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장소는 이 만쥬지이다.
도후쿠지 길 건너에 있는 사찰이다.
이곳 앞은 몇 번 왔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나갔었다.
만쥬지(万寿寺, 萬壽寺, 만수사, 만주지)는 임제종 동복사파의 사찰로 현재 도후쿠지의 탑두 사찰이지만
한 때는 교토 오산에 속하는 거찰이었다. 본래 헤이안시대 후기에 시라카와천황이 지은 작은 불당에서
시작하여 이후 로쿠조에 사찰이 세워졌다. 이후 이 사찰은 호넨의 제자에 의해 천태종계 정토교 사찰이
되었다가 임제종 사찰로 확립되어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십찰에 속했다가 오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오닌의 난 당시 화재로 쇠락하여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쇠락하였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삼성사라는 사찰과 합쳐졌고 도후쿠지의 탑두가 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 온 승려
유종묵이 하나조노대학에서 수학하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의 사찰이 되었다.
교토에 머물던 조선인들이 귀국 기념으로 새운 석표
종루는 중요문화재로 소유자는 도후쿠지이다.
객전
교토부지정문화재이다
아직 약속시간이 되지 않고 이곳이 워낙 조심스러운 곳이기에 문 밖에서 기다렸다.
이곳은 관람하는 곳이 아니라는 안내문
약속시간이 되어서
들어간다
유종묵 스님은 이 절을 제자에게 전해주고 입적하였다. 현재 (사실상) 주지 스님은 유종묵 스님의 손제자.
만쥬지는 비록 탑두지만 교토오산에 속하는 곳이기에 도후쿠지의 주직이 당연직으로 같이 맡는다. 그러나
유종묵의 법통이 흐르는 이곳은 재일조선인의 중심 사찰 같은 곳이고 해서 본사에서도 건들지 않는다고.
우리는 2시간 넘게 긴 이야기를 나누고 유종묵 스님의 유묵과 재일조선인들의 납골당을 배관하고 본당에
참배했다. 본당엔 신자들이 시주한 경남 산청에서 모셔왔다는 조선시대 불상과 종이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극도로 조심스러워서 상세 내용은 아래 만쥬지에 보낸 편지와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쓴 보고서로 대신한다
만쥬지 귀하
안녕하세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편지를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한국의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동국대학교에서 불교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박사과정생 朴世然(Joseph Seiyon Park)이라고 합니다. 저는 남한에서 살고 있으며, 부모님도 한국 국적이시만 현재 미국 국적자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한국 이름과 미국 이름을 함께 전해 드립니다.
이렇게 연락을 드린 이유는 만쥬지와 재일조선인과의 관계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수차례 교토와 나라를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도후쿠지의 앞에 있는 과거 교토오산 중 한 곳인 만쥬지에 재일조선인들이 귀국을 기념하는 표석을 세웠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경내 배관이 금지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국대학교에서 부산 통도사에 있는 한 노스님의 편지 수천통을 정리하는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중 많은 양의 편지가 바로 일본에 유학중인 스님들이 그 노스님에게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통해 통도사의 스님이 일본에 유학 간 많은 스님들의 유학비를 보조해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본 유학승들이 보내온 편지의 주소가 바로 교토의 도후쿠지나 만쥬지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흥미를 가지게 되어서 교토에 유학 간 스님들의 이후 행적을 찾던 중 상당수의 스님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몸을 담게 되었고, 이후 분단의 결과로 남한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불교도총연맹에 몸 담았던 많은 스님들은 조선불교사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분들이지만 조국의 분단 때문에 오랫동안 남한에서는 이 분들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만쥬지와 오사카의 統国寺를 직접 방문하여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 불교 운동에 몸담았던 스님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반 배관이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부득이 이렇게 편지를 보내어 허락을 구하고자 합니다. 