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무량사 극락전 소조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 (보물 1656호)
충청남도 부여에는 무량사라는 오랜 고찰이 있습니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말에 범일국사라는 분이 새웠다고 전해지는데, 자세한 창건 역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고려 때 크게 중창했다고 하는데, 역시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무량사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전기 때 입니다. 생육신으로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은 계유년 정난 이후 속세를 떠나 스스로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는데,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곳이 바로 이 무량사입니다. 그래서 무량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김시습의 자화상이 보관되어 있으며, 매월당의 부도 역시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량사는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답사객들에게는 인기가 높은 곳입니다. 극락전, 오층석탑, 석등, 김시습초상, 미륵불탱화, 그리고 위의 사진에 보이는 소조 아미타삼존불까지 6점이라는 적지 않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시도유형문화재 급을 포함한 문화재들도 여럿 소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절이 비교적 넓고 아늑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아늑함이 절로 느껴지는 곳입니다. 거기에 소란스럽지 않고,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화려한 중창불사로 이루어지지 않아 꼭 한번 가볼만한 절집입니다.
무량사 극락전 (보물 356호)
보물 1565호인 무량사 소조아미타삼존불상은 최근인 2008년 지정된 인조대왕 시기의 불상입니다. 소조불이니 가음데 목심을 중심으로 진흙을 빗어 만들 불상이겠지요. 사실 대중적으로 그렇게 많이 알려진 불상은 아닙니다. 무량사라고 하면 보통 몇 없는 중층건물인 극락전이나, 백제계 탑의 양식을 보여주는 오층석탑, 김시습의 부도 등이 유명하지요. 하지만 저는 수년전부터 이 소조불상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혜종대왕(광햬군) ~ 숙종대왕에 이르는 기간에 일어나는 불교계의 변화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기념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 불상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사진만으로는 잘 상상이 안가시죠? 높이가 무려 5.4미터에 이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실내 좌불상 중에서는 완주 송광사 대웅전의 불상과 함께 가장 큰 불상에 속합니다. 일단 들어가면 그 크기에 압도됩니다. 불상 옆에 놓인 국왕과 왕비, 세자의 안녕을 비는 위패모양의 삼전패의 크기만도 150cm가 넘어서 왠만한 여성의 키만합니다. 그러면 이 불상의 시대는 어떻게 될까요? 통일신라도 아니고 고려도 아닙니다. 조선 후기 인조대왕 때 만들어진 불상입니다. 불상을 모신 전각인 극락전도 인조대왕 연간에 중건되었습니다. 무량사만이 아닙니다. 김제 금산사와 귀신사, 구례 화엄사, 완주 송광사와 위봉사, 보은 법주사, 경주 불국사, 양산 통도사, 부산 범어사, 해남 해등사, 밀양 표충사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부분의 대찰들은 이때 중건이 되었습니다.
인조대왕때 중건된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현존하는 불교전축 중 가장 큰 건축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조선시대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입니다. 더군다나 혜종대왕(광해군)~숙종대왕에 이르는 기간은 임진, 병자 양란의 상채기가 아직 다 가시기도 않은 체 복구가 한창이었고, 심지어 경복궁의 경우에는 복구할 엄두도 내지 못한 체 정궁이 동궐로 옮겨지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대한 불사(佛事)들이 가능했을까요? 더욱 놀라운 것은 현존하는 불교 문화재의 60~70%가 바로 제가 주목하는 전후의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국가지정된 문화재의 비율만 따진다면 더욱 높아지요. 사실 여기에 대한 연구는 분분합니다.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적이 없어서 확정된 설은 없습니다. 우선 민중사적 입장의 학설인데요, 전쟁 이후 민중들이 불안한 마음을 불교에 의지하려고 하면서 이렇게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이 시기의 불상들이 대부분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이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미륵불, 현세의 고통을 치료하는 약사불에 집중되어있다는 사실이 그 근거입니다. 일부 유학자들 조차 불교에 대하여 연구하고 ,교류하기도 하죠. 민중사적 관점 자체로는 설득력이 약하고 사상사적 관점이 합쳐졌을때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데요, 정치사나 사회경제사적 고려가 없다는 점에서 좀 순진하다는 평가는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한편 전쟁 이후 불교의 위상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도 많습니다. 전쟁에서 승병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고 전후 처리에 있어서도 사명대사 등의 활약이 대단했기에 이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금강산 표훈사나 해남 대흥사, 밀양 표충사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 처영대사 등을 모신 사액서원이 사찰안에 건립됩니다. 밀양 표충사에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지요. 절 내에 표충서원이라는 서원이 등장합니다. 이로써 불교의 위상이 올라가고, 조선시대에 빈번했던 사찰에서의 유생들의 횡포또한 자체적으로 막을 수 있어 집니다. 그러나 물론 이 설명에도 맹점이 있습니다. 우선 단순히 공로를 치하하기 위한 것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병의 역할이 과장된 설명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실제로 승병이라는 존재가 현재 우리가 보는 불교의 모습에서 상상할때는 정말 이상한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승병의 존재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승병을 동원해서 쌓은 것이고, 산성 인근에 절을 지어서 승병들이 산성을 수비하게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찰이 북한산의 화계사입니다. 국가적으로 사찰을 이용한 사례는 이외에도 무수히 많죠. 성을 쌓게 하거나 능역을 관리하게 하는 등 많은 사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일본의 승병이나 고려, 신라 시대의 사찰 세력을 살펴보아도 승려가 병사로써 동원되는 사례는 흔히 일어납니다. 해인사도 왕건의 편을 들었기에 고려시대에 엄청난 부흥을 하게 되거든요.
대표적인 승병관리 사찰인 북한산성 중흥사 터
마지막으로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수준인데요,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우선 일종의 뉴딜정책이라는 것으로 전후 발생한 유랑민이나 무직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두번째는 아직 제대로된 사료가 나오지 않아서 무엇이라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서원이나 문중과 사찰의 결탁의 결과라는 해석입니다. 불교의 위상이 커지면서, 지방 재지사족이 이들을 차별하기 보다는 하위 파트너로 끌어안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아직 제대로된 연구 성과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주목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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