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료

종사일기 5월

同黎 2013. 3. 3. 04:00

 

1835-05-05 晴 請謁于巡相下直 而出歷別幕中諸友 日已過辰催裝 而發行二十里半夜月店舍 抹馬 行三十里化良驛中火轎馬出來故遞乘 行四十里 暮還官 吏曹呈到任狀以牛谷書者發送 而付家書一天送藿三丹胡桃二百五十箇藥果饌盒柏子三升黃燭五雙脯二貼 以籠三丁一隻果送 義興倅任奭朝 曾有僚雅分專指書問其意頗款卽裁荅 戶幕上京騎卜馬把送關文來到 故以牛谷騎馬本驛卜馬定送趂 初八日幽谷站及良申飭起送 仁庇驛民及慶州邑民等呈訴 復戶監官河錫龜爲人勤幹而無端自退而河洛圖差出 此人凡百不如錫龜之勤實 請仍任事 議送粘連來呈 題 官莅任才過數日雖未知監官擧行之善否 而所謂河錫龜者 多年氣行既云 勤幹又有前題之許 仍今姑任事向事 各驛濫騎 討索隨現隨告之意傳令 凡毋論某事傳令牌旨必都合收聚 每朔末修文狀後錄還納事 知委各驛 眞席一立貿入品好價給一兩 狗皮餙邊收布色吏河永植給由 富平驛中馬一匹兼官已爲看品立籍 而價爲一百八十兩僅可堪役仍爲許捧義谷都長以馬匹治療不得待令於看品定日事 文狀題斯速治療以爲他日看品之地向事

1835-05-05 맑았다. 감사에게 만나뵙기를 청했다. 하직인사를 드리고 나와서 별도로 幕中의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날이 이미 진시를 지나서 짐꾸리기를 재촉하고 20리를 發行하여 한밤중에 月店舍에서 말을 먹이고 30리를 행하여 化良驛에서 점심을 먹고 가마와 말이 나와서 갈아탔다. 40리를 행하고 관아로 돌아왔다. 이조에 올리는 到任狀牛谷書者로 하여금 發送하게 했고, 家書를 준 一天에게 3, 胡桃 250, 藥果饌盒柏子 3, 黃燭 5, 2첩을 대바구니 三丁一隻으로 싸서 보냈다. 의흥 수령 任奭朝는 일찍이 雅分이 있어서 단지 편지를 가리켜 그 뜻을 물으니 자못 곧 답을 지었다? 戶幕이 상경하여 騎卜馬 파송 관문이 도착했다. 그래서 牛谷驛騎馬本驛卜馬를 정하여 보내며 초8幽谷站 及良? 신칙하고 호송하여 보냈다. 仁庇驛慶州邑民 등이 呈訴하기를, 復戶監官 河錫龜는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나 함부로 스스로 물러나 河洛圖가 차출되었다. 이 사람은 무릇 河錫龜의 근실함만 못하니 그가 仍任하기를 청하는 일이었다. 議送하여 粘連되어 온 소장에 판결하기를 본관이 새로 부임하여 사무를 본지 수일에 불과하여 감관이 거행하는 일의 잘함과 못함을 말지 못하나 소위 河錫龜이라는 자는 여러해 동안 氣行既?했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또한 앞의 판결의 허락이 있었으니 이내 지금 우선 일을 맡게 할 일이다. 각 역의 濫騎는 드러나고 보고하는대로 討索할 뜻을 傳令으로 알리고, 어떤 일의 전령과 牌旨를 막론하고 반드시 모두를 모아서 매월말에 文狀後錄을 정리한 후에 도로 납부할 일을 각역에 알린다. 眞席 1립를 품질이 좋은 것으로 1냥의 값을 주어 사들이고, 狗皮로 변두리를 꾸몄다. 收布色吏 河永植이 휴가를 갔다. 富平驛中馬 1필은 兼官이 이미 看品하여 立籍하였다. 그러나 가격이 180냥이나 되어 겨우 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내 許捧했다. 義谷驛都長이 말의 치료로 인하여 간품하기로 정한 날 대령하지 못하는 일을 文狀하니 하기를 속히 치료하고 다른 날 看品하도록 할 일이라 하였다.

