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조공-책봉관계론에 관하여

同黎 2012. 12. 30. 01:29

조공-책봉관계론에 관하여

 

 

 

페어뱅크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대외관계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관계로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유구를 포함하는 동아시아는 중국의 문화영역 안에서 발전하였으며 중국은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지리적문화적 중심이었다. 중국과 비중국인들의 관계는 중국 사회 자체처럼 위계질서와 불평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이것을 중화 세계 질서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위계질서는 등급화 되었는데, 중국과 매우 가깝거나 문화적으로 유사한 한국, 베트남, 유구는 중화문화지대로 동심원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내륙아시아 지대는 중국 문화권의 주변에 있었고, 이보다 더 떨어진 지역은 외부의 오랑캐로 외곽지대를 이루고 있었으며 무역 시에만 공물을 보냈다.

조공-책봉관계는 중국 내부의 계층성에서 비롯되었다. 이 계층성은 유교를 통해 승인되었고 영속화되었다. 유교에 의하여 만들어진 중화 세계 질서의 정점은 천자였다. 천자는 을 통해 모든 분야의 절대자로 군림하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조화를 주도했으며, 천자에 대한 복종은 도덕적 윤리로서 규정되었다. 천자는 봉건제와 관료제의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지방을 다스렸는데, 관료제의 경우라도 천자에게 충성하는 지방의 토착 지식인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천자의 이 규정은 단순히 중국 내부 질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중국을 둘러싼 많은 나라들 간의 관계에까지 확장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중국에 대하여 번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봉신이 되어야 했으며 중국은 이들에 대하여 회사품을 내어 주는 것이다. 중국과 모든 사람들은 중화 세계 질서 안에서 중국과 접촉해야 했다. 때문에 무역 역시 모두 조공의 명목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시각은 중국이 근대 세계질서에 익숙해지는데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관점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동반하고 있었다. 중국은 문화적 우월성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취약하였다. 때문에 문화적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을 활용하였다. 군사행정적 통제, 문화적 사상적 매력과 종교적 매력, 물질과 외교상의 이익이 그것이었다. 중국은 이를 통해 조공이라는 형식적 종속을 유지시켰다. 내륙아시아와 외곽지대는 비중국적인 관점을 유지했지만, 편의에 따라 표면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중국적 관점을 표출하였던 것이다. 중화 세계질서의 조공-책봉관계는 이처럼 단지 중국의 목적에 의해, 이상적규범적인 수준에서 통합된 개념이었다.

플레쳐는 페어뱅크와 조금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명청시대 중국과 중앙아시아와의 관계를 통해 중국의 황제가 꿈꾸었던 조봉-책봉관계가 이상처럼 운영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의 장건이 흉노에서 돌아온 이후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대원제국에서 중앙아시아인들이 중국에 들어와 관료가 되었으나 명의 건국으로 이들은 다시 추방되었다. 명의 황제인 영락제는 천명을 받아 전 세계를 통치한다는 중국 전통의 대외관을 재확인하였다. 중앙아시아 주변의 소규모 오아시스 국가들은 조공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수용했는데 이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티무르의 태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티무르는 처음에는 조공 체제에 순응하는 듯 보였으나 곧 여기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하였다. 중국의 원정으로 그는 제거되었으나 결국 티무르가 중국의 조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재확인 된 것이다. 티무르 제국의 샤 로흐 역시 조공을 거부하였고 영락제는 사실상 그를 동등한 지위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백성들에게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영락제는 유교질서의 원칙을 사실상 어긴 것이다. 명왕조가 끝날 때까지 적극적인 국제관계는 포기하고 단지 전통적인 조공 관계를 근본적으로 유지했는데, 이는 무역을 위해서였다.

