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프랑스의 한 마을을 통해 본 중세유럽

同黎 2012. 7. 27. 02:07

가장 일반적으로 역사를 배우는 방법은 어떠한가? 보통 우리는 시대순으로 각 시대에 일어나 굵직한 정치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며 공부한다. 사람은 본래 어떠한 것이든지 일반화시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큰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익히는 것이 이해하기도 쉽고, 인관과계를 설정하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후 맑스의 공헌으로 경제사가 역사 이해에 필수적이 되었으나 여전히 역사의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하거나, 계량화를 통해 일관적인 경향을 찾아내려는 방식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식의 역사 연구는 분명 역사학이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나 신의 의지를 설명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하나의 과학(科學)으로 발전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론의 범람은 역사학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인 실증(實證), 즉 사료의 연구를 등한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곧 한 시대의 다양한 영역, 즉 사회와 문화의 영역,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생활 등을 맹목(盲目)한체, 단선(單線)적인 역사 쓰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 쓰기 작업은 역사의 대중화에도 영향을 미쳐, 연구자와 대중 모두가 여러 시대와 지역의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만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역사에서 구조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인간은 사회를 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어느 정도는 구조에 종속되어 산다. 독일의 나치가 히틀러 개인의 광기와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차 대전의 패배와 대공황에서 기인한 것처럼 역사에서는 우연을 강조하기 보다는 체계적인 구조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구조의 건설이 다분히 정치경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구조를 파악하는데 있어 그 기반만을 보아왔을 뿐만이라는 것을 말한다. 반면 구조를 구성하고 있는 실제, 즉 다수 민중의 이데올로기에 역사가들이 그동안 지나치게 무관심해왔다. 정치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해나가다 보면 민중을 강조하면서도 지배계급이나 엘리트의 사고만을 분석하기 쉽다. 우리는 어느새 다수 민중을 객체로 폄하하고, 소수의 지배계급이나 지식인 엘리트만을 주체성이 있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역사가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히 연구된 지배계급과 두드러지는 저항세력, 그리고 엘리트들의 생각이 아니라, 시대를 실제로 살았던 다수 민중의 생각들, 그들의 사고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구조의 정치경제적 기반이 실제로 어떠했으며, 지배이데올로기와 그에 맞서는 저항이데올로기, 그리고 다수이데올로기와 소수이데올로기가 실제 민중들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단선적인 역사를 물론 피해야하겠지만 그것이 역사에서 구조를 찾는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것으 아니며, 오히려 우리는 더욱 다양한 방법의 연구를 통하여 시대의 구조를 샅샅이 파헤쳐내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과학을 완성시켜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아날학파 3기로부터 제기된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금 세계와 한국의 역사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이야기한 프랑스의 아날3기일 것이며, 독일의 일상사 연구와 나치시대 민중의식에 초점을 맞춘 골드하게의 연구 작업, 대중독재라는 문제의식으로 시작된 한국의 사회사연구와 쌀, 삶, 문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작된 생활사연구, 그리고 최근 시작된 구술사까지 역사연구방법이 다양해지고, 사료의 발굴에 있어서도 전환이 계속되면서 그동안 민속학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분리되었던 연구영약이 역사학의 이름 아래 다시 연결고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중세 남프랑스 산간지방은 몽타이유 마을에서 벌어진 이단심판 기록을 바탕으로 그네들의 삶과 생각을 그려낸 프랑스 아날학파 3기의 거장,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의 <몽타이유 :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이라는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시사점이 많다. 이 책에서는 훗날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꼼꼼하고 치밀한 한 이단심판관의 방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중세 유럽 말기의 피지배계층과 지배계층의 하부 구성원들의 심성을 재구성함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럽중세에 대한 고정관념들에 파열구를 내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가 대단히 “일반적인” 사례만을 중심으로 또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계층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이 다르고, 저지대와 고지대의 문화가 다르며, 북부 프랑스와 남부 프랑스가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은 증명하고 있다. 우리를 이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다 다양한 사례와 예외를 찾아냄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쌓아놓은 역사를 보완, 수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가 증명한 중세 유럽에 관한 여러 고정관념과 그 실제 중, 특히 경제, 종교, 성의 3가지 분야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경제(생산양식)가 사회구조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이며, 기독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세 유럽의 지배 이데올로기이고, 성은 가장 사적인 부분인 동시에, 공적 영역이 가장 침투하고 싶어하는,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금기와 예외가 존재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 전체를 살펴보진 못했으나 짤막하게나마 우리가 피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중세 유럽에 대한 이미지가 적어도 몽타이유라는 마을에서는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유럽 중세에 대한 3가지 고정관념의 파열

