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료

종사일기 9월

同黎 2013. 3. 3. 04:03

1835-09-01 晴 服童便 賀禮而還点考 待分付令本驛馬位畓一百二十田丁執字

1835-09-01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하례하고 돌아와 점고했다. 本驛馬位畓 120 田丁執字待分付令했다.

 

1835-09-02 晴 服童便 營便見玄月十三日出家書二玄畓 審藥許六味材料一劑半求請矣 來到而品劣價爲五兩七戔云 使令朴日彦楊聖岳䣴打罪並嚴杖枷囚

1835-09-02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영편에 지난달 13일에 나온 22번째 집편지의 답장을 보았다. 審藥許六味材料一劑半求請矣 도착했으나 품질이 열악하여 가격이 57전이라고 한다. 사령 박일언과 양성악이 술주정에 구타한 죄로 아울로 엄히 장을 치고 칼을 씌어 가두었다.

 

1835-09-03 晴 服童便 喪餘滯遠未參感難抑 牛谷馬夫方物載持上京便付家書九玄 甲峴便付十玄

1835-09-03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喪餘滯遠未參感難抑 우곡 마부가 방물을 실어가는 상경편에 29번째 집편지를 부쳤다. 갑현편에 30번째 편지를 부쳤다.

 

1835-09-04 晴 服童便 巡歷時\桐華替把與省峴歸正次河宗孫起送巡營 從父主前上書

1835-09-04

 

1835-09-05 晴 服童便 花紋席匠在新村面云 故招致本邑工庫子出給席子七立着紋以來之矣分付

1835-09-05

 

1835-09-06 晴服童便上京(?)軍及驅從權千伊回見去晦日出家書四五玄答衣服封醬鹽等缸來朝紙自閏六月至八月晦合十六度下來本官操練初点以今日出令矣外村將卒四百餘名多有不及者不得設場把摠(?)官三人捉入決棍五度義城人尹生受來淸洞尹參判設書書筒坼見則以驛人頉役事(?)托而事難奉副矣本倅答來

1835-09-06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상경한 복토군과 구종 권천이가 돌아와 보았다. 지난 그믐날 나온 가서 사, 오현의 답장과 의복 장과 소금등의 항아리가 왔다. 6월부터 팔월에 이르는 조보 도합 16개가 내려왔다. 본관의 조련 처음 점고가 금일 영을 내렸다. 외촌의 장졸 사백여명이 이르지 못한 자가 많이 있어 장을 설치하지 못하여서 파총과 남관 삼인을 잡아 들여 곤장 5대를 때렸다. 의성 사람 윤생수가 왔으니 청동의 윤참판이 편지를 썼다. 편지통을 열러 보니 즉 역인의 탈역해줄 일을 번거롭게 부탁하는 것이었으나 일이 돕기 어렵다. 본관 수령의 답서가 왔다.

 

1835-09-07 晴服童便官廳色所逋百十兩則斥責其家舍(?)物及渠矣四寸畓四斗落先爲捧上其零錢五十兩分族出秩廻營玄河宗孫回承從父主下答悅口子湯二坐借來其便見去月卄四日出家書玄三答桐華替把事不得如意

1835-09-07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관청 색소의 포흠 110냥은 즉 그 가사와 장물과 그의 사촌 논 사두락에 책임을 지워 우선 봉상하고, 남은 돈 오십냥은 그 종족에게 나누어 내게 하였다. 회영의 현하 종손이 돌아와 종부님의 답서를 올리고 열구자탕 2좌를 빌려 보냈으며 그 편에 지난달 24일 나와 가서 현 3의 답을 보았다. 동화역의 체파하는 일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35-09-08 晴服童便微有頭疼積氣頻侵故羘汴自五六日前空心腹義興倅書來同推以明日約會故以病赴進只文書交踏之意答送

1835-09-08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조금 두통이 있었다. 체증이 자주 침범하였기 때문에 장판을 오육일 전부터 공복에 복용하였다. 의흥 수령의 편지가 왔다. 함께 내일 약속한 모임에 나가기로 했다. 고로 병 때문에 갈수 없고 단지 문서로 교류한다는 뜻으로 답을 보냈다.