 

1835-05-06 晴 泉洑監官文報 洑役軍不赴役事 題 當此移秧之時洑役甚急是去乙 何許漢慢不赴役 姑以令申之意 玆先題飭是在果 若或一向不勤則斷當捉來嚴治向事 刑吏河晶千呈訴 京玄延日宅馬價一百四十兩推給事 題一百四十兩之還納也 眞若冤抑則何不於其称寃停 當是 隱喩汝旣徵納官已決處之後 原馬價區處與否 汝自擔當是如可 到今所訴其曰 近理乎同還納條百四十兩其時仍又立馬則今將徵出於何處耶於汝可謂滄浪煩訴無益向事

1835-05-06 맑았다. 泉洑監官文報하기를, 洑役軍赴役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기를, 이앙의 시기에 이르러 洑役이 심히 급하거늘, 어찌 의 게으름으로 부역하지 못한다하여 허락할 수 있겠는가. 우선 令申의 뜻으로써 먼저 題飭하거니와 만약 혹 한결같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단호하게 잡아와 엄히 다스릴 일이라고 하였다. 刑吏 河晶千呈訴하기를, 京玄延日宅의 말 가격을 140냥에 찾아 내어줄 일이었다. 하기를, 140냥에 도로 돌려주라 하였다. 진실로 만약 억울하다면 어찌 이 에 아니며 억울함이 그치겠는가. 이를 당해 隱喩汝旣? 徵納官이 이미 처결한 후에 原馬 가격의 처리 여부는 너희가 스스로 담당하다가 지금 호소한 바에서 말하기를, 還納條 140냥이 이치에 맞다. 이때 이미 또한 立馬한다면 지금 장차 어디에서 徵出하겠는가. 너희들은 滄浪하다고 말하나 번다한 호소는 무익한 일이다 하였다.

 

1835-05-07 晴 禮吏河致龍 國忌誤書 兵房河席鯉 開門闕罪 並決杖二十度 仁同居柳生爲宗人 柳復三頉役事 粘連議送 持族譜呈訴 題 考其譜牒與戶籍俱無可㨿之端 且柳復三入驛載案已爲三十餘年 則設或有班脉之人 法不當頉免 而今其宗人之替訴者雖出於睦族之義 無可許頉向事 各房掌下記成貼 兵營軍官自京下來給騎馬

1835-05-07 맑았다. 禮吏 河致龍國忌를 잘못 썼고 兵房 河席鯉이 문을 열어 의 죄를 범하여 모두 장 20대로 벌을 주었다. 仁同에 사는 柳生宗人으로 柳復三의 역을 빼주는 일로써 粘連議送으로 족보를 가지고 와서 呈訴하기에 하기를, 譜牒戶籍를 상고해보니 모두 증거삼을 단서가 없었다. 또한 柳復三入驛이 실린 문서는 이미 30여 년이 되어 설혹 班脉?의 사람이 있어도 법으로 마땅히 역을 뺄 수 없으니 지금 종인이 여러차례 호소하는 바는 비록 동족의 화목함의 뜻에서 나왔으나 역을 빼는 일은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房掌下記成貼하였다. 兵營軍官이 서울에서 내려와 騎馬를 지급했다.

 

1835-05-08 晴 東軒大廳鋪陳席子十二立所入爲六兩 而此則日後遞歸時吏房次知已例云 營主人處統凉一立來到而破傷 故還送以改納之意 防奸私通 淸通驛騎馬一匹致斃文狀 題 馬匹之每致瘦瘠生病不惟該馬夫之不善喂養 專由於都長之不勤 申飭是去乙 況此致斃之報 該驛之不幸 已無可言而都長氣行極爲未妥斯速改立以爲使役之地向事 還分以明日出令

1835-05-08 맑았다. 東軒大廳鋪陳席子 12립을 들이는데 6냥이다. 이는 훗날 체직되어 돌아갈 때 吏房次知하는 것이 예라고 한다. 營主人處에서 統凉 1립이 도착했으나 부서졌다. 그래서 고쳐서 납부할 뜻으로 돌려 보냈다. 私通防奸했다. 淸通驛騎馬 1致斃했다고 文狀하였다. 하기를, 마필은 매번 수척해져 병을 얻게 되니 해당 마부가 잘 기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都長이 근면하지 못한데에서 연유한 것이니 申飭하거늘 하물며 致斃의 보고에 이르러서야. 해당 역의 불행은 이미 말할 수 없다. 그러나 氣行은 지극히 온당하지 않으니 속히 고쳐 세워서 사역하는 바탕으로 삼을 일이라 하였다. 환곡의 분급은 내일 영을 내린다.