1. 경제와 계급투쟁
중세의 농촌을 생각하면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농노를 지배하는 영주와 낮은 토지의 생산성 때문에 삼포제나 이포제를 실시하는 농노. 그리고 영주를 대신하는 대관(代官)과 마을의 정신적 구심이자 세속권과 경쟁하는 교회. 몽타이유마을도 이러한 중세 유럽의 농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성채에서 영주가 살았고, 이와는 별도로 제후인 푸아 백작이 임명한 대관(代官)이 마을의 중요한 세력이자, 가장 부유한 자 중 하나였다. 마을 사람들의 백작 소유의 방앗간에 가야 했고 봉건적 세금을 바쳐야 했다. 소년이나 젊은 청년들은 양치기를 해서 집안의 보탬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면에서 몽타이유 역시 봉건제에 예속된 마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몽타이유 마을은 우리가 상상하던 전형적인 마을과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 번째는 귀족과 농민들간의 관계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엄격한 신분 구별 대신, 비교적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교류도 활발하였다. 예를 들어 영주의 부인은 동네의 농민 부인들과 수다를 떨었으며, 농민과 정을 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데 있어, 귀족과 비귀족이라는 신분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결혼 같이 가문과 관련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귀족의 특권 의식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족과 비귀족 사이의 벽은 낮았다. 이러한 특징이 전체적이라고 할 수 없고, 몽타이유의 영주가 상당히 낮은 귀족이었고, 경제적으로 크게 부유하지 못했다는 이유가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두 번째의 계급투쟁의 문제이다. 몽타이유 마을에 이단 심판의 손이 미쳤을 시기는 농민반란이 활발했을 시기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귀족과 농민간의 계급투쟁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내 투쟁은 부농 집안끼리의 세력 다툼이거나, 가톨릭교도와 이에 반대하는 카타리나파 사이의 반목일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농업이 발달한 저지대 프랑스와 몽타이유 같은 산지 지방을 일괄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중세 유럽의 모든 농촌에서 계급투쟁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몽타이유에서 귀족과 농민은 오히려 서로 같은 사교영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산지에 위치한 지리적 특징 때문에 마을 전체가 가난한 편에 속했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하기 보다는 각자의 살 길을 찾기에 바빴다. 물론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농민 대부분은 철저한 무식자(無識者)였기 때문에 불만들이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불만은 대부분 사담(私談)에서의 농담이나 욕설로 마무리되었다.

2. 종교와 신앙
기독교는 중세 유럽을 지배한 지배이데올로기이다. 중세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을 숭배하였다. 문제는 과연 이것이 올바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가 하는 점이다. 농민들 대부분은 책을 접해보지도 못했고, 또 문맹일 경우가 많았다. 특히 미사의 주요부분은 거의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성경 역시 라틴어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시대였다. 심지어 성직자(사제)조차 제대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에 지방의 성당에서는 추상적이고 환상적으로 가톨릭의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대부분 농민들을 겁주거나 권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쳤다. 그렇기에 몽타이유 마을의 기욤 베르스바트 같은 일부 논리적인 농민들은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관념이었을 뿐, 실제로 ‘정통 가톨릭’의 교리를 이해하는 자는 드물었다. 때문에 몽타이유 마을에는 카타르파가 쉽게 침투하였으며, 농민들은 카리르파 사제들, 즉 완덕자들을 집에서 모시며 이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음식 등의 물리적인 것의 거부, 윤회론, 성모숭배의 거부 등의 교리를 가지고 있던 카타르파의 교리는 몽타이유 마을의 풍속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임종을 앞둔 자들은 가톨릭 사제의 종부성사를 거부하고, 음식을 부정시하는 카타르파의 전통에 따라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금식을 하였다. 또 인간의 본능에 관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카타르파의 교리는 역으로 모든 제한하에서는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논리로 둔갑하여 지금으로써는 문란해 보이는 성 풍속을 정당화 시켜주었다.