 

1835-09-09 晴服童便入居木伐錢四百七十八兩三戔八分發送色吏河大成付家書一黃及物種去(?)十五斤岳丈夏衣十一件錢十兩醬肉一缸片脯卄脠塩脯七十張黃布二疋常木二疋細木十八尺斑布五尺祫袴一件眞油三升脯三貼南草三斤淸洞尹參判宅燒酒五鐥大脯三貼廣魚二尾筒紙百幅周紙五幅尹設書宅燒酒三鐥脯二貼全鰒一貼紅抪一貼金泉都會掌試都事上京馬不及以金泉馬替把上去而贳錢六兩徵送使令朴日彦放囚除汰官廳色吏放囚菊花煎点心而客(?)佳辰無聊感心

1835-09-09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입거목벌전 47838푼을 색리 하대성에게 발송하였다. 가서 1황과 물종 거릉 15, 장인어른 여름 옷 11, 10, 장육 1항아리, 편포 20, 염포 70, 황포 2, 상목 2, 세목 18, 반포 5, 합고 1, 진유 3, 3, 남초 3근을 보냈다. 청동 윤참판댁. 소주 5, 대포 3, 광어 2, 통지 100, 주지 5윤설서댁. 소주 3, 2, 전복 1, 홍포 1김천도회의 장시도사 상경마가 이르지 않아 김천말로써 체파하여 올라가고, 세전 육냥을 징발해 보냈다. 국화를 졸여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손님이 좋은 명절에 오지 않으니? 무료감이 심하다.

 

1835-09-10 晴服童便從父主前上書付家書二黃永川松掘罪人李得仁定配長淵依?文定將校押送義興縣義興同推以文書去來

1835-09-10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종부주 전상서에 가서 2황을 부쳤다. 영촌 송굴의 죄인 이득인을 장연에 정배하였다. ?문에 의정하여 장교를 정해 의흥현으로 압송하였다. 의흥과 함께 추고하여 문서를 거래하였다.

 

1835-09-11 晴服童便會計木周衣一件製針工五戔五分給花玉家

1835-09-11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회계목으로 두루마기 1건을 만들었다. 침공비로 55푼을 화옥가에게 주었다.

 

1835-09-12 晴服童便從父主下答來巡歷時所用芹菜大?黃栗及砂匙得來

1835-09-12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종부주 하답서가 왔다. 순력시 소용되는 미나리나물, ?, 황율과 사시를 얻어 왔다.

 

1835-09-13 晴服童便義城送隷求砂匙及果實蓮菜盤床一件造來合九斤十二兩而價爲二十兩四戔六分(鐵價每斤一兩六戔工價每斤五戔合每斤二兩一戔式)

1835-09-13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의성 수령이 하인을 보내 사시와 과실을 구했다. 연채 반상 1건을 만들어 왔다. 도합 912냥이고 값은 2046푼이 되었다.(철 값이 매근 16전이며 공가가 매근 5전으로 합하면 매근 21전씩이다.)

 

1835-09-14 晴服童便本邑灾成冊合灾七十餘負

1835-09-14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본읍의 재실을 성책하였다. 재실을 합하여 70여부였다.

 

1835-09-15 賀禮進參早飯後領變人馬發義興回十里申前入抵本倅爲?候巡部往義城云止宿于將廳下處

1835-09-15 맑았다. 하례 진참하고 조반 후 영변인마가 출발했다. 의흥 수령이 돌아왔는데 신시 전에 십리 아래 들어왔다. 본관 수령은 ?후가 되어 순부가 갔다. 의성 수령이 말하기 장청 하처에서 머물러 묵었다고 한다.

 

1835-09-16 晴本倅入夜後還官傳喝故入見欣叙阻懐少項巡部行次入邑与本倅祇迎指客舍中門外仍呈公狀入謁後往見部來慕賓安奇丈扶馬差員來倥(?)(?)奉旋別悵然飯後行次離發自此長水人馬替把陪後行三十里申峴日已昏矣 自新寧縣炬化預爲等待火光十里弥望可謂壯觀 初更時立本邑此時邑驛事務兼察(?)精眩亂善山倅南進和雲山倅馳進是夜以湯鍋子如于茶?自本(?)偹進于使家第中亦然

1835-09-16 맑았다. 본읍 수령이 밤에 들어온 후에 관으로 돌아갔다고 전갈하였으므로 들어가 보니 기쁘고 다행이며 ??. 순부 행차에 읍에 들어가 본관 수령과 함께 기영하고 객사 중문 밖을 가리켜 공의 문장을 올리고 들어가 알현한 후에 部來慕賓?? 안기장부마 차원이 왔다. ?한 중에 ?봉하여 이별하니 슬프다. 식사 후에 행차를 출발하여 여기부터 장수인마를 체파한 후 삼십리를 갔다. 신현에 이르니 해가 이미 어두워졌다. 신령현부터 횃불을 미리 밝혀 기대리고 있어 불빛이 십리에 두루 보이니 가히 장관이라 할만하다. 초경에 본읍에 들어가 차때 읍역의 사무와 신정을 살폈는데 현란하였다. 선산 수령이 남으로 왔고, 운산 수령이 말을 달려 왔다.? 이날 밤 탕과자로 차와 같이 ? ?으로부터 사가에 갖추어 올리게 했는데? 또한 그러했다.

