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3차

일본불교미술답사기 - 6일 카츠라기1 (다이마데라當麻寺1)

同黎 2018. 5. 25. 06:48



다음 장소는 다이마데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문화재가 많은 절이다.


인왕문 

에도시대의 건물로 나라현지정문화재


다이마데라(當麻寺, 当麻寺, 당마사)는 고야산진언종과 정토종이 공동 관리하는 사찰이다. 쇼토쿠태자의 동생이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창건은 미상이다. 다만 이 길이 고대 아스카시대 나니와와 수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라서 일찍이 사찰이 세워졌고, 아스카시대에 창건이 되지 않았나 보여진다. 후술하겠지만 다이마데라의 가람배치는 인왕문-본당(만다라당)을 잇는 동선과 금당-강당-동서탑을 잇는 동선이 십자로 교차하는데, 본래 이 지역의 호족이자 아스카시대 진신의 난 당시 공을 세운 다이마씨의 우지데라로 세워졌다가 나라시대 다이마만다라라고 하는 관경변상도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가람이 중복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본당 아래에 고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느 샌가 다이마씨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승려들이 사찰을 운영한 것 같다.

헤이안시대의 기록은 별로 없고 다만 구카이(공해)가 방문해서 진언종 사찰이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헤이안시대에는 고후쿠지의 말사로 생각된다. 한창 겐지와 헤이케가 싸울 때 타이라노 시게히라가 나라에 방화를 할 때 고후쿠지가 소실되자 본당과 동서탑을 제외한 가람이 소실되었다. 헤이안시대 말기에서 가마쿠라시대 초기 정토신앙이 번지며 금방 재건되었다. 이 때 다이마만다라가 전국에 퍼지는데, 그 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정토종 서산파(지온인계가 아닌 에이칸도 계열)의 교조인 쇼쿠(증공)이 큰 활약을 하여 정토종계 탑두가 많이 세워졌다.

현재 다이마데라의 탑두(자원)은 14개인데 5개가 진언종, 9개가 정토종이다. 그러나 본사는 사실상 역할을 잃어버렸고, 정토종 탑두 오쿠노인, 진언종 탑두 나카노보가 공동관리하고 특히 본당은 진언종, 정토종이 관리, 금당과 강당은 진언종이 관리한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14개 탑두가 본사 종교법인을 소유-본사 종교법인이 문화재를 소유하는 2중 구조이고 일부 건물은 탑두들이 직접 소유하는 복잡한 구조이다. 여기뿐만 아니라 뵤도인 등 은근히 여러 사찰이 이런 구조이다.



인왕상


지금의 인왕문은 과거 동대문이다.


입장


멀리 종루가 보인다.


안내문


복잡한 구조


종루에 매달려 있는 범종은 국보이다.


종루 측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7세기 후반 창건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왠만하면 종루에서 내려서 다른 곳에 보관했으면 하는데


여긴 소유관계가 복잡해서 보물관을 만들 수 없으니


입장


왼쪽은 나카노보

진언종계 탑두 중 수위에 속한다.


나카노보 입구


내부 서원이 중요문화재, 정원이 사적 겸 명승이다.


입구


멀리서 탑이 보이는 정원인데

이번엔 지나간다

서원도 공사 중


금당이 보인다


금당과 강당 사이에 본당이 보인다.


본당

만다라당이라고도 하며 수리 결과 헤이안시대 후기에 재건되었으며 나라시대 세워진 건물의

부재들을 전용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나라시대 사용된 자인 천평척이 사용된 흔적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정토신앙이 퍼지면서 더욱 크게 세운 것으로 생각되며 내부에는 역시 국보로 지정된

수미단과 만다라주자가 있다. 뒤면 다락 부분에서는 목조 판광배 55면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많은 광배가 왜 발견되었는지 미상이다.


강당

14세기 초의 건물로 헤이케의 병화에 의해 소실된 것을 재건하였다.


강당 안내판

중요문화재


바로 앞의 금당


역시 가마쿠라시대의 건물이었다.

내부에 본래 본존인 소조미륵좌상이 있는데 대좌에 약간의 화재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 소실은 아니었으나 재건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문화재


본당부터 간다.

본당에서 배관 수납을 해야 강당과 금당 내부를 볼 수 있다.


나라시대 품격을 지닌 본당


국보 표시


외진의 부분


각 당에 안치된 불상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기타 다른 문화재 정보


한쪽의 빈도로존자


역시 풍찬노숙 중


내부에는 다이마만다라가 있다.


이 만다라는 원본이 아니고 17세기에 복제한 중요문화재이다.