최근 남한의 불교계에서도 이분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일본 유학승려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만 비워진 조선불교사의 근대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을 청하는 것이 몹시 실례가 된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허락해주신다면 매우 개인적인 자격으로, 혹은 만쥬지 측에서 원하시는 자격으로 한번 배관하고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발견한 스님들의 편지의 복사본을 전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비록 분단의 세월 때문에 근대 불교의 역사 역시 나뉘어 졌지만 이것을 조금씩 매우고자 하는 한 연구자의 간곡한 부탁이라고 생각해주시고 부디 배관을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올해 십일월 교토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이 기 간 중 가능한 때에 만쥬지를 방문하고 싶습니다. 일본어와 조선어로 각각 편지를 보내니 부디 긍정적인 답을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박세연 올림
난암(煖岩) 유종묵(柳宗默)과 교토 만쥬지(万寿寺)
박세연
1. 들어가며
일제시대에는 많은 승려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바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청정 비구의 법통을 강조하면서 이들에 대한 연구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유학승 중 대한민국이 아닌 북쪽을 선택한 승려들에 대해서는 그 실체가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어떠한 경제적 지원을 받아 어떠한 불교학을 공부하였는지, 또 해방 이후에는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길을 선택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던 중 통도사 극락암에서 소장중인 경봉스님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중 많은 양의 유학승 관련 자료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경봉스님이 주고 받은 편지에 등장하는 일본 유학승은 姜信昌, 敬祚, 金永基, 金知見, 成智信, 柳宗默, 尹二祚, 尹且鈴, 李康灄, 韓再德, 弘元 등의 인물이 등장하며, 다이쇼대학, 도요대학, 하나조노대학 등의 등록금 청구서 등 서류 역시 확인되어 경봉스님과 유학승들이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난암 유종묵이다. 그는 하나조노대학(花園大学)에서 유학을 하였으며 현재 재일 조선인계통 승려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의 법맥에 포함시키는 인물이다. 특히 교토 만쥬지 앞에는 재교토 조선인들의 조선(북한) 송환을 기념하여 그가 쓴 친필 비석이 남아 있어 당시 조선인 사회에서 그의 위치를 짐작케 해준다.
필자는 2017년 10월과 11월 사이에 3차례에 걸쳐 교토의 만쥬지를 찾아 동국대 ABC사업단에서 찾은 유종묵스님의 친필 편지 사본을 전달하고 그 법손 스님과 면담을 가졌다. 아직 정치적, 기타 언급할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해 완전한 소통은 할 수 없었으나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앞으로 교류를 통해 재일 조선인 승려, 그 중에서도 총련계 승려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많이 해나가길 바란다. 이하 내용은 만쥬지에서의 면담을 통해 정리했으며 서로간의 약속 상 부득이 밝힐 수 없는 내용도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2. 난암 유종묵과 그 법맥
난암 유종묵은 상원사의 한암스님의 법맥을 이었으며 탄허스님과 법통상 같은 연배라고 한다. 난암이라는 그의 호는 한암스님의 법호에서 한글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경봉스님과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경봉스님의 도움으로 교토의 하나조노대학에 유학하게 된다.
하나조노대학은 일본의 임제종 14개파와 황벽종이 연합하여 만든 선종계 불교대학이었다. 유종묵이 하나조노대학을 선택한 것은 임제종과 조선불교가 같은 선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편지를 통해 살펴보면 유종묵이 교토에 도착하여 머물게 된 곳은 도후쿠지(東福寺)였는데, 그러한 인연으로 임제종의 제파 가운데에서도 도후쿠지파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법손 중 하나가 주직으로 주석하고 있는 사찰 중 하나가 과거 황벽종의 별격본산이었던 것을 보면 딱히 도후쿠지파에만 얶매여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조노대학에서 수학한 뒤 유종묵은 귀국하여 조선불교 종단 건설 등에 참여한 조선 승려와는 달리 일본 임제종에 소속된 승려로 활동한다. 증언에 따르면 일본불교 종단 내에서 직책을 맡을 정도로 깊이 연관된 승려는 흔치 않았다고 한다. 유종묵은 일본 내 여러 불교인사들뿐만 아니라 학자, 정치가 등과도 교류했다고 하며 도후쿠지파의 관장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고 하며 대신 도후쿠지파의 배려 덕분에 만쥬지 등의 사찰을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난암 유종묵은 만쥬지를 중흥시키고 그 법맥을 윤일산(尹一山)에게 전달하였다. 일본 임제종은 대처가 가능하지만 유종묵은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대신 윤일산 스님의 자손인 윤청안(尹青眼), 윤벽암 등으로 이어졌다. 현재 조총련 산하의 재일조선인불교도협회를 구성하는 사찰들은 대부분 유종묵의 법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종묵의 법맥이 북한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도 미상이다.
