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마르티나 도이힐러, 2013,『한국의 유교화 과정』, 너머북스

同黎 2014. 9. 22. 18:36

마르티나 도이힐러, 2013, 「3장 종법과 계승문제, 그리고 제사」,

『한국의 유교화 과정』, 너머북스 요약 발제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전공

박사2 박세연

한국사회에서 유교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시작은 종법을 사회에 이식해 출계집단 안에서 부계친 의식을 활성화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제사가 강조되었다. 제사는 종법을 의례적으로 실천하여 부계 출계집단으로서의 정체성과 체계를 규정하는 것으로, 제사 안에서의 서열의 위치는 개인의 권리와 정치에서의 위치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신유학의 사회관

신유학의 사회정치적 이론은 조상 중심의 부계친 출계집단을 사회 기본요소로 삼고 있었으며, 이 출계집단은 사회를 구축하는 동시에 정치가 침해할 수 없는 연속성을 보장받는다. 송의 신유학자들은 정치방법론에서 종법을 핵심 용어로 사용하며, 집안에서의 종법이 지켜질 때 국가의 기초가 확립되다고 생각했다. 즉 출계집단에서의 서열 정비가 사회적·정치적 안정과 직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희와 정이를 비롯한 신유학자들의 이상향은 『예기』를 비롯한 고대 중국의 봉건제였고 주자는 이것을 『주자가례』의 기본 개념으로 삼았다. 이에 따르면 오직 적장자만이 아버지를 계승하여 大宗子가 될 수 있었고, 그 동생들은 하위 출계집단인 소종을 세웠다. 소종은 邇宗·祖宗·曾祖宗·高祖宗의 네 집단이었고 이들과 대종이 합쳐져 五宗을 구성하였다. 이것은 마치 나무가 끊임없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과 같았다.

주희는 이 오종을 중심으로 한 제사 의례의 운용에 자신의 사회철학을 기반하였다. 의례를 통한 조상과의 친교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기초가 되었다. 제사를 통해 같은 氣를 공유하는 조상과 자손은 결합되었다. 사회의 기초를 주성하는 부계 출계집단은 제사를 통해 일체감을 느끼고 조직화되어서 바깥 세계를 향한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대 신유학자들의 관념은 고대 중국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당대에도 성공하지 못한 매우 이상적인 체계였다.


제사의 도입

고려 말부터 조준 등의 유학자들은 유교식 제사를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390년 4품 이상관은 3대를, 6품 이상관은 2대를, 그 이하와 서인은 1대를 봉사하도록 하도록 하는 것이 ‘士大夫家祭儀’라는 이름으로 정해지고 그 다음해에는 家廟를 세울 것이 결정되었지만, 적장자 외의 동생·사촌·육촌은 각기 집에 부조의 위패를 따로 세우도록 하여 집단적 조상 봉사는 없었고 세워진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 개국 이후 조준은 『경제육전』에 이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유교식 제사를 채택하는 것은 근본적인 사회 변화의 촉매자로 작용했기 때문에 그 변화는 사회적·종교적 전통에 맞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이루어졌다. 태종 이후 유교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가묘 건립을 강제하였지만 현실적·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여 결국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가묘제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종법 개념의 초기 형태

조준은 『주자가례』에 규정된 4대 봉사의 규정을 대신해 고려의 위계적 구조를 참작한 관직 보유 여부에 따라서 봉사 의무를 규정하였다. 이것은 후일 종법 개념 자체에 위험이 되었다. 세종 10년 형제의 서열과 품계가 어긋날 경우 형제들의 제사 의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는 대종과 소종을 구분하는 것과 곧바로 연결되는 문제였다. 결국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형의 봉사권을 동생이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결정하였다. 또다른 문제는 봉사자가 아버지와 같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그만큼의 봉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예조는 삼촌이나 동생이 높은 지위에 있다면 여기에 맞추어 봉사하지만 제사는 형의 집에서 지내도록 결정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관직과 관계없이 4대 봉사를 허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변계량은 조종의 법을 손대서는 안되며, 관직 없는 이에게 4대 봉사는 과도한 부담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도 이를 지지했다. 세종은 봉사 대수 규정의 혁파가 상하급 관리들의 경계를 흐리게 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4대 봉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초기의 제사 문제는 지위 의식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종 시대에 대신들이 종자만이 제사권을 가지고 있다는 종법을 옹호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승중과 제사