 

1835-05-09 晴 本倅來訪穩話而去 仁庇都長文狀 馬匹有頉不得待令於看品定日 題 赴燕回馬之病不起送勢 或其然而淡金馬之初四日發送者 至昨日不還云 殊涉訝惑未知緣何遲滯 是隱喩査報爲㫆 赴燕馬段各別治療以爲他日看品之地 淡金馬更勿遲滯卽速起送向事 新水使[李悌彬] 下來路文來到 自京初三日離發數日間抵此云 外驛看品馬仍爲留養延逢水使於義興 兵營生熟鰒 進上過去馬五匹給 還穀分給米 二十七石十斗二升常作錢六十六兩四戔四分 每石價二兩四戔式 租二十三石 太二十五石 牟六石分給八洞 河聖宗空石行下呈訴 題 所儲無多酬用浩繁只以十立許給向事 營主人金致宗訴 還租二石許給事 題 留儲零星略略畢分於館下窮蔀猶患不贍故不得泒及向事

1835-05-09 맑았다. 본 수령(신령현감)이 와서 방문하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갔다. 仁庇驛都長文狀, 마필이 이 있어서 看品을 정한 날에 대령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기를, 赴燕 回馬의 병으로 起送하지 못하는 형세라 혹 그러하다면 淡金馬를 초4일에 發送한 것은 어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殊涉? 괴이라고 의심스러워 어떠한 연유로 지체되는지 알지 못한다. 隱喩査報하며 赴燕馬는 각별히 치료하여 다른날 看品하는 바탕으로 삼을 것이다. 淡金馬는 다시 지체하지 말게 하고 곧 속히 起送할 일이다 하였다. 신임 水使 李悌彬이 내려온다는 路文이 도착했다. 서울에서 초3일 떠나 수일사이에 이곳에 이른다고 한다. 外驛看品하는 말은 이내 留養하게 하고 수사를 맞이하러 의흥에 나아갔다. 兵營生熟鰒進上하러 過去하기 위해 말 5필을 지급했다. 환곡을 분급했다. 27102승 일찍이 作錢하니 6644분으로 每石의 가격은 24전이다. 23, 25, 6석을 八洞에 분급했다. 河聖宗空石으로 行下하여 呈訴하니, 하기를, 저축된 것이 많지 않으나 酬用은 엄청나게 많으니 단지 10립으로써 許給할 일이라 하였다. 營主人 金致宗이 호소하기를, 還租 2석을 許給하는 일이다. 하기를, 留儲한 것이 零星하니 대략 館下窮蔀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마쳤으니 오히려 넉넉하지 못한 것이 근심이다. 그래서 泒及할 수 없다고 하였다.

 

1835-05-10 晴 安奇丞 金昌源氏 巡營往還路 歷訪移晷隱話 他鄕之逢儘覺欣慰 而午飰後旋別悵懷難堪

1835-05-10 맑았다. 安奇驛의 찰방 金昌源씨가 감영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방문하고 해가 저물도록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他鄕에서 만나 진심으로 기쁘고 안심이 된다. 정오에 점심을 먹은 후에 이별하니 섭섭한 회포를 감당하기 어렵다.

 

1835-05-11 晴 松蘿舊官之侄 吳繼善者 上京路 歷訪待以朝飯仍卽作別 爲迎新水使 作義興行 三十里 牛谷驛止宿 下處頗精進數哭茶啖 而䟽淡之味 有勝於官廚之供也 且居民爲數百戶殆同邑底樣 是夜使吏兵房點檢人馬

1835-05-11 맑았다. 松蘿驛舊官의 조카인 吳繼善이 상경하는 길에 방문하고 아침밥을 기다리고 이내 곧 작별했다. 신임 수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의흥 길에 올라 30리를 가고 牛谷驛에서 묵었다. 下處에서 자못 여러 그릇의 茶啖을 정성으로 들여와서 䟽淡한 맛은 官廚의 지공보다 나았다. 또한 거주하는 백성이 수백 호가 되어 자못 邑底의 모양과 같았다. 이날 밤에 吏兵房으로 하여금 사람과 말을 점검했다.

