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5차

기나 긴 일본답사기 - 12일 고베4 (미나토가와신사湊川神社)

同黎 2019. 3. 23. 05:41



미나토가와신사로 가는 길


진짜 완전 고베 시내로 왔다.


길 옆에 보이는 신사 입구


여기에는 주차장이 없고


근처의 지하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지하도로 나가는 길


신사 정문으로 나가려면 이리저리 가야한다.


이렇게 지하도를 지나서


정문으로 나가면


거대한 신사 정문이 나온다.

고베에서 가장 큰 신사인 미나토가와신사이다.


미나토가와신사(湊川神社, 주천신사)는 남조 충신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를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로

마사시게의 자결지이자,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무로마치막부 측에서는 악당으로 묘사하는 그는 지금의

오사카부 남동부 산지인 카와치 출신의 호족이며 타치바나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사실 출신에 대해서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가마쿠라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고다이고천황이 거병하자 이에 호응해 500명으로

20~30만의 막부군을 막은 아카사카전투를 벌였고 이후 요시노 방면으로 가 고다이고천황과 합류한다.

이후 오사카 방면에서 막부군을 격파하고 고다이고천황의 아들인 모리요시친왕과 함께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후에 고다이고천황의 심복이 되어 호조 토키유키의 난을 진압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경계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공격하자 아들 마사츠라에게 사쿠라이의 유훈이라고 전해지는 이별을 하고

규슈에서 교토로 향하는 아시카가군을 막기 위해 효고로 향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미나토가와 전투라는

전투를 통해 16차례 아시카가군 본진까지 돌격하지만 해로로 올라온 아시카카군의 양동작전에 걸려

마침내 이곳에서 포위당하고, 이곳에서 동생 마사스에와 함께 서로를 찌르는 방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신사 내에 그의 묘지와 자결지가 각각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후 아들 마사츠라도 전사한다.


미나토가와신사는 그가 전사한 곳에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주신으로 모시고 그의 부인과 동생 마사스에,

아들 마사츠라 및 남조 충신과 그의 가신 16인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이후 남조의

충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에도시대까지는 주로 원령으로 섬겨졌지만 막말기에 이르면 남조 충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미토학의 창시자이자 2대 미토번주로 미토 고몬이라고 불리는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주도로 편찬한 <대일본사>는 남조를 정통으로 보는 남조정통론을 주장했고 그에 따라 남조의

충신인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무사의 귀감으로 삼았다. 이후 미토번을 중심으로 그를 숭배했고 도쿠가와

미츠쿠니는 그의 무덤을 찾아내서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그의 묘 근처에 있던 코곤지라는 임제종

사찰로 다시 세워 무덤을 관리하게 했다. 이것이 미나토가와신사의 첫 시작이다.


이후 18세기에는 그의 제사가 이루어졌지만 막말의 존왕양이지사들이 하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막말기의 미토번사를 중심으로 그의 신사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미토학이 퍼지자 사츠마번에서

신사를 세우고자 했으나 정세 혼란으로 실패하고 이후 대정봉환이 이루어지자 오와리번에서 신정부의

통합을 위해 세우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때 장소에 대한 의견이 나왔는데 현재의 자리로 정해진다.

이후 메이지 원년 미토번에 신사 건립이 일임되었으나 역시 국가가 짓는 것이 좋다고 하여 정부 주도로

신사가 세워진다. 이후 이것이 각 번 초혼사로 이어져 교토료젠고코쿠신사(호국신사) 및 야스쿠니신사의

건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육군의 군도는 야스쿠니신사에서, 해군의 군도인 키쿠스이도(菊水刀)는

이곳에서 단련했다. 여러모로 일본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실 지금 쿠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대일본사에 기초하고 있어 정확성에 문제가 많다.


메이지시대 신사들에 대한 사격이 정해질 때 이렇게 근대에 정치적 목적으로 세워진

신사는 별도로 별격관폐사로 대우했는데 사실상 관폐대사에 가깝다.


웅장한 문


들어가자마자 메이지천황의 친필 비석이 보인다.


먼저 묘소로 간다.


성인 쿠스노키의 앞을 따서 마사시게는 대남공, 아들 마사츠라는 소남공이라고 부른다.


묘비의 탁본

오호충신남자지묘라는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친필이다.

오호는 감탄사고 남자는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공자, 맹자처럼 성인으로 올리는 칭호다.


이 뒤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안내문

사적이라는 안내


이게 비석이다


이 비석이 바로 무덤이다.

지하에 관이 있다고 한다.


사적이라는 표석


요시다 쇼인, 마키 야스오미, 산조 사네토미, 사카모토 료마, 타카스기 신사쿠,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토시미치, 키도 타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이 이 곳을 참배했다고 한다.

 

한쪽에는 대일본사를 쓰고 이 무덤을 찾아낸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동상이 있다.


동상 안내판


이제 신사 본전으로 간다.


경내도 무지 넓다.


도리이


쿠스노키의 일대기


관련된 사적들도 소개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배전


본전 앞에는 작은 녹나무가 심어져 있다.

남이 녹나무 남자이기 때문


신사 자체는 공습으로 모두 무너진 것을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남조 충신들을 찾아내서 귀족으로 봉작하는데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후손은 못 찾았다고 한다. 다만 모모야마시대에 쿠스노키 마사토라라는 인물이 후손이라 주장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역적에서 풀어줄 것을 청했다고 한다. 이후 역적에서 사면되고 이 인물은 이세의 키타바타케가에

가신이 되었는데, 그 방계가 히코네 이이가의 가신이 되어 성을 키마타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남작이 되었으나 이들과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정말 혈연이 이어졌는지는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하다.


각종 기념물들

동상 모양도 판다.


이제 본전 뒤편으로 간다.


이 뒤편이 그의 순절지이다.


순절지로 가는 길은 회랑이 연결되어 있다.


들어가는 길


옆에 보이는 다실


순절지 입구


어째 문이 열려있다.


사적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전몰지라는 표석


옆의 사무실로 통하는 곳


들어가도 되나 망설이는 중


안내판


뭐 일단 욕먹더라도 보고 욕먹자고 들어가자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정원


들어가니 청소 중이다.


잠깐 봐도 되냐고 물어보니 된단다.


가까이 가는 중


이곳 뒤편이 동생과 함께 자결한 곳이다.


음 어떻게 고증했는지


일단 금족지이다


이제 보물관으로 가자


도리이를 지나


다시 정문 입구까지 가면


바로 옆에 보물관이 있다.


따로 입장료 300엔이다.


에도시대의 등롱


막말기에 쿠니노미야 친왕이 바친 것이다.


안내문


역시 같은 친왕이 바친 궁시


안내문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갑옷

시대는 무로마치 후기~모모야마시대로 맞지는 않는다.

마츠다이라가 전래품인데 신사에 봉납된 것이다.


안내판


역시 그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갑옷으로 중요문화재이다.


타츠노번의 와키자카 가문에서 전해지는 것이다.

가장 그의 시대와 가깝지만 역시 진짜인지는 의문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친필 법화경

중요문화재로 거의 유일한 친필이다.

중요문화재


안내문


그의 것이라고 전해지는 칼

무로마치시대


안내문


근대 해군도로 만들어진 키쿠스이도



봉납된 칼

태도



역시 봉납된 태도

미토번에서 봉납한 것



태도

카가번에서 봉납



태도

에치젠 마츠다이라가에서 봉납



이제 다시 차로 간다.


지하를 지나


다음 장소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