무엇보다도 몽타이유에 나타나는 종교적 특징은, 기독교와 이교적 행위(미신, 마술)가 양립하였으며, 심지어 두 가지가 혼합된 양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길일을 정하거나 앞날을 알기 위하여 유태인이나 이슬람교도 같은 이교도에게 가서 점을 보았다. 또 아이의 탯줄은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 딸의 첫 월경혈은 사위를 유혹하기 위해, 죽은이의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은 집안의 복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죽은이의 영광을 간직하기 위해 보관하였다. 심지어 마을 본당 주임신부조차 이러한 행위에 동참하였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의 어머니를 성모 마리아 제단에 묻음으로써 지모신 신앙을 암시하였다. 기독교 행사도 미신적으로 해석되어 세례는 익사와 늑대의 습격을 막아하는 행위로 인식했고, 또는 피부와 얼굴이 더 아름다워지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농민들은 가톨리과 카타르파 사이에서 진짜 기독교를 찾아 헤매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실천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상에서의 매순간에 인간의 경건한 행동을 빚어내는 구원을 위한 형식적인 집착에 불과했다. 때문에 가톨릭이 전 유럽을 지배했다는 우리의 관념에도 불구하고 농촌 사회, 특히 산촌에서의 가톨릭의 영향력을 매우 낮았으며, 농민들 역시 통제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3. 성과 결혼
성(性)은 가장 사적인 부분인 동시에 공적 영역의 침투 시도가 가장 강력한 부분이다. 가톨릭과 카타르파 모두 임신을 위한 성 행위를 제외하고 일체의 음행을 죄로 간주하였다. 간통, 강간, 남색 등 비정상적인 성행위는 또한 모두 심한 죄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몽타이유 마을만을 두고 평가한다면 중세의 성은 매우 자유로웠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모든 한계 안에서 역으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카타르파 교리의 해석이 있기에 한 층 그 자유로움을 더했던 것 같다. 몽타이유 마을의 남자들은 대부분 내연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공공연한 일이었고, 처벌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영주의 아내 역시, 미망인일 때에는 여러 명의 농민들과 간통했다. 또한 성매매나 간강에 대한 인식도 만약 대가를 지불했거나, 강간을 해도 서로 즐거움을 느꼈으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색(동성애) 역시 이와 마찬가지 였다. 서로 합의가 있었거나 금전 등의 댓가를 지불했다면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져도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4촌 이상의 족내혼도 성행하였다. 본래 족내혼은 4~7촌 이상의 경우에만 허용되었으나, 실제로 이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결혼은 엄청난 비용과 지참금을 소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가 가능한 한 집안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였고, 신부 공급이 부족해서 이기도 하였다. 다만 사촌 이내의 근친상간은 금기에 속했다. 하지만 몽타이유 마을의 본당신부 피에로 클레르그의 경우 12명의 내연녀 중 자신의 여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중세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운 성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합의하에 자유로운 성관계가 가능하였고, 금욕적인 이들은 오히려 간강범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때문에 성직자 독신주의의 결정에도 오히려 평신도들이 신부가 간음할 가능성을 들며 반발하였는데, 이로부터 당시의 성의식을 알 수 있다. 공창제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시행되었다. 물론 자유로운 성관계는 절대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남성의 성욕을 절제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었다.



소위 미시사라 불리는 분야들, 즉 민속학, 역사인류학 등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단선적인 역사관에서 볼 때 놓쳤던 수 많은 이야기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인식을 수정함으로써, 한 층 나아간 시대관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몽타이유 : 중세 남프라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알 수 없었던 농민들의 실제 삶에 대하여 접함으로써, 문자기록을 주체적으로 할 수 없는 계급의 이야기까지 알 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유럽 중세의 모습을 여러 다양함을 인정할 수 있는 형태로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법에서의 문제 또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시대와 지역마다 특수성은 존재하겠지만, 몽타이유 마을의 사례 역시 여러 가지 특수성이 존재한다. 고지대라는 점이나 카타르파의 거점이었던 점은 이것이 과연 중세 유럽에 대한 “일반적 관점”을 수정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느 연구자든지 자신이 직접 본 사료를 더욱 신뢰하게 되는 경향이 있을텐데, 이러한 편향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폭 넓은 사료를 분석하고 결과를 복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비록 시대 전체에 일관된 해석의 관점을 부여하는 것은 안되겠지만, 시대의 상황을 파악하고 각자 어떻게 시대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구조를 세우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가치와 즐거움은 충분하다. 우리가 어디서 중세 유럽 농촌의 실생활을 이렇게 이 잡듯이 살펴볼 수 있겠는가? 저자의 말처럼 당대인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역사가들에게는 다행한 일인 이단심판 기록을 통해 그네들의 심성을 파악할 수 있기에 우리는 행운을 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