1835-05-12 晴 早發行十里 入義興本倅欣款穩敍飯后水使行部 入來呈馳進狀及公狀後 入謁仍下直 而來作別主倅 先卽離發午後 還衙下吏輩 多關五里程 出待 故吏房兵房官廳色吏首通引並決杖二十度使令歇杖罪決杖十度申後水使入邑往見入本官晤談而歸 富平都長文狀 馬價收刷次 定送色吏事 題 色吏定送不無弊端 自該驛另替收刷是矣 若或一向遷就則從當有別般處分事 且該驛旣是同價布而以二十名身故成冊報頉故題新到之初焉敢售奸()向事

1835-05-12 맑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10리를 갔다. 의흥에 들어가니 수령이 기쁘게 맞이하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밥을 먹은 후에 水使行部가 들어왔다. 進狀公狀呈馳한 후에 들어가 배알하고 이내 하직하고 와서 수령과 작별했다. 먼저 곧 떠나 오후에 관아에 돌아왔다. 下吏輩이 많았다. 5리 거리에서 나와 기다렸다. 그래서 吏房, 兵房, 官廳色吏, 首通引을 모두 20대의 벌을 내렸다. 使令은 장을 친 죄로 10대의 벌을 내렸다. 申時가 지난 뒤에 수사가 읍에 들어가 가서 보고 本官에 들어가 마주앉아 대화하고 돌아갔다. 富平驛都長文狀하기를, 말 값을 收刷할 차로 색리를 정해 보내는 일이었다. 하기를, 색리를 정해 보내는 일은 폐단이 없지 않으니 해당 역에서 달리 바꾸어 收刷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만약 혹 하나같이 미루어 지체하면 이 뒤에 마땅히 별도의 처분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또한 해당 역은 이미 같은 값의 포로 20명의 身故를 성책에 빠뜨려 보고했으므로 에 새로 도임한 처임에 감히 焉敢售奸()할 일이라 하였다.


1835-05-13 晴 旱乾太甚移秧極悶念 新水使早發往見牛谷便修書義興倅 赴燕人馬回見初七日家書此是初信息慰喜喜 庚午年友山宅莅此郵時 先大人來臨此處留月餘 而還 與退吏河光範連日射惟甚愛 及還次時以所把扇子具套書而贈之 扇則年久破無套書尙存云 故推見之感涙被面 渠今七十五歲而嘉善同知矣 以丸藥及一箑給之 以下記存之意 其時新迎通印河鳳彦卽今補役都監也 亦爲賜款以丸藥種給之其餘任使者 皆作故人云 京下人李世淂卽玄寶汝庶母父也 有收殺事 來留此處 已年久云 曾有受托 故拒見之以斤藥丸給之 陳醬一甫兒 西草一斤 送本官 周衣次黃布一疋貿來價三兩九戔又一疋三兩六戔 士潤衣次生黃苧一疋四兩四戔此亦士潤衣次 新寧同推官以本郵差定關文來到 蔓鞋送蔚山餙道里而來

1835-05-13 맑았다. 가뭄이 심하여 이앙이 지극히 민망하다. 신임 수사가 새벽에 출발하여 가서 보았다. 牛谷 편에 의흥 수령에서 편지를 썼다. 赴燕 人馬가 돌아왔다. 7家書가 처음 소식에 위로되고 기쁘다. 경오년(1810) 友山宅이 이 역에 부임했을 때 先大人이 이곳에 와서 수개월 머무르고 돌아갔다. 退吏 河光範과 더불어 연일 화살을 쏘며 심히 아끼셨다. 돌아갈 날이 되었을 때 가지고 있던 扇子와 도장을 선물했다. 부채는 해가 오래되어 부서지고 도장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러 보고 초면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지금 75세로 嘉善同知였다. 환약과 부채를 주었다. 이하를 기록하여 남겨두는 뜻은 이때 新迎 通印 河鳳彦이 곧 지금의 補役都監이다. 또한 丸藥種을 지급함으로써 후하게 대접했다. 나머지 任使들은 모두 故人이 되었다고 한다. 京下人 李世淂은 곧 玄寶汝庶母父이다. 收殺의 일이 있으므로 이곳에 와서 기다리니 이미 해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斤藥丸을 주고 보기를 거부했다. 陳醬 1甫兒西草 1을 본관에 보냈다. 두루마기 차에 황포 1필을 38전에, 1필은 36전에 사왔다. 士潤衣 차에 生黃苧 1필을 44전에 (사왔다). 이 또한 士潤衣 차이다. 신령의 同推官으로 本驛이 차정된 관문이 도착했다. 蔓鞋를 울산에 보내고 餙道里而來했다.

