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이블린 로스키, 2010,『최후의 황제들』, 까치

同黎 2014. 4. 22. 02:05

이블린 로스키, 2010,『최후의 황제들』, 까치

한국사학과 박사 1

박세연


淸을 전통적 중국의 봉건왕조가 아닌 독특한 만주족의 국가로 바라보는 일련의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청이 현대 중국의 판도를 완성하고, 또 현대 중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를 건설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청과 현대 중국의 유사성은 만주족의 혁신성과 독창성을 증명하는 근거로서 활용된다. 과연 청과 현대 중국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까? 이블린 로스키 역시 청이 현대 중국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청의 원래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녀는 청의 황제와 황실, 그리고 궁정이라는, 권력이 가장 집중된 부분에 집중한다. 만주족 고유의 (근대적 의미의) 민족성은 없었다. 다만 황제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었고, 이 정체성은 기존의 다른 정체성들을 덮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정체성은 중국, 몽골, 티베트에 영향을 받으며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편 다른 민족은 각 민족의 문화를 변화시키지 않고 서로 다른 법률과 제도를 적용하여 통치하였기 때문에 청은 다민족성을 띠게 된 것이다.

청은 중국을 지대하면서 공간적·물질적으로 한족의 전통을 조각내 놓았다. 북경은 청의 수도였지만 단일한 수도는 아니었고, 북경 내부 역시 만성과 한성으로 분리되었다. 권력이 가장 집중되는 공간인 자금성도 그동안 생활의 공간으로만 여겨졌던 내조에 한족이 침범할 수 없는 공적 기관들을 위치시킴으로써 전통적 중국의 통치 제도에 이해 황제권이 견제받는 것을 방지하였다.

청의 지배층들 역시 황제권에 도전할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되었다. 만주와 몽골의 여러 귀족들은 세분화된 청의 봉작제 하에서 불안정한 세습권을 보장받았다. 이들의 조상의 공훈에 의해 귀족의 작위를 받았지만 만주족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작위를 잃을 수 있었다. 청 특유의 시험을 통한 작위 자격 평가(고봉)은 귀족들이 얼마나 황제권에 예속되어 있었는지 보여준다. 황족들 역시 자율성을 억제당하고 군사적·정치적·의례적으로 황제권을 보조하고 수호하는 기둥으로써 활동하였다. 이러한 견제의 원리는 황제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시는 황실의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황위 계승권을 모든 후비의 아들들에게 개방함으로써 후비들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외척의 발호 가능성을 가능한 봉쇄하였다.

궁중안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직제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권력의 중심인 황제를 가장 곁에서 모신다는 점에서 권력 문제의 핵심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명대의 환관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청의 황제들은 환관을 통제하기 위해 포의라는 기인들을 궁중 사무에 투입했다. 궁중에 설치된 내무부는 기인만 임명되었는데 시위와 내무부는 외조의 관리들과 중복적인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며 이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청의 이러한 사회 구조는 의례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청은 북경을 접수하면서 명이 했던 여러 의례를 그대로 계승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기우제에서 보여주듯이 일부 의례는 변형되고, 도교, 민간신앙,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여진족의 샤머니즘은 국가에 의해 정리되었고, 티베트 불교 역시 국가에 의해 장려되었다. 이러한 복합성은 황실의 사적 의례에서 잘 드러난다. 공적 의례와 사적 의례의 명확한 구분이 없어 복잡한 의례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는 청 황실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청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켰으며 중국의 문화는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블린 로스키는 만주족의 특수성이라는 문제를 본질주의로 환원할 수 있는 (근대적) 민족성으로 보는 대신 변화하며 형성되는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다. 마크 엘리엇은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이때의 민족성과 근대적 민족성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인정하지만, 이블린 로스키는 그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형성되고 변화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엘리엇의 민족성과 로스키의 정체성이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을 것 같다.

저자의 설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청 황실이 전통적인 유고의 公私觀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유교적 公은 私에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것으로 私가 완전히 사라지는 - 온전한 公만이 존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러한 공사관을 실체로서 극대화시킨 것이 禮學이다. 명말부터 이러한 공사관에 일부 변화가 온다고는 하지만, 동양사회에서, 특히 조선사회에서 이러한 공사관은 끝까지 지속되었다.

통치의 영역에서 유교적 공사론은 諸葛亮이 「出師表」에서 언급한 ‘궁부일체론’으로 정리되었다. 이 궁부일체론은 관리가 군주의 견제하고 私心으로 국정을 농단할 것을 막는 전거로서 활용되었다. 명의 경우 이러한 견제 구조가 사라졌을 때 위기에 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조선은 주로 왕실재정의 운용문제에서 많이 제기되었으며, 때로는 국왕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의례의 측면에서 역시 궁부일체론은 강력하게 지켜졌는데, 인조가 私親인 元宗을 追崇할 때까지 원종과 그 부인인 계운궁에 대한 제사 및 복제 문제는 사친에 대한 정과 국례의 준수라는 점에서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다. 결국 인조의 사친을 추숭이라는 공적 영역에 포함시키고 나서야 문제가 종식되었던 것이다.

명과 조선에서 조상에 대한 공적 길례는 태묘(종묘)에서 행하는 것이었고, 사적 길례는 봉선전(선원전)에서 행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청은 태묘와 봉선전 외에 그것도 선택한 조상에 대한 제사를 따로 지냈다는 점에서 전통적 유교국가와 큰 차이점을 보인다. 궁중 내부의 사무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선은 건국하자마자 고려의 왕실 사장고를 해체하고 왕실재정을 공적 영역인 호조에서 하도록 규정하였다. 그후 왕실재정을 따로 관리할 필요성이 생기자 내수사를 설치하고 이를 이조의 속아문으로 소속시켜 공적 영역의 관리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청은 내무부를 설치하고 공적 관료체제에서 관리해야 할 사무까지 내무부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의례와 관제에서 보이는 이러한 공사의 구분 없음은 청의 큰 특징이다.

청은 중국 내지에서는 전통적인 유교국가를 표방했지만 사실은 유교적 질서를 자신들의 필요에 걸맞게 고쳐서 이용하고 있었다. 기존의 질서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필요에 맞도록 변형하여 사용하는 것이 청의 정체성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정체성이 과연 ‘정체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던지며 서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