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패멀라 크로슬리, 2013, 『만주족의 역사』, 돌베개

同黎 2014. 3. 21. 22:03

패멀라 크로슬리, 2013, 『만주족의 역사』, 돌베개

한국사학과 박사1 박세연


일반적으로 淸과 淸을 건설한 만주족은 입관 이후 한족의 문화에 융화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淸의 황제들은 전통적인 중국의 황제들을 계승한 존재로 여겨졌고, 청조는 명조와 함께 중국의 근세를 구성하는 한 왕조로 오랫동안 취급되어왔다. 이러한 인식은 淸을 멸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서양제국의 오리엔탈리즘과 근대 중국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가 淸代史 연구의 기저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淸이 중국을 넘어 수많은 민족을 통합해 제국을 운영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 주목해 청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기존의 주장에 반대하고 청과 만주족의 황제들을 재평가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지나치게 만주족의 정체성·민족성에 주목하고 이를 만주족 특유의 혁신성이나 활력으로 평가하면서 만주족을 고유한 그 무엇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패멀라 크로슬리는 기본적으로 淸을 새롭게 보는 신청사 연구의 흐름과 함께하면서도 만주족의 고유성이나 민족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전통적인 만주족의 문화나 정체성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모두 1630년대 청이 제국으로서 건설되면서 동시에 창조된 것이었다. 즉 청조가 쇠퇴하는 18세기 후반 이후 만주족 혹은 기인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은 국가를 통해 제도화되고 정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제도는 바로 팔기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군기인은 한족을 포함해 다양한 민족적·지역적 출신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대가 끝날 때까지 다른 기인들과 같은 정체성을 유지했다.

만주족의 정체성은 국가의 목표와 함께 크게 변화하였다. 누르하치의 후금국은 정복을 꿈꾸는 제국이 아니었다.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 사이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공동통치라는 여진족 본래의 정치형태를 그대로 유지시켜나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홍타이지 이후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 시대의 지역 정권을 넘어 명을 대신할 제국을 꿈꾸었다. 때문에 그는 명의 황제체제와 관료제도를 받아들였으며 공동통치의 물적 기반이었던 팔기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진이라는 이름 대신 만주족이라는 이름을 채택하였다. 이후 청의 황제들은 황제권과 제국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여러 문화를 자기표현 방식에 포함시켰다.

만주족의 정체성은 외부의 충격이나 국가의 위기와 함께 강화되었다. 새로운 제국인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만난 청은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고취되었고, 만주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유교의 전통적 중화주의를 부정하고 불교의 전륜성왕을 차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했던 건륭제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건륭제는 기인들의 군사뿐만 아니라 관료로도 성장시키겠다는 순치·강희제의 이상을 포기하고 기인들의 군사적 임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변화는 더 이상 늘어난 기인 전체를 무작정 먹여 살릴 수 없는 경제적 문제이기도 했는데 때문에 기인은 팔기만주 위주로 점차 축소되어갔다.

제국의 쇠퇴는 번영의 최정점과 동시에 찾아왔다. 그것은 건륭제의 만주족 정체성 프로젝트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농업의 발전으로 늘어난 인구를 제국은 더 이상 책임질 수 없었다. 또한 기인과 한족 관료 사이의 갈등은 제국의 중앙정부를 무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의 관리들은 더 이상 중앙정부가 아니라 향신 같은 지방의 자체적 지배층과 협력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율적 경향은 서양 제국의 침략과 이로 인한 배상금으로 중앙정부의 재정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을 때 강화되었고 태평천국운동을 만났을 때 증명되어 결국 제국의 분리라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어떤 시대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보통 그 시대와 사랑에 빠지기 마련이다. 부정적인 면모 보다는 긍정적인 면모를 더 강조하고 보수성보다는 혁신성을 더 드러내주고 싶다. 특히 그 시대가 실제보다 과소평가되었던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전공시대에 대한 사랑은 때로는 역사적 사실과 의의를 과정하거나 왜곡하는 결과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비교적 냉정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淸을 바라보며 그 탄생에서 절정, 그리고 종말에 이르는 시기까지는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만주족의 정체성을 국가의 제도·정책과 연관된 흐름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은 이 책이 여타 연구서와 마찬가지로 시간적 흐름을 채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책과 차별성을 가지게 해준다. 만주족 정체성을 본질적이지 않은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다른 시대와 지역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충분한 시사점을 줄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점이 눈에 띄는데 첫 번째 문제는 책 서술에 있어 인과관계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왜 누르하치 시대의 지역정권에서 홍타이지 시대의 제국으로 국가의 성격이 변했는가의 지점을 설명할 때, 또 제국이 왜 갑작스럽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때 두드러진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행간에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이 불충분하거나 인과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굉장히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두 번째 의문은 저자가 건륭제를 설명할 때 드러난다. 건륭제는 유교의 중화를 부정하고 유교를 이용해 복명주의자를 비판한 아버지 옹정제의 이데올로기조차 삭제시킨다.(물론 그가 유교적 천자의 모습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황제의 모습은 바로 불교의 전륜성왕의 모습이다. 청의 황제들이 티벳불교를 차용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유독 건륭제가 두드러진 이유가 무엇일까? 한족에 대한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몽골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륜성왕이 천자와는 달리 그 자체로 신격을 의미하기 때문일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충분치 못하다. 평자는 개인적으로 만주족의 정체성 중 많은 부분을 몽골-티벳이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만주족의 정체성이 구성된 것이라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면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을 제국의 쇠퇴에 할애하였다. 저자는 오스만제국과 청제국을 유라시아 육상제국으로 규정하며 영국과 같은 해상제국에 육상제국이 쇠퇴하는 과정을 비교적 충실히 정리하였다. 해상제국이라는 단어는 자본주의가 원격지 무역으로 시작되었고, 무역을 통한 헤게모니가 제노바-네덜란드-영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이동했다는 지오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이론과 전반적으로 합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러나 청의 제국으로서의 모습이 과연 일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청은 서구열강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베트남이나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서구적 제국’으로 모습을 변모하려고 하였다. 제국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을 때 과연 그 두 제국은 연속된 성격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점을 설명하기에 육상과 해상은 조금 부적절한 용어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오스만과 청을 비교하며 오스만이 노력했다고 평가했던 ‘근대적이고 효율적 구조조정’이 과연 무엇인지, 결국 저자 스스로 서구중심적 가치관을 드러낸 것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며 서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