 

1835-05-14 晴 甲峴權雅致和來訪卽權寶城從孫也

1835-05-14 맑았다. 갑현 권치화 어르신이 내방하였으니 즉 권보성의 종손이다.

 

1835-05-15 賀禮而環点考 還分租四十六石一斗一升 常作錢五十五兩二戔九分 每石一兩二戔式 太三十八石一斗七升 常作錢五十七兩一戔八分 已上錢還一百十二兩四戔七分 均給八洞民前後二等分給錢還合一百七十八兩九戔一分 前坪都是馬位畓而開梁始役 故出看之

1835-05-15 맑았다. 하례하고 돌아와 점고하였다. 환분은 쌀 1611승이니 작전하면 5529푼이며 매석 12전씩이다. 콩은 3817승이니 작전하면 5718푼이다. 이미 돈으로 바꾼 것이 11247푼이다. 여덟동의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전후 이등으로 나누어 주었다. 돈으로 바꾸면 합이 17891푼이다. 前坪은 모두 마위답인데, 교량의 역시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가서 살폈다.

 

1835-05-16 晴本邑大同吏便付家書二天 淸通驛位土復戶預賣事報巡營題嚴閔永川郡事 本倅與冊客來訪 設看星之戱 招妓月香花玉皆伶俐於骨法

1835-05-16 맑았다. 본듭 대동사 편에 家書를 두 번째 부쳤다. 청통역 위토 복호를 미리 판 일의 보고에 순영이 민 영천군수에게 엄히 제음을 내렸다. 본읍 사또와 책객이 내방하여 간성지희를 설하였다. 기생 월향과 화옥을 불렀으니 모두 골법에 영리하다.

 

1835-05-17 登極垂簾尊號三次陳賀代加單子修呈吏曹及巡營而以代受人無乎報送 熟布一疋四十尺価給五兩品好<此處称익나니> 黃布一疋<中品>価五兩五戔 白苧一疋価給四兩八戔 白苧十七尺二兩三戔 合錢十七兩六戔怗下官廳 往本官同推後竟晷晤擔晩後還

1835-05-17 맑았다. 등륵수렴존호삼차하례대가단자를 고쳐 올리는데 이조와 순영에 대신 받을 자가 없다고 보고를 보냈다. 숙포 140척은 값으로 4냥 팔전을 주고, 황포 1(중품)은 값으로 55전을 주고, 백저 1필은 값으로 48전을 주었고, 백저 17척은 23전으로 합쳐 돈으로 176전을 관청에 첩하 하였다. 본관에 가서 함께 추고한 후 竟晷晤擔 늦은 후 돌아왔다.

 

1835-05-18 晴 到任狀上去書者面見十三日安書慰喜 弓矢及筒石魚四級來 京邸告目吏曹尺文及五月初朝報來 慶山居驛<>朴淂守或慮該縣之撗侵軍役立旨成給事許題 巡營畨馬徒以河宗孫定送事營吏私通來 義興倅答狀來花西權雅致和許書河兼送藥丸 營邸吏凉臺改補而來 舊水使沈漢永上京路文來

1835-05-18 맑았다. 도임장을 올렸다. 편지를 직접 보았는데 13일 보내온 편지가 위로가 되고 기쁘다. 궁시와 통석어 4급이 왔다. 경저 고목과 이조 자문 및 오월 초 조보가 왔다. 경산에 거하는 역민 박득수가 혹 해당 현의 군역 횡침을 우려하여 입지를 성급해줄 일에 제김을 허하였다. 순영 번마 일꾼은 하종손으로 정하여 보낼 일을 순영리가 사사롭게 통보해왔다. 순흥 사또의 답장이 왔다. 화서 권치화 어르신이 허서하고 겸하여 약환을 보내왔다. 영저리가 양대를 개보하러 왔다. 구 수사 심한영이 상경한다는 노문이 왔다.

