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William T Rowe, China's last empire : the great Qing, Press of Harvard University 서평

同黎 2014. 5. 15. 01:51

William T Rowe, China's last empire : the great Qing,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서평


한국사학과 박사1

박세연


윌리엄 로의 China's last empire : the great Qing은 미국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청사 연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페어뱅크로 대표되는 서구적 근대주의에 입각한 연구와 현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로부터 청사 연구를 분리시킨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서구만이 근대를 창조했다는 기존의 서구중심적 시각에 반대하며 청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청의 건설과 운영, 경제와 정치구조 및 하부의 민중들, 그리고 붕괴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거의 모든 연구를 검토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청을 하나의 제국으로 인식한다. 그가 보기에 청은 강력한 중앙집권화, 다민족성과 민족 경계의 초월, 공격적인 공간적 팽창주의라는 초기 근대 제국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청은 무굴제국, 로마노프왕조, 오스만제국, 대영제국과 같은 제국이었다. 강희제와 옹정제는 제국의 완성하고 盛世를 이룩하였다.

팍스 만주리아의 청제국은 초기의 근대국가가 가져야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지니고 있었다. 토지조사와 호적, 지방제도를 통해 중앙정부는 지방의 신민들을 통치하였다. 은과 동이 주요한 화폐로 통용되었고, 이에 따라 농업은 차츰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상업경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경제상황과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상인들은 기업가적 혁신을 이룩하였고, 농촌사회는 수공업이 함께하는 원공업화 사회로 발전하였다. 정부는 광범위한 경작지 확대를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농작물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인구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때문에 윌리엄 로는 아편전쟁 이전의 대외관계를 조공관계로 규정하고 남경조약 이후에 중국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는 페어뱅크의 설명을 비판하고 청에 내재되어 있던 초기 근대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근대는 곧 위기를 내재한 것이었다. 먼저 한정된 경작지와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증가한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고 곧 청은 맬서스의 비극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중앙정부가 더 이상 지방사회에 효과적인 통제를 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에서는 중앙정부와 협상을 통해 지방 통치에 협조하던 신사층의 역할이 더욱 커지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경세론도 등장하였다. 경세론자들은 지방의 권한을 더욱 더 신사층에게 넘겨줄 것을 주장하였다. 태평천국의 난 등 잇따른 민중반란에서 중앙정부는 효과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군사적 대응은 지방관리와 향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지방분권적 추세를 더욱 강화되었다.

맬서스의 비극에 빠진 청을 더욱 곤란하게 만든 것은 서양의 제국주의였다. 서구는 광동체제를 무너트리고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몇 번의 전쟁과 침공을 자행했으며, 그 끝에는 항상 불평등 조약이 있었다.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악화되던 청의 재정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제국주의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능한 중앙정부=만주족에 대한 비판과 강화된 지방 분권주의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탄생시켰다. 정부를 혁신하자는 경세론은 무능한 만주족을 몰아내자는 혁명론으로 대체되었다. 결국 청은 혁명으로 무너졌다.

윌리엄 로는 근대가 서구의 전유물이라는 기존의 상식을 뒤집어 청에서 초기 근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제국의 모습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많은 영감을 주는데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잃어버린 근대성들』과 마찬가지로 서구적 근대에만 집중해왔던 자신들에 대한 서구학계의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청의 제도와 사회구조 중 많은 부분은 동시기 조선과도 겹쳐보인다.

제국의 특성을 찾지 않아도 인구 센서스, 광범위한 교통로, 연안 상업망, 토지대장과 그에 기초한 조세 수취 등, 국가의 사회 가독성을 높이려는 여러 제도는 조선에도 거의 동일하게 존재하였고, 어떤 부분은 오히려 청보다 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협상한 신사층은 조선의 양반과 매우 비슷한 위치를 취하고 있다. 태평천국의 난과 동학농민전쟁은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또한 농촌사회의 경제구조 역시 최근 조선의 농촌이 프로토공업화 사회였다는 문제제기가 던져졌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과 청은 많은 부분에서 동일성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로 확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성은 굳이 제국이 아니더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조선과 청의 가장 큰 차이는 국가의 통제력과 지방 분권주의의 문제이다. 청의 경우 성세의 결과가 맬서스의 비극을 초래하고 이것이 중앙의 통제력을 점차 약화시키면서 반명 지방의 자율적인 권력은 더욱 강화시켰다. 이러한 모습은 중화민국의 성립과정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반면 조선은 1910년 그 순간까지 강력한 국가통제력을 유지하였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물질화된 권력이든, 강력한 유교 이데올로기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어떠한 지방 군벌도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 대항한 의병들도 고종의 명령으로 상당부분 해산되기까지 하였다.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했던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기인했을까? 그것은 인구와 영토의 차이라는 물리적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변수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제국과 비제국간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제국이 가지는 다민족성, 공간적 확장주의가 중앙집권적 체제의 유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청을 지켜왔던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을 때 내재되어 있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한족 민족주의는 폭발했고, 청은 무너진 지배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내지 못한 체 해체되었다. 그리고 만주국이라는 나라를 통해 적들의 논리였던 민죽주의를 새로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다.

반면 20세기에 등장한 성공한 제국 제국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메이지 일본은 천황제를 통해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였다. 소련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를 통해 제국의 면모를 유지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건설하고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청의 멸망을 이데올로기의 부재 내지 사망이라는 점에서 바라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은 누가 보아도 제국이 될만한 물적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이데올로기만을 남긴 체 제국주의에 의해 소멸되었고, 또 남은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로 전화하여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 이어진 것이 아닐까?

다만 윌리엄 로나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서구적 근대에 대한 재고찰이 서구중심주의적 역사관을 해소하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하여도, 이를 통해 내재적 발전론의 새로운 변주곡을 만들어내는 우는 범하지 않아야겠다. 한국사에서의 내재적 발전론은 근본적으로 조선도 제국이 될 수 있었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등장한 역사관이다. 과연 '우리도 괴물이 되고 싶었다.' 는 한국사 연구자들의 욕망은 서구 연구자들의 반성과 어떠한 접점을 지니고 있는가? 근대가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서구권 연구자들의 연구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제임스 스콧이 국가주의를 비판한 저서 『국가처럼 보기』의 목차에 서구 못지않게 체계적이었던 동양의 국가들을 누락시킨 것은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연구가 반성과 경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러한 진정성을 우리의 욕망에 이용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