 

1835-09-17 晴陪巡入銀海寺中火雲山支待河陽永川倅會飯后歷見雲浮菴仍以僧肩藍輿行山路四十里入桐華寺日已昏大邱判官曺錫支()待次來到

1835-09-17 맑았다. 순사를 배행하여 은해사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운산이 지대하고 하양과 영천 수령이 모였다. 식사 후에 차례로 운부암을 보았고 이에 승려의 어깨 남녀를 타고 산로 사십리를 가서 동화사에 들어갔을 때 해가 이미 어두워졌다. 대구판관 조석지()이 기대리다가 차례로 도착해왔다.

 

1835-09-18 晴遊覽後行四十里還營次謁從父主歷見判官幇便見家書仍付家書

1835-09-18 맑았다. 유람후 사십리를 가서 영에 돌아왔다. 차례로 종부주를 뵙고 차례로 판관 방자(?) 편에 가서를 보았다. 이에 가서를 보냈다.

 

1835-09-19 晴飯後共諸守令同爲入謁辞退歷別幕中發行五十里河陽止宿本倅所托鍮小燭臺一座生鰒十四箇入送額?之也

1835-09-19 맑았다. 식사후 여러 수령과 함께 들어가 뵙고 물러난다 말한고 차례로 작별하였다. 막중에서 발행하여 오십리를 가서 하양에 이르러 숙박하였다. 본관 수령이 맡긴 유기 소촛대 1좌와 생복 14개를 들어보냈다. ??

 

1835-09-20 晴早發行四十里申前還官別使赴燕馬夫色更回見家書木周衣封來

1835-09-20 맑았다. 일찍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신시 전에 관에 돌아왔다. 별사부연마부색이 다시 돌아와 가서와 무명 두루마기가 봉하여 온 것을 보았다.

 

1835-09-21 晴服童便曠餘公務(?)集苦悶

1835-09-21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빈 사이에 공무가 엄청 쌓였으니 고달프고 민망하다.

 

1835-09-22 晴服童便道軍官一員上京馬二匹起送關來以牛谷山驛馬定送而忙來付書

1835-09-22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도 군관 1원 상경마 2필을 기송하였다. 관문이 와서 우곡산역말로 정하여 바쁘게 와서 문서를 보냈다.

 

1835-09-23 晴服童便慈仁下吏(?)養坤依營關加刑一次後還囚該驛獄新寧倉色吏五名並枷囚本縣獄後馳報義城義興倅書來

1835-09-23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자인의 하리 석양곤을 영관에 의거하여 형을 1차 가한 후 해역의 옥에 돌려 가두었다. 신녕 창색리 5명을 아울러 본현 옥에 칼을 씌워 가둔 후에 치보하였다.의성, 의흥 수령의 편지가 왔다.

 

1835-09-24 晴服童便戶幕許付書送川連紙一軸韻考印來次有約本邑灾八十餘負還起以四結報狀矣 無弊磨勘而來巡營主人告目來綱纓三巨里小烟杯一箇來永川方生黃布一疋貿來價五兩二戔錐太高旣是所托故不可還退仍爲買置

1835-09-24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호막에 허부서를 보냈다. 천련지 1축과 운고인이 來次有約?? 본읍 재실 80여부를 환기하여 사결로서 보장하였다. 폐단 없이 마감하여 왔다. 순영주인 고목이 왔다. 갓끝 삼거리, 소연배 1개가 왔다. 영천방에서 자란 황포 1필을 사왔다. 값으로 52전 주었다. 錐太高旣是所托 그리므로 환퇴하지 못하고 인하여 팔아 두었다.

 

1835-09-25 晴服童便

1835-09-25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1835-09-26 晴服童便本邑上京納便付三黃家書

1835-09-26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본읍 상경납편에 가서 3황을 부쳤다.

 

1835-09-27 晴服童便

1835-09-27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1835-09-28 晴服童便廻營便付家書四黃

1835-09-28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영에 돌아가는 편에 가서 4황을 부쳤다.

 

1835-09-29 晴服童便牛谷馬夫回見家書六七八九玄答

1835-09-29 맑았다. 아이 오줌을 복용했다. 우곡역 마부가 돌아와 가서 6, 7, 8, 9현의 답을 보았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대학원 조선후기사 전공

 박사과정 박범, 석사과장 박세연, 이가영 번역, 박범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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