 

1835-05-19 洒兩旋晴早乾非細夏也 慶州民朴允還馬価推給事呈訴題所謂金尙連叔侄並捉來以爲查推之地事

1835-05-19 주르륵 비가 오고 곧 맑아졌다. 경주민 박윤환이 환마가를 추급해줄일을 정소하였는데, 제김에 김상련의 숙질을 아울러 잡아와서 조사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1835-05-20 乍雨旋晴 沙里驛急走金奉大位土盡爲賣食不爲使役事 長吏文狀題聞甚驚 該位土盜賣與受者俱有當律嚴査推還次奉大漢卽爲捉上事 巡營畨馬徒以河宗孫起送 淸通驛位土盜賣還退事永川郡去營關謄來 故該驛監官河鳳彦爲探動靜次送之 東海仁路收布差使兩漢官廳來收愆期罪庭杖枷囚 安東柳來春爲其宗人柳復三頉役事呈訴 題已悉前題是在果豈可只憑其曾祖進發名字而遽頉三十餘年載在鐵業之役乎 爲其宗族者雖謂之羞恥渡淮爲枳 今已年久如此無益之訴不必更煩向事 別二洞洞任等手本 該洞橋梁雜役闕軍名下罰牟一斗式徵出事題 居是洞也頉避均赴之役者萬萬痛駭勞送宜有称寃 賞罰不可無施杜該弊之道 豈可置之等常乎 自該同一一抄出收捧是矣 罰牟段設更爲從略抄出以爲均平心分排之地事

1835-05-20 잠깐 비가 오고 곧 맑아졌다. 사리역 급주 김봉대가 위토를 다 팔아먹고 사역하지 않은 일의 장리 문장의 제김에 들으니 심히 경악스럽다. 해당 위토를 몰래 사고 받은 자는 모두 마땅한 법률로 엄치 조사하고 추환할 차로 큰놈은 즉 잡아 올릴 일이다.” 라 하였다. 순영 번마의 일꾼은 하종손으로 기송하였다. 청통역 위토를 몰래 판 것을 돌라 받을 일로 영천군에서 지난 영의 관등이 왔다. 그러므로 해당 역 감관 하봉언을 동정을 탐사할 차 보냈다. 동해와 인로 수포차사 양놈이 관청에 왔으니 잘못을 거두어 뜰에서 장을 치고 칼을 채워 가두어 놓았다. 안동 유래춘이 그 종인 유복삼을 탈급해줄 일로 정소하였는데, 제김에 말하길 이미 다 이전 제김에 이가 있다. 과연 어찌 단지 그 증조가 이름을 진발한 것을 빙고하여 그에 의거해 삼십 여년동안 지었던 철업의 역을 면해줄 수 있겠는가? 그 동족된 자가 비록 그를 수치라 하여도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된 것이다. 지금은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와 같은 무익한 소송으로 다시 번접하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별이동 동임 등의 수본에 해당 동 교량 잡역 의 군명을 빠트렸으니 벌로 일두 씩 징출해달라는 일에 제김하길 이 동에 거하면서 균부의 역을 피한것은 만만통해하니 마땅히 원통하다 칭할만 하니 상벌이 해당 폐해를 막는 도를 막지 않을 수 없다. 어째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해당 동으로부터 일일이 초출하여 거둘어 들임이 옳다. 罰牟段設更爲從略 간략하게 초출하여 균평하게 분배할 일이다.

 

1835-05-21 晴 舊水使入本邑故往見 水使坐馬以沙里貴德馬定送其便付家書三天 東海仁路兩差使枷囚中一日內備納三十餘兩鞭箠之效可謂(?)連也 邑內韓生員來見醫術頗詳云 絧巾一立浮來品極精緻価給一兩三戔

1835-05-21 맑았다. 구 수사가 본읍이 들어왔기 때문에 가서 뵈었다. 수사 좌마로 사리 귀덕의 말을 정하여 보냈고, 그 편에 가서를 세 번째로 보냈다. 동해와 인로 양 차사를 칼을 씌워 가두어 놓은 중에 하루 안에 삼십여냥을 비납하니 채찍질한 표가가 가히 ?련하다 할만하다. 읍내 한생원이 와서 보았다. 의술이 자못 상세하다고 한다. 동건 1립이 우연히 왔는데 품질이 지극히 정치하다. 값으로 13전을 주었다.