청이 오이라트를 멸망시킨 이후 그 수도에 있던 이슬람교도인 코자 형제를 봉신으로 만들어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을 주장하면서 청의 사절을 학살하였다. 청은 이들을 공격하였고, 카쉬가리아가 정복되자 서부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공포에 떨었고, 결국 카쉬가리아가 집결하는 것을 막았다. 청은 투르키스탄의 지역 엘리트들을 협조자로 선택하였고 이들은 청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1820년이 되자 이 지역에서 청의 통치안정성은 사라졌다. 결국 청은 반란을 일으킨 코자의 후손들을 정복하였다. 이들이 사라지자 코칸트라는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청은 무역봉쇄를 했으나 실패하고 코칸트 왕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특례를 통해 이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청은 이들을 제압하고 동쿠르키스탄을 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윤영인은 10-13세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보여주면서 페어뱅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거란과 여진, 남송과 고려, 대하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황제라는 칭호와 연호 사용이 전혀 조공관계의 틀로써 설명할 수 없으며, 당시 다원적 국제관계 속에서 각 국가들이 실리주의 외교를 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페어뱅크가 서구의 평등적 대외관계와 동아시아의 대외관계를 구분했던 근거를 무너트린 것이다. 특히 고려는 요와 금, 남송 사이를 오가며 자국의 이익을 취하였는데, 이는 페어뱅크가 한반도를 중화문화권으로 보고 한국에서 전형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비판한 것이다. 더불어 페어뱅크가 파악한 중국과 한국의 조공-책봉관계는 고려와 원의 관계에서 시작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페어뱅크의 조공-책봉관계는 유교 경전에서 시작된 화이관이 역사적으로 실제 한 상황에서 그것이 외교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전반적인 윤곽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것이 실제 했는지 여부를 떠나 조공-책봉관계라는 이데올로기는 전근대 극동지역의 대외관계를 지배하였고, 그것은 의례를 통해 정리되었다. 그러나 윤영인의 지적을 차치하더라도 페어뱅크의 주장은 중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동양의 군주를 전제군주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서구인의 이러한 편견은 칼 맑스(Kal Marx)가 아시아적 생산관계에서 국가를 최대 지주로 설정하고 이후 경제사 연구자들이 아시아의 왕토사상을 강조하면서 더욱 굳어진 듯하다. 동시에 이러한 전제왕권을 지탱하게 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유교를 지목하면서 유교는 철저히 황제를 위한 계서적 성격을 가진 학문으로만 파악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왕권과 유교의 성격은 이런 것은 아니었다. 유교는 계서적 질서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孟子에서 보이듯이 전제적 왕권을 경계한다. 이러한 경향은 송대 신유학의 형성 이후 더욱 강화되어 주희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天命을 계승하는 道通의 담지자를 유학자들로 지못하였고 황제를 비롯한 위정자들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리학이 국시로 채택되어 심화된 조선에서 성리학이 발전할수록 전제적 모습을 보여주는 왕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페어뱅크는 의 의미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플레쳐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에 따라서 원칙을 수정하기도 하는 중국의 지배자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윤영인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조공-책봉체제론의 실체가 없음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국가들은 자국의 입장에서 외교정책을 전게한다는 일반론을 주장한다. 윤영인의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역시 동아시아적 특수성을 고려하지는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공-책봉관계라는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강력하여 때로는 이데올로기가 실리주의를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개항기 청의 조선에 대한 외교적 종주권 주장이 그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부언하건데, 페어뱅크가 생각하는 이상적 조공-책봉관계가 원-고려관계에서 시작되어 16세기에 정착했다는 윤영인의 주장은 다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먼저 명이 고려와 원의 관계를 조선에게 요구했는지 여부의 근거가 궁금하다. 조선시대 대중국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15세기까지 조선은 명목상으로 중국에 사대하였지만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에게서 조공을 받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皇帝 혹은 大國이라는 말을 듣는 등, 이상적 조공-책봉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대외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중반까지는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중종대에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진히 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중종대 대명관계가 어떠한 정치적 이슈도 되지 못하고 명 역시 조선에 어떠한 간섭도 못하는 상태라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체 단지 실록에서 검색되는 수치만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다.

조선에 대명의리에 관한 관념이 생기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다. 명나라의 파병은 재조지은이라고 인식되며 이후 명청교체기 조선에 큰 논쟁을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광해군은 이러한 인식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대명의리와 대청복수를 내세우며 반정을 일으켰던 인조 정권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후금과 형제국이 되고, 병자호란을 계기로 청의 번국이 되었다. 이후 청에 대한 사대행위가 표면적으로는 명과 똑같은 방식으로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대보단을 세우고 명의 후계자를 자임하면서 페어뱅크가 말하는 유교적 이념에 따른 조공-책봉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페어뱅크가 중화문화지대라고 분류하며 가장 이상적 조공-책봉관계가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한반도에서도 실제로 그러한 관계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