 그 스타일도 전혀 새롭지 않지만) 대안이나 전망에서의 내용적 새로움이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들은 누구일까? 운동의 현장을 떠난 사람들, 과거 운동에서 이탈하여 기득권화된 ‘운동권 출신’ 리버럴들에게서 특히 이런 태도를 발견한다. 특히 지식인들 중에서 운동의 현장과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그 대가로 교수가 되거나 국회의원 등등 다른 사회적 지위로 ‘성공적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그 과정에서 적어도 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사회운동에 대한 주도권과 발언권과 자기 위상을 상당부분 상실했다. 발언의 실천적 힘과 정당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의 신분과 미디어를 통해 대중적 지명도를 확보함으로써 안전한 진보의 영역을 구축하였고 그 안에서 여전히 적당히 진보적이고, 적당히 사회참여적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진보적으로 보이는 리버럴들이 '운동권'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정서는 박사모가 운동권이라고 부르고 공안검사가 운동권이라고 부르고 극우언론이 운동권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들이 구태를 벗어나 간절히 새롭고자 하는 욕망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뉴레프트를 가장한 뉴라이트의 진화." 
새로운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리버럴에 뉴를 붙인들, 그게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밖에 더 되는가. 자유주의의 새로운 해석과 진화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새로워서 좋았던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우리가 보았듯이 자유주의는 얼마나 신자유주의와 구분없이 하나가 되었던가. 그러니 지금 자기의 정치적 입장은 제출하지 않고서 구태와 적폐의 청산을 목청 높여 외치고 올드를 벗고 신사회운동을 하겠다는 이들은 결국 진보 좌파 운동의 전통과 내용적으로 단절하면서 그것을 '스타일'의 차이로 환원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닌가, 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박근혜 이후에 가장 큰 몫을 챙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구식'이라는 이유로 운동의 가치와 목표, 성공과 실패를 맘대로 재단하고, 자기의 변화(변절)와 맞지 않을 때면 미학적 이유를 들어 지양하고 배제할 때 그 신사회운동은 반드시 신자유주의적 사회운동으로 빨려들어 가게 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굴절도 이미 우리는 경험한 바 있지 않은가.

지금 새누리당의 뉴라이트 인사들도 모두 ‘전두환-노태우’ 이후에 '순수민간정부(?)'를 3당 야합으로 만들어내면서 '지금까지의 운동은 너무 낡은 방식이었다'며 전향했던 사람들이다. 그 때도 그들은 ‘포스트(post)’를 좋아했고, ‘뉴(new)’를 붙이기 좋아했다. 나는 그 때와 똑같은 언어들이 지금 다시 출현하는 것을 본다. ‘이명박-박근혜’ 이후가 다시 한 번 ‘기득권 내 보수-진보’의 권력분점에 의한 '체제공고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위험한 신호다.

지금 광장에서는 이런 류의 위험한 시그널들이 계속 포착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원한다.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경제를 원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경계하며 물어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새로움만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도, ‘새로운 운동’도, 새롭다는 것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도 새로운 물결이었다. 대처의 자유주의적 대개혁은 ‘신 공공관리정책’ 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낡은 시대로부터 벗어나오기 위해 버려서는 안될 것들을 버린 대가를 치르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