종법은 종자가 적장자가 없이 죽었을 경우에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고, 조선 초기의 가장 큰 문제도 이것이었다. 적장자가 없을 경우 계승은 심지어 갈등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의 경우 승중은 적장가가 없을 경우 형제 상속으로 규정되었다. 세종대에 이 규정은 면밀히 조정되어 직계 후계자가 없을 경우 조카를 후계자로 삼되, 조카가 맏아들일 경우에는 입양을 허용치 않았으며, 동생들은 후계자격을 박탈당했다. 立後라는 단어가 이때 처음 사용되어, 입후자는 호구의 호주·직함·재산권과 제사 의무까지도 동시에 양도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자의 위치와 입후자의 제사 의무 문제를 정확히 규정짓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조말생의 경우 적손이 불구자라는 이유로 셋째아들을 후사로 삼았다. 예조에서는 동생은 사당을 세울 자격이 없으며 형의 제사를 도울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세종은 융통성을 발휘해 조말생의 뜻을 인정해주었다. 이처럼 종법상 奪宗의 위험이 존재했지만 국가는 때때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고 아직도 계승문제는 완전히 통제되지 않았다.

초기 법전에 기록된 ‘봉사’ 규정은 부계 자손 중 최연장자를 뽑아 조상에 봉사할 봉사자로 뽑는 규정으로 고려의 형제 계승 전통이 지속되는 것이었다. ‘봉사’ 규정은 제사 의무를 적장자, 적장자의 아들, 지자, 지자의 아들, 첩자의 순으로 계승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종법상의 입후 규정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경국대전』의 입후 규정은 장자상속제를 토입하여 지자를 희생하더라도 본가를 영속화하도록 규정하였다. 방계 구도를 강조하는 ‘봉사’규정은 종법을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사회적 환경을 무시할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결국 타협의 결과로 『경국대전』에 두 규정이 모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 새로 수록된 규정은 초기 법전의 ‘봉사’규정과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후계자 지명은 계속 문제로 남아 있었다. 관리가 자의적으로 봉사자를 지명하는 문제가 계속하여 생긴 것이다. 성종대에 일어났던 김연지와 신승민의 사건은 좀 더 종법질서에 가까운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자의적으로 지명된 봉사자보다 적장자가 우봉사자격에서 우위를 지녔으며, 입후한 경우일지라도 종법의 질서가 자의적 지명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봉사와 입후 자격의 괴리는 계속되었다. 입후는 한사람을 위한 것이었고, 봉사는 조상을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입후가 되더라도 친손이 아닌 이상 입후자는 양부모만을 봉사할 수 있고, 그 이상의 조상에 대한 봉사는 직계 혈족이 담당하도록 법전에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가능한 가까운 친족 중에서 입후자를 선택할 것이 권장되었다.

입후는 일시적으로 한사람의 후계를 잇는 방편으로 간주되었고, 실제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 입후자의 자격은 끝이 나고 둘째아들의 지위로 실추되었다. 이는 『명률』의 내용을 준용한 것으로 입후자와 실자 사이의 싸움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16세기 이이와 같은 유학자들이 양부모와 자녀간이라도 부모간의 의리를 다음대로 끊는 것은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걱정하였고 최명길이 계후자를 적장자로 선택함으로써 실자가 태어나더라도 계후자가 적장자의 자격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계승 관행에 대한 인식이 고양되었다는 것은 종법을 깊이 이해하였으며, 유교 문헌에 친숙해졌다는 증거였다. 16세기 초부터 관리들의 도더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 ‘宗’의 개념과 의미에 관심을 보였고, 따라서 계승법이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서자와 여성에게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제사와 서얼

조선 초기에는 서자가 먼 친척이나 조카보다 후사로서 선호되었다. 봉사자가 된 서자는 사회적·경제적으로 혜택을 누렸고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의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출신이 한미한 서자가 봉사를 맡는 것에 대하여 차자가 반기를 드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결국 세종대 양첩자는 승중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경국대전』의 입후·봉사규정에는 모두 서자가 언급되어 있었다. 입후는 첩자의 아들이 있다면 허용되지 않았지만 봉사규정은 적자만을 인정하고 첩자의 경우는 인정하지 않았다.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조카가 있다면 서자가 후사를 잇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16세기 『대전후속록』에서 서자는 완전히 계승 후보자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이가 자신의 서자를 봉사자로 삼는 등 제사를 계승하는 데에서는 서자가 법적인 하자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서자의 봉사도 제한되어 『속대전』에서는 서자가 더 이상 봉사자로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서자 계승이 본가가 단절되면 종통이 지가로 옳겨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귀천을 무시하거나 폐기하여 사회 이동을 불러올 위험성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제사와 여성

여성은 유교사회에서 종족 집단 구성원의 권리를 전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조선의 법은 첩을 완전히 의례에서 배제시키지만 처는 제한적으로나마 일정한 몫을 담당하게 하였고, 위패 역시 사당에 봉안될 수 있었다.