 

1835-05-22 晴 從父主書來日前安稅 且聞京信之安慰喜 岳丈徃富貴寺申后還次 都兵房河吉運貿黃布次送永川塲 傳令朴興業出役外誅朮之弊不一其端杖河五十度枷囚 河吉運貿黃布十三疋生布一疋合価七十兩七戔 較平年太高云 淸通驛位土豫賣事報營矣 自巡營以無価還退之意嚴關永川郡 自該郡移文來到 而今年耕作姑付之於盜賣人處 使之移秋同盜賣畓每石落錢七兩式徵出於盜賣作者處出給該驛事甚稳便云云 故回移位土之私相賣買卽犯法外雖欲循其私情枉法容貸既是報營關決之事 自弊道今不可澖狹於其間一依營關據法還退俾杜後(?)恐合事宜云云 安(?)書來

1835-05-22 맑았다. 종조부님의 서신이 왔다. 일전에 편안하다고 하고 또한 서울에서 온 편지를 들으니 편안하고 위로되며 기쁘다. 악어르신이 부귀사에 가서 신시 후에 돌아왔다. 도병방 하길운을 황포를 살차 영천장에 보냈다. 사령 박흥업이 출역 외에 誅朮의 폐가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니었다. 하에게 곤장 50대를 치고 칼을 씌워 가두었다. 하길운이 황포 13, 생포 1필을 값으로 707전을 추고 사왔다. 평년과 비교하여 콩이 비싸다고 했다. 청통역 위토를 미리 판 일을 영게 보고하였다. 순영으로부터 값 없이 환퇴할 뜻을 엄히 영천군에 관하였다고 해당 읍으로부터 이문이 도래하였다. 금년 병작은 우선 도매인에게 붙이고 그로 하여금 추동의 도매한 답의 매 석락마다 돈 7냥씩을 옮겨 도매작자에게 내보내어 해당 역에게 출급할 일이 심히 편하했다고 운운하였다. 그러므로 이문을 다시 보내길 위토의 사사로이 서로 사고 판 것은 법외를 범한 것이니 비록 그 사사로운 정을 따라 법을 굽혀 용서하고자 하여도 이미 이는 영에 보고되어 판결이 난 일이니 폐해로부터 이제 그 사이에 하나라도 영의 권문에 의거하여 환퇴하여 막게 한 후에 (?)恐合 일에 澖狹할 수 없음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書來

 

1835-05-23 從父主前上書送莞席一立甘酱一斗陳酱一小(?)其便付家書四天 유수기(?)以筆筒樣造來価六戔而重則六兩五戔

1835-05-23 맑았다. 종조부 전상서에 완석 1립과 감장 1, 진장 1?을 보내고 그 편에 가서를 네 번째 보냈다. 유슈기 1좌를 필통으 모양으로 만들어 보냈다. 값은 6전이고 무거운 것은 65전이다.

 

1835-05-24 晴 出往前坪周看位畓申飭洑役 而田野龜坼目下甚遑急 本邑祈雨祭關文來當日設行云 牟還申飭關文來 淸通都長不遵官令罪發差捉來 巡幕上京馬回 見十五出家書 眞席十一立価十一兩五戔帖下官廳

1835-05-24 맑았다. 전평에 나가 위답을 두루 살펴보고 보역을 신칙하였으나 전야의 거북등처럼 갈라졌으니 목하 심히 황급해 보였다. 본읍 기우제 관문이 왔다. 당일 설행한다고 한다. 모환을 신칙하는 관문이 왔다. 청통도장이 관령을 준수하지 않은 죄로 뽑혀 잡혀왔다. 순막상경마가 돌아왔다. 15일 나온 가서를 보았다. 진석 11립을 값 115전을 치루고 관청에 첩하하였다.

