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구범진, 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평

同黎 2014. 4. 1. 13:46

구범진, 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한국사학과 박사1 박세연


청나라가 한족이 아닌 이민족으로서 중국을 장기간 통치한 유일무이한 국가라는 사실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만주족이 60배가 넘는 한족을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통치할 수 있었던 원인을 존 킹 페어뱅크를 비롯한 많은 역사학자들이 만주족의 한화에서 찾았다. 즉 청은 입관 후 ‘중국적 세계질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만주족을 한족화하여 한족의 반발을 무마하여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하나는 만주족 국가로서의 청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계제국으로서의 청제국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90년대 등장한 일군의 미국 학자들은 청의 한족화라는 기존의 프레임을 비판하고 만주족 국가로서의 청과 세계제국으로서의 청제국의 모습을 재발견해낸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성과가 『신청사』(New Qing Imperial History)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면서 중국 중심의 淸朝史에서 벗어나려는 미국학계의 연구경향을 ‘신청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범진의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은 지금까지의 신청사의 성과를 정리하면서 만한병용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이었으며, 이에 바탕한 청의 세계관은 어떤 것이었는지 밝히고 있다.

본서의 장절 중 서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두 개의 장을 제외하면 본론에 해당하는 것은 4개의 장이다. 이 중 2장과 3장은 저자의 독창적인 연구 결과라고 하기보다는 대중서의 특징 상 기존의 신청사 연구 결과를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3장과 4장을 통해 청제국은 실제로는 철저히 기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그것이 특히 번부와 관련되었을 때 더욱 철저했음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인류학적으로 만주족의 기원을 북방 유목민족도, 남방 농경 민족도 아닌 농경·유목·수렵이 혼재된 제3의 존재로 보는 토마스 바필드의 입장과 역사학적으로 청제국을 만주족의 민족 정체성이 강하게 투영된 제국으로 보는 마크 엘리엇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팔기제를 통해 만주족의 민족 정체성을 보존했다고 보는 마크 엘리엇의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청의 관제를 분석해 만결과 한결을 비교함으로써 더욱 그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지리적 위치에 기초한 마크 맨콜의 ‘이원구조’론을 수정·보완하고 있다. 맨콜의 ‘이원구조’론에서 조선은 유구·베트남과 함께 大明적 질서에 속하고 청은 예부를 통해 조선과 전통적인 중국의 조공-책봉체제를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이번원을 통하는 몽골, 신강, 티벳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조선에 온 청 칙사의 특징을 분석하여 조선에 온 칙사는 유구·베트남과는 달리 고위 관직자였고, 항상 기인 출신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청이 기인과 한인을 구분하지 않고 하급 관리를 사신으로 보냈던 유구·베트남의 경우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저자는 이를 통해 조선은 몽골과 함께 입관 이전 청이 스스로 쟁취한 ‘대청’적 세계에 속하고, 직성과 유구·베트남은 청이 입관을 통해 인수한 ‘대명’적 세계에 속한다고 결론지어 맨콜의 이원구조론을 수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구범진의 연구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칙사 연구를 통해 조청관계의 특질을 밝혔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청의 독특한 세계관을 이해하지 않는 한 조선후기 대외관계사를 올바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구범진의 연구를 통해 청의 입장에서 조선을 바라봄으로써 중화론에 머물러있던 한정된 시각의 대외관계사 연구를 한 층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먼저 저자가 마크 엘리엇의 입장을 수용함에 따라 생기는 의문은 마크 엘리엇의 연구에서 제기되는 것과 같다.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과연 계속 고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청의 황제들이 청의 전시기를 통틀어 계속 소박함과 검소함, 용맹함 등을 만주족의 특징으로 거론하고 있지만 사실 만주족의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이다. 예컨대 만주족은 몽골의 협력을 업기 위해 티벳 불교로 거의 ‘개종’하였다. 반면 만주족 고유의 탱그리(天神) 신앙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고, 건륭제 시기에 이르면 거의 형식화된다. 더군다나 ‘만주족’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홍타이지에 의하여 위로부터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팔기제를 통해 보존되는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고유의 본질적 존재를 설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만주족과 한족적 질서 외에 ‘몽골적 질서’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몽골이 만주족에 미친 영향을 대단하다. 때문에 그들은 왕공으로 임명되고 왕비를 배출하면서 만주족과 친화성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독립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청이 끝까지 골머리를 앓았던 외몽골 문제라던가 몽골 문제의 확장인 준가르 제국의 문제도 역시 이 원적 구조로는 설명되지 않는 제3의 공간인 몽골적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마치 팔기가 만주·몽골·한인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청 역시 3원구조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조선의 존재이다. 저자는 조선을 ‘대청’적 공간에 속한다고 잘라 말하고 있지만 칙사가 기인 출신임을 설명하고 있을 뿐 여전히 왜 ‘예부’를 통해 외교관계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았다. 필자가 설명한 ‘대명’적 공간과 ‘대청’적 공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조선이 과연 그 두 가지 성격으로 완전히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예부를 통한다는 대명적 방법을 통해 외교하지만 칙사를 오로지 만결의 관리로만 임명하여 대청적 인물들만을 통해 관계는 맺는다는 점에서 조선은 입관 후에도 대청적 질서에 완전히 포함할 수 없었던 이중적 존재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