여성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문제는 우선 후처를 사당에 봉안하는 일이었다. 계모는 살아 있는 동안 부인의 특권을 그대로 누렸지만 문제는 죽어서였다. 조선은 계모를 친모와 똑같이 대접하고 위패를 남편·첫부인과 함께 나란히 병향하도록 하였다. 적장자 역시 계모의 상에는 친모와 같이 3년상을 치루도록 규정하였다. 적장자는 계모를 친모와 같이 모심으로써 장남으로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계모의 아들들을 동생으로 삼아 가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딸과 며느리는 『경국대전』에서 봉사와 입후의 대상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그러나 딸은 고려시대부터 지속된 처가 거주제에 의해 여전히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고 가사 결정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며느리의 경우 이와 같은 영향력은 없었지만 아들 없이 죽은 장자의 부인, 즉 冢婦는 두 가지 커다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봉사 자격을 물려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은 남편의 후사를 지명하는 권리였다. 또한 총부는 봉사조로 때어 놓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다.

이러한 총부의 특권은 출계집단 구성원 사이에 긴장관계를 가져왔다. 총부가 종가의 제산을 탕진하거나, 죽은 남편의 후사 지명을 미루는 경우 문제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총부가 남편의 입후자로 아래 동생의 아들이 아닌 먼 친척의 아들을 선택하는 경우였다. 총부의 시동생이 형의 봉사를 거부하며 입후자의 결정을 강요하면 총부는 관습적 권리를 주장하며 친족 집단 안에서의 적통 계승과 재산을 위태롭게 할 만한 결정을 내렸다.

결국 중종은 입후자의 범위를 동종의 근속으로 좁히고 총부의 선택권에 한계를 설정했다. 명종대에는 총부의 봉사권이 종법 질서를 방해하는 관행으로 여겨져, 시부모가 살아 있는 한 총부의 조상 봉사를 제한하였다. 총부는 계속해서 ‘올바른’ 선택을 강요받았고 봉사조의 토지와 가옥을 매매 할 수 없도록 경제적 특권도 제한받았다. 결국 『속대전』에서는 총부의 소멸을 확정했다.


외손의 제사 계승 관행

제사의 계승이 비부계 자손, 즉 외손에게 넘어간다면 적손이 소멸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왕조 전반기에는 외손의 계승이 널리 행해졌다. 딸만 있는 집에서는 종종 사위와 함께 살았고 그 사위가 처가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육전』에는 俗儀에 따라 아들 없는 외조부모의 제사를 외손에게 맡기게 하였다. 세종대 공신 외손의 공신전 상속이 금지되고, 외손의 봉사을 금지하였지만 16세기까지 외손봉사의 관행은 계속되었다. 이황이 외손 봉사를 비판하였지만 임시방편으로 외조의 위패를 별도의 방을 마련해 지낼 것을 인정할 정도였다.


족보, 출계집단의 도해

족보는 부계 친계집단의 형성 과정에서 자기의 친족을 인식하고 친애하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5세기의 족보는 당시 양변적 사회 현실을 분명히 따르고 있었다. 초기 족보는 시조는 신라나 고려 초기의 공신에서 찾고 있었고 그 사이에 공백이 있었다. 조선 전기 족보 편찬자들은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16세기로 가면서 종법 질서가 족보에 반영되면서 직계와 방계, 적손과 서손을 구분하여 친족을 구조화하였다. 17세기에는 친손의 위치와 임무에 대한 인식이 늘어나면서 외손들을 기록해야 하는가에 대한 딜레마가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부계를 강조하며 외손 기재를 줄이는 방식으로 족보가 정리되었다. 더불어 아들과 딸, 적손과 서손은 출생 순서가 아니라 성별·위계에 따라 족보에 기재되었다. 이렇듯 족보 편찬을 통해 족보가 출계집단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의식의 표현인 동시에 출계집단의 발전과 내적 조직화를 이끄는 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족보는 정체성과 연대감을 고양하는 징표로써 외부 세계와 출계집단을 경계지었다.


봉사자의 경제적 지위

법적으로 인정된 출계자는 종가를 받았고, 봉사조의 전택과 노비를 받는 특권을 지녔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종법과 봉사 관념이 충분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기 위한 토지는 따로 조성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특별히 아끼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으며, 가족 성원이 봉사자에게 상속분을 내놓지 않기도 하였다. 형제자매의 윤회봉사는 봉사자의 특혜는 누구나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고려한 동시에 봉사에 대한 부담을 나누려는 의도도 반영된 것이었다.