 

1835-05-25 晴晩微雨 田野望霓之中頓覺神精豁 而猶來浥塵旋卽杲杲甚渴悶 靑松印信阪造自今十五始用關文來 淸通監官處以位土豫買漢裁名移秧者抄報事傳令

1835-05-25 맑고 늦게 조금 비가 내렸다. 전야의 바람이 무지개 가운데 갑자기 깨달아 정신이 활연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비가 너무 조금 와서 곧 밝아졌으니 심이 갈증나고 번민스럽다. 청송인신의 판조는 지금 15일부터 쓰기 시작하라는 관문이 왔다. 청통감관의 처소에 위토를 예매한 놈의 이름을 마름질하여 이앙한 자를 뽑아낼 것을 보고할 일로 전령하였다.

 

1835-05-26 自朝驟雨浥塵午後晴 阿火驛民金順三訴渠子大哲誤入爲僧今年爲十五歲 而布役之侵極爲疾痛事 題詳査年歲依例頉給毋亟呼寃之弊事

1835-05-26 아침부터 소나기가 내렸다. 조금 내려 오시 후에 개었다. 아화역민 김순삼이 자신의 아들 대철이 잘못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금년 15세가 되어 포역의 침횡이 지극하여 원통하게 된 일로 소송하였는데, 제김에 나이를 상세히 조사하여 예에 의거하여 탈급하여 지극한 원통한 폐가 없도록 하라.” 고 하였다.

 

1835-05-27 從父主書來簡紙二百幅周紙十軸貿來価爲五兩五戔七分 淸通都長文狀位畓豫買作者五六人耕先移秧云 題成冊捧上是在果營關邑飭之下有何頑惡之漢不待處分耕先移種殆差自己之物乎 滿滿痛痴<>等無嚴之民當有別敢懲治之道 而事仍以此由文移永川 往訪權寶城家申後還

1835-05-27 맑았다. 종조부님 편지가 왔다. 간지 200, 주지 10두루마리를 사왔다. 값은 557푼이었다. 통청도장문장에 위탑을 미리 사서 지은 자들 오육인이 먼저 이앙을 하였다하고 하였다. 제김에 성책하여 봉상하거니와 영의 관문과 읍의 신칙 아래 어떤 나쁜놈이 있어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씨를 이앙하여 자기의 물건을 위태롭고 어급하게 하는가? 만만통치한 이들 무엄한 백성들은 마땅히 별도의 징치의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일은 이런 연유로 인하여 영천에 이문하라.” 하였다. 권보성의 집에 방문하여 신시 후에 돌아왔다.

 

1835-05-28 本官留宋雅來訪 眞席一立貿入価一兩二戔 以瘙癢疾鹽湯洗浴

1835-05-28 맑았다. 본관에 머무르던 송 어르신이 내방하였다. 진석 1립을 사들인 값이 12전이다. 피부의 가려움병 때문에 소금탕에 세욕하였다.

 

1835-05-29 自曉大霈 有連注之意田野之喜不啻躍 而本官三次雩祀虐滅所感而然耶

1835-05-29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다. 연달아 비가 내리니 전야의 기쁨이 뛰어다닐 뿐만이 아니였다. 본관이 세차례 우사를 지내고 학정을 없앴으니 (하늘이) 감응하여 그런 것이다!

 

1835-05-30 從父主前上書付家書五天 散文差員姜奉事者本以安東人回還其家依路文卜馬各一給送其作免之端可發一笑 兵營軍官下來不卽告課自外給馬送之 故兵房吏四名決杖二十五度午後往本官晩還 安奇以籠三丁五馱借去不還事移文

1835-05-30 맑았다. 종조부 전장서에 가서를 다섯 번째로 붙였다. 산문차원 강봉사놈은 본래 안동인으로 집에 돌아가면서 노문에 의하여 복마 각 일급을 보냈는데, 그 면제의 단서를 만들었으니 가히 웃을만 하다. 병영 군관이 내려와서 즉시 고과하지 않았는데, 외급마부터 보냈다. 그러므로 병방리 네명을 장 25대를 치기로 결정하고 오시 후에 본관에 가서 늦게 돌아왔다. 안기역에 바구니 35태를 가져가 돌아오지 않은 일로 이문하였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대학원 조선후기사 전공

 박사과정 박범, 석사과장 박세연, 이가영 번역, 박범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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