원본은 자수나 그림이 아니고 비단을 짤 때 색실로 무늬를 넣는 철직이라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당나라의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크기는 높이와 넓이가 모두 4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만다라이다. 기본적으로 관무량수경변상도이지만 일본에서는 이 다이마데라본이 너무 유명해 다이마만다라라고 부르고 있다. 중앙에는 관무량수경의 변상 내용이면 그 둘래의 작은 칸에는 마가다국의 왕사석에서 빔비사라왕이 데바닷타의 꼬임에 넘어가 아들 아사세태자에게 갇혀 죽은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이 다이마만다라에는 전설이 있는데,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손자로 좌대신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의 딸 추조히메에 관한 이야기다. 계모는 추조히메를 미워해 몰래 죽이려 했고, 죽음이 다가와도 독경을 멈추지 않자 죽이러 온 가신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절에 숨긴다. 이 때 추조히메가 연꽃으로 만든 오색실로 만다라를 짰는데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하룻밤만에 짰다고 한다. 후에 추조히메는 돌아와 천황의 후궁이 되지만 곧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는 이야기로 13세기 이래로 크게 유행한 이야기이다. 물론 실화는 아니다.

다이마만다라는 17세기에 너무 심한 손상으로 주자의 판에 거의 붙어 있었고 이를 떼어내어 족자에 개장하기 위해 분리된다. 이 때 만다라의 표면에 종이를 붙이고 물을 부었는데 굉음을 내며 판에서 만다라가 벗겨져 떨어졌다고 한다. 이 일로 만다라는 수십 개의 잔편으로 분리되어 이후 족자에 재개장된다. 이 때 판에 남아있는 부분은 그대로 주자 뒤편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뒷판만다라라고 불리며, 만다라에 붙였던 종이에 그림이 전사되었는데 이를 인지만다라라고 부른다. 원본은 현재 다시 정창원사무소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본래의 40% 정도만 제대로이고 아랫부분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아주 드물게 공개된다.


불단


주자의 수미단

수미단은 헤이안시대 후기 본당 재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나전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국보이다.

주자는 가마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조사 당시 금니로 쓰여진 명문과

2000명 정도의 시주질이 발견되어 8세기 말~9세기 초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재 앞의 문짝 부분은 나라국립박물관에 기탁 중이다.


만다라


한쪽의 아미타불


추조히메상



중요문화재 십일면관음상


추조히메가 만다라를 짤 때 도와주었던 관음보살이라고 하며 헤이안시대 초기로 본다.


안내문


안쪽에는 다른 불상들이 전시 중

역행자와 전후귀상


모모야마 시대



수미단


이렇게 나전으로 명문이 남아있다.


측면


전면


한쪽의 아미타여래


시대는 모르겠으나 재금으로 된 옷의 무늬가 뚜렷하다.


측면


연화대좌


밖을 나왔다.

서탑은 공사 중이다.


강당


금당


정면의 모습


강당의 모습


공포


특이하다


내부의 모습


본존 아미타여래

중요문화재

좌우로 여러 불상들이 모여있다.


본존 왼쪽의 지장보살

오른쪽의 아미타여래좌상, 묘당보살입상이 중요문화재이다.


반대쪽


본존 아미타여래


묘당보살상

모두 헤이안시대 후기의 것으로 본다.


금당


안으로 간다

정면의 부동명왕상은 후대의 것


뒤편의 소조미륵불좌상이 국보이며

사천왕상이 중요문화재인데 2구는 수리를 하러 갔다.


아스카시대 후기의 사천왕상

건칠상으로 일본에서는 호류지에 이어 2번째로 오래된 사천왕상이다.

후대의 사천왕과는 다르게 중후한 모습이며 전승에 따르면 백제에서 보내줬다고 한다.


대좌의 생령은 호류지와 유사성이 보인다.


대좌 측면


반대편의 사천왕


생령



부동명왕상은 시대가 많이 떨어진다.



뒤편의 모습


국보 미륵불상


본래는 3존상의 양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륵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확증은 없다.


일본에서는 고대 신라의 불상

특히 군위삼존불과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불상 높이만 2미터가 넘는 대형상이다.


양손은 화재의 영향으로 나무로 후보한 것이다.

대좌 역시 일부 후보이다.


표면에는 칠을 하고 금박을 했지만 많이 들떠있다.

역시 화재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광대는 헤이안시대 후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측면


얼굴의 부분


일본 불상은 개금을 안 하다보니 그대로 원래의 칠이 남아있다.


사천왕상

채색의 흔적이 보인다.


반대편


밖에는 지장보살이 있다.


이제 오쿠노인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