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임미리, 2013, 『경기동부』, 이매진 서평

同黎 2014. 4. 7. 18:45

임미리, 2013, 『경기동부』, 이매진 서평

조선후기 박사1

박세연


나는 그 악몽 같았던 날을 기억한다. 누구나 볼 수 있었던 화면 속에서 이른바 ‘운동권’이라고 불렸던 이들의 가장 폭력적 속성이 그대로 까발려지던 말 누구는 진보정당운동의 종말이라고 했고, 누구는 운동진영 전체의 위기라고 했다. 이번 기회에 해악적인 저들을 박멸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래도 저들은 동지라고, 운동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종북이라는 프레임을 다시 한번 저들에게 선물한 책임을 묻자는 의견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그들은 ‘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이들은 아니었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하던 차라리 컬트적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들, 그리고 공개적으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조직들이 대중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언론에는 연일 80~90년대의 학생운동 조직도와 계보도가 등장했다. 운동권들 입에나 잠깐 올라오던 경기동부·인천·울산 등의 내부 조직명이 신문에 등장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운동진영은 한편으로는 허탈감과 좌절에 한편으로는 선긋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실 그 내용들이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은 알고 또 짐작하고 있던 그 내용들보다는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소위 자주파들의 대응이었다. 그것은 대중정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한다고 보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든 이들에게 적대했다. 세상은 마치 경기동부연합의 적과 아군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았다. 어떠한 조언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지지도가 1.6~2.0%대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즉 이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마치 한국사회의 섬처럼 외부의 모든 이야기를 조작으로 치부하며 똘똘 뭉친채 자신들의 집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 사실을 임미리는 하위주체(subaltern)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그녀가 보기에 경기동부연합은 라나지트 구하가 제시하였던 서발턴의 개념인 부정성·연대성·폭력성·영토성에 부합하는 성격을 지닌 하위주체였다. 다만 구하의 연구에 들장하는 서발턴들이 대부분 농민이었다는 점이 차이점을 지니는데, 이를 위해 그녀는 서발턴에 대한 다른 연구들을 인용한다. 김원은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에서 다양한 한국의 서발턴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는 스피박의 서발턴에 대한 정의, 즉 “자기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사람, 설령 말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타자의 시점과 언어에 따라 지워져버리고 마는 존재”를 인용하여 다양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서발턴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즉 스스로의 언어를 잃어버린 지식인 역시 하위주체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임미리에 의하면 경기동부연합의 뿌리는 바로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국가에 의해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던 동네, 성남은 특유의 지역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80년대에 또 다른 광주의 비극을 만나게 된다. 성남지역의 대다수는 호남 출신이었고 이들은 국가라부터 2번 버림받았다. 5월의 광주가 70년대 광주의 기억을 호출해내고 호출된 기억은 학생운동의 잠재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적은 자신들을 버렸던 국가를 비호하고 광주를 버렸던 미국이고, 이 땅에 설 수 없었던 그들을 받아줄 곳은 바로 새로운 이상인 북한이었다. 바로 거기서 학생운동권중에서는 유일하게 지역적 기반을 강고하게 지닌 경기동부연합이 탄생하였다.


‘그들만의 전설’을 통해 성장하고 더욱 강고해진 경기동부연합은 통일전선론을 기반으로하여 마침내 원내에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사태를 통해 경기동부연합뿐만 아니라 남한사회의 운동 세력 전체가 만들어온 모순과 퇴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개량적이라고까지 욕을 먹었던 통일전선론안에는 사실 그들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이들의 이런한 폐쇄성과 패권주의는 바로 보수 정권이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정상 국가’라고 볼 수 없는 보수 정권의 탄압은 이들의 진영논리를 고착시키고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위기와 남한의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 전선은 교란되었고 공포정치가 사라진 지금 여전히 공포정치를 상정하는 이들이 대중에게 어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임미리는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얼핏 이해되지 않는 통진당 비례대표사건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의 집단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이들의 뿌리를 찾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하위주체(서발턴) 이론을 한국 사회에 아주 흥미롭게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의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들의 집단기억에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현재 운동진영에게도 매우 유의미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역사 연구에도 몇가지 유의미한 질문을 던져준다. 첫째, 경기동부연합은 하위주체인가? 서발턴은 영토성은 서발턴이 확장해나가는 것을 방해한다. 이들의 운동은 일정한 지역이나 환경적 한계는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영토성에서 해방되어 보편성을 지니게 되었을 때 그들은 서발턴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광주대단지 사건의 피해자들은 서발턴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고 이후 운동진영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5월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쉽게 서발턴으리고 부를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경기동부연합은 명백히 확장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서울연합·광주전남연합 등 범경기동부연합으로 불리는 연대체를 넘어서 통합진보당이라는 대중정당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비록 아르오(RO)라는 내부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목표는 명백히 확장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권력과 지식을 획득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해서 하위주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둘째, 우리는 이 책에서 하위주체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가지게 된다. 서발턴 연구는 가능한 서발턴의 입장에서 그들의 빼앗긴 언어를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지향을 지닌 현재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쉽게 지켜지기 어렵다. 특히 그들의 폭력성은 폭력에 대항하는 반(反)폭력이라는 영역을 지나면 있는 그대로만 보기 어렵다. 실제 저자도 강한 포폄을 글 전반에서 가하고 있다. 우리는 하위주체를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셋째, 하위주체는 한계적인가? 임미리는 정치학의 입장에서 경기동부연합이 지니는 서발턴으로서의 특징들, 부정성·연대성·폭력성·영토성을 그들의 확장을 막는 걸림돌로 보고 있는 듯하다. 즉 이러한 서발턴으로서의 특징이 제거되어야 이들은 ‘대중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발턴은 결국 어떤 존재인가? 결국 누군가에게 지도받거나, 스스로의 특성을 버려야만 확장성과 보편성을 가지는 존재인가? 혹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민중을 상정하고 그에 걸맞는 의식성과 계급성을 요구하는, 근대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