3. 교토 만쥬지와 조선계 사찰들
유종묵이 주석한 교토의 만쥬지는 11세기 헤이안시대 후기에 최초로 창건되었으며 교토오산에 속할 정도로 격이 높은 사찰이다. 이러한 사찰에 조총련 산하의 불련 스님들이 주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본 우익인사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만쥬지의 독특한 내력은 유종묵을 떼놓고 생각하기는 어려우며, 유종묵이 사실상 만쥬지의 중흥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다.
만쥬지는 11세기 말 시라카와천황이 자신의 죽은 딸을 위해 세운 사찰로 본래는 현재의 위치도 아니었고 또한 천태종 계열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 가마쿠라시대에 주직이었던 쥬치 칵쿠(十地覚空)가 송에서 유학하여 도후쿠지에 주석한 엔니(円爾, 1202~1280)의 영향으로 임제종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임제종이 크게 융성함에 따라 만쥬지 역시 크게 융성했다. 이후 일본에 송을 본딴 오산십찰제가 시행되면서 십찰 중 제4위가 되었으며 다시 무로마치시대에 오산 중 제5위에 올랐다. 교토오산은 무로마치 막부가 억지로 쇼코쿠지(相国寺), 텐류지(天龍寺)를 넣었고 실제로 세력이 막대했고 대본산으로 자리잡았던 묘신지(妙心寺), 다이토쿠지(大德寺)를 제외했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만쥬지의 사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이후 만쥬지의 사세는 쇠퇴하는데, 특히 15세기의 대화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만쥬지는 쥬치 칵쿠가 도후쿠지 옆에 창건한 산쇼지(三聖寺) 인근으로 이전하였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폐불훼석의 소용돌이에서 크게 쇄락하고 산쇼지와 병합되었다. 이렇게 사세가 줄어들었지만 만쥬지는 교토 오산 중 한곳이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사격은 매우 높았는데, 임제종 도후쿠지파의 관장은 관장 취임과 동시에 도후쿠지 주직과 만쥬지 주직을 동시에 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명망이 높았으나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마땅한 직임을 맡을 수 없었던 유종묵이 만쥬지의 별당(別當)으로 부임하게 되고, 폐사된 산쇼지의 건물 등을 정비하여 만쥬지를 부흥시키게 되었다. 이후 도후쿠지파는 관장이 만쥬지의 명목상 주직을 겸하지만 유종묵과 그 법손들에게 사실상 관리를 일임하면서 만쥬지는 도후쿠지에서 반쯤 독립된 현재의 독특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 만쥬지는 재일조선인들의 보리사가 되어 이들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으며 재일조선인들의 시주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도후쿠지 본사에서는 만쥬지에 대한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만쥬지의 윤일산의 차남인 윤벽암 스님이 주직으로 있는 도쿄의 코쿠헤이지(國平寺)가 별도의 종파에 소속되지 않은 단립사원이며, 최지광-최무애 스님이 주석한 오사카의 쇼코쿠지(統国寺) 등이 원효종 등의 독자 종파를 만들어 활동하고, 민단계열의 일본조계종, 재일본대한불교진흥회 등과 연합해서 대승불교해동회, 재일본한민족불교도총연합회 등을 구성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의 불교종단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역시 유종묵의 영향이 강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4. 맺음말
일본에는 유종묵 외에도 많은 유학승들이 자리 잡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정착해 있다. 사승관계, 혼인관계 등으로 사찰 자체를 전수받고 이들을 한민족의 사찰로 바꾸어 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과거 진언종, 정토진종 등이었던 사찰을 임제종 사찰로 바꾸어 한국의 선맥을 이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재일동포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문화적 문제 때문에 일본 내에서 움직였던 여러 조선인 승려들의 흔적은 학계에서 외면받아 왔다. 유종묵과 같이 불교사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한일불교 양쪽에서 독특한 역할을 해왔던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지났다. 나눈 이야기가 많다.
늦은 점심을 먹는다.
오늘 일정은 거의 끝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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