『경국대전』은 봉사자의 경제적 지위를 처음으로 완전히 기록하여, 봉사자가 사당을 포함한 가옥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형제자매에 비해 부모 소유의 노비의 1/5를 더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였다. 토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법은 조상 봉사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인정하여 승중자에게 보상을 하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봉사 재산은 상속문서의 봉사조로 따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봉사자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하여 윤회 봉공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상 의례의 제도적 측면

고려 후기 이후 사당 건립은 유교 의례 신봉의 척도였다. 이상적이라면 사당을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야 했지만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대부들이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무리였고, 때로는 집 안의 정결한 방을 하나 마련하는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주자가례』에 따라 사대부들은 각 절기 중간 달의 첫날에 시제를 지내고 기일에 기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계절 봉사 대신 단오와 추석 같은 속절에 맞춘 제사가 더 많이 치루어졌다.

봉사의 주제자는 적장자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양변적 관행에 기인하여 딸과 아들들 간의 윤회 봉사가 있었고 이것이 예학자들로부터 인정받기도 하였다. 봉사자만이 제사를 책임진다면 형제들이 제사에 무관심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경국대전』의 봉사조에는 관직에 따라 3대에서 1대를 봉사할 것을 규정했지만 이는 4대를 봉사하는 의례 규정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례를 능숙하게 처리하는데 사로잡힌 일부 유학자들은 왕조의 법을 바꾸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3대 봉사를 지켰으나 조선후기에는 4대 봉사가 관행이 되었다.


예학과 예서

『주자가례』는 가장 권위있는 예서로 존중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짧고 간결했기 때문에 권근은 『상절가례』를 지어 부총하였고, 이언적은 『봉선잡의』를 지었다. 사대부를 위한 최소한의 의례지침은 『국조오례의』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에 부계친 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의례를 바르게 집행하는 것은 지배 엘리트의 핵심 관심사가 되었다. 때문에 17세기에는 『주자가례』를 기본 텍스트로 한 수 많은 예서들이 편찬되었다. 명의 구준이 편차한 『가례의절』은 조선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김장생은 『가례집람』을 지어 『주자가례』의 내용을 해석하였다. 18세기에 나온 이재는 『사례편람』은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된 텍스트였다.

의례는 중국의 것이 토재가 되었지만 한국의 관습을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국과 한국의 규범의 괴리가 상당하였고, 김장생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의례문해』를 지었다. 이 밖에 박세채의 『남계예설』, 윤증의 『명재의례문답』, 신의경의 『상례비요』 등이 편찬되었다. 유교 의례에 대한 방대한 저작은 지배 엘리트들이 의례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며, 이는 지배 엘리트의 특징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조선 후기에 가서는 이것이 대중의 의례로 여과되어 평민도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조상 의례의 종교적 측면

신유학 이전에 한국에는 불교와 무속에 바탕한 민중의 신앙과 의례가 남아잇었다. 조선 초기에 유교는 아직 이들을 대신할만한 만족할만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조상에 대한 유교식 의례는 효라는 개념을 통해 강조되었다. 제사의 주제자는 효자여야 했으며 동시에 자격을 완적히 갖춘 구성원, 즉 저가여야 했다. 조상을 기쁘게 하려면 도덕적·사회적으로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장자 중심의 제사 정착

종법의 특징인 장자의 봉사 계승 관행이 한국 사회에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입법을 여러 단계 거쳐야만 했다. 이는 느리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현저한 내적 논리와 역동성을 보여준다. 제사는 사회변화를 통제하고 장악하는 이상적 수단으로써 장자상속은 사당 봉사를 통해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전기의 계승과 관련된 주요 입법사안을 살펴보면 먼저 부계 조상에 대한 장자의 특별한 위치를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에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자손을 적자와 첩자로 구분하였고, 적장자의 지위를 동생들 위에 올림으로써 적장자가 포함된 집단들 사이에 비동등성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적장자의 후사가 없을 시에 문제에 대해서는 입후와 봉사의 두 가지 모순된 규정을 두어 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지가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본가를 지킨다는 원칙이 통과되었고, 장자는 아버지의 후사로써, 또 조상 봉사의 주제자로서 특권을 지니게 되었다. 장자는 선조들의 유일한 후사로 후손을 대신해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를 행하는 정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17세기에 완성되었다.


간단한 논평


1. 조선초기 이른바 ‘속의’ 내시 습속을 인정했던 국가의 결정이 16~17세기 뒤집어져 종법 질서를 우선시하는 분위기로 변한 것을 ‘유교화의 진전’이라는 명제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생산방식의 변화와 같은 혈연 공동체의 경제적 문제를 통해 설명할 수는 없을까?

2. 조선이 장자 중심의 사회구조라고는 하지만 일본과 같이 차자 이하의 동생들이 장자에 완전히 복속되는 관계는 아니었고, 오히려 소종을 만들어 대종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질서를 만드는 방식을 계속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성씨의 지파를 형성하였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장자 중심의 종법질서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 내지 대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을 획일적인 장자 중심의 사회로 보는 것을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