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모리스 로사비,『쿠빌라이 칸』(2008, 천지인)

同黎 2012. 7. 16. 02:49

모리스 로사비,『쿠빌라이 칸』(2008, 천지인) 서평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사 전공

석사4 박세연

모리스 로사비(Morris Rossabi)의 『쿠빌라이 칸』은 세계주의자 쿠빌라이에 대한 전기이다. 저자는 중국, 조선1), 아랍, 몽골, 러시아, 유럽 등 여러 문화권에서 쓰인 사료를 바탕으로 어느 한 민족의 시각이 아닌 종합적 시각에서 쿠빌라이를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 측 사료를 바탕으로 전형적인 유교군주가 된 것으로만 묘사되던 쿠빌라이의 본 모습을 밝히고, 유목민 정복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정주 사회의 통치자로 변신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저자가 묘사하는 쿠빌라이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형인 뭉케의 즉위를 돕고 대리 원정에 성공한 쿠빌라이는 북중국에 넓은 영지를 받고 유목지역과 정주지역의 경계에 개평을 건설한다. 정주지역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운영하면서 그는 많은 중국․비중국인 참모들을 통해 정주지역의 문화와 사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피정복민인 중국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보수적 몽골인들은 그가 초원의 습성을 망각했다고 비난한다. 쿠빌라이에 대한 보수적 몽골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뭉케 칸의 죽음 이후 벌어진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투쟁, 그리고 쿠빌라이의 영원한 라이벌인 카이두와의 투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카이두에게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사실상 넘겨주고, 각 칸국들이 쿠발라이의 통제권에 벗어나면서 몽골 울루스는 분리된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대원제국을 선포하고 자신을 몽골의 대칸이자 중국의 황제로 선언한다. 그러면서 중국인의 마지막 왕조인 남송을 정복하고, 대원제국에 복종하지 않는 고려와 일본, 동남아시아를 정벌하여 정복자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보여주려 하였다. 비록 그것이 제국을 위기로 몰아갔음에도 쿠빌라이에게 정복을 포기할 수 없는 세계군주로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가 정주문명을 통치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배한 지역을 몽골적으로 개조하려 하지 않고,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존중하면서 관용적 정책을 펼쳤다.2) 유교․불교․도교․이슬람교․기독교 등 어떠한 종교․사상에도 특별히 손을 들어주지 않았으며, 과거 송나라의 행정기구와 비슷한 행정조직을 통해 중국을 통치하였다. 여러 분야 심지어 군사에 있어서까지 중국인․몽골인․비중국인 관료를 고루 등용하였다. 중국인 왕조에서 차별받았던 상인․장인 계층을 우대하고 세금을 줄여주는 등 관용적 정책을 펼쳐 폭 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가 세계 공용어로 쓰일 파스파 문자를 고안해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렇다고 쿠빌라이가 몽골인의 정체성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중국 문화에 압도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쿠빌라이는 결코 중국인 여성을 처첩으로 들이지 않았고, 몽골식 의례와 관습을 보존하였다. 관직의 임명에 있어서도 재정과 감찰의 분야에는 중국인을 기용하지 않았다. 중국적 전통에 해박해야만 합격할 수 있는 과거제도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한편으로는 세계주의자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몽골인이었다.

그러나 세계제국의 운영과 정복은 곧 엄청난 재정 지출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악화되는 재정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가의 전매제도를 강화하고, 대운하를 확장하며, 지폐를 발행을 증가시키는 여러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게다가 쿠빌라이 개인의 판단 실수로 인한 일본과 동남아시아 원정의 실패는 결국 제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쿠빌라이의 왕조는 그의 사후 75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중국을 떠나 초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非한족으로서 중국을 통치하려고 했던 쿠빌라이의 노력은 후대 정복왕조인 청에게 많은 귀감이 된 것 같다. 자신을 제국 내 다양한 문화권에서 이상적인 인물로 이미지화 해냈던 청의 황제들3)은 쿠빌라이로부터 여러 가지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쿠빌라이가 동시에 중국의 황제이자 초원의 대칸이 되어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것처럼, 청의 황제들도 중국의 황제이자 만주족의 황제로 자신을 생각하고 이에 기초한 정책을 펴갔다. 원의 치세가 오래되지 못해 쿠빌라이의 정책이 매우 거친 모습을 보이는 반면, 강희제나 건륭제 같은 청의 황제들은 좀 더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본적인 기조나 지방에 대한 감찰과 비밀 보고를 통한 통제 등은 원과 청의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유목민족 출신의 군주가 정주민족을 ‘통치’하는 모습을 강조한 모리스 로사비의 시도는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주의자인 쿠빌라이의 모습을 강조하다 보니 저자가 의미를 과도하게 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다. 예컨대 의창이나 社의 설치 독려, 태복시, 국자감, 태상예의원, 태복시 등은 이전 중국왕조에서 이미 존재하였던 것을 답습하였을 뿐이다. 그것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히 기관의 설치에만 의의를 두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문화 분야에서도 쿠빌라이의 역할은 당․송의 황제들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쿠빌라이가 과연 정주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했는가?” 라는 물음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정치 구조가 완성되었는가? 저자는 쿠빌라이가 전제적이라는 질문에 대한 반박으로 대원제국이 지방자치적이었다는 답을 하고 있지만, 그가 말한 지방자치는 사실상 중앙의 지방 통제력 상실이 아니었을까? 지방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건 정해진 세금만 납부하면 된다는 논리는 왕조 말기에나 등장한다. 특히 대원제국이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 한족의 적대와 몽골족의 불신은 중앙집권적 정치 체계를 갖추지 않고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즉 한족 대지주나 광대한 영토를 지닌 몽골 귀족을 통제하지 못하면 제국의 항구적 운영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제국이 쿠빌라이 개인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더 잘 드러난다. 봉건국가에서는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군주가 잘못되었을 때 국가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게 된다.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公論정치도 국가의 붕괴를 위한 하나의 제도라는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전통적으로 보이는 유목민족의 칸을 모습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자신이 사라졌을 때도 제국을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제도의 정비에는 거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쿠빌라이는 청의 황제들에 비하여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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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에서 저자는 『고려사』의 편찬자를 고려의 학자들이라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고려사』는 고려의 망국 이후 조선의 시각에서 편찬된 것이다. 그러므로 쿠빌라이에 관한 『고려사』의 시각도 사실상 조선의 인식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쿠빌라이가 고려에 대하여 不改風土를 선언한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옹정제는 자신을 농부, 산 속에 은거하는 유학자, 도교의 신선, 티벳의 라마승, 중국불교의 수행자, 만주족 전사, 한족왕조의 관복을 입은 관원 등 여러 가지로 이미지화 하고 있다. 건륭제 역시 유학자, 문수보살, 정복군주 등 여러 모습의 자신을 그림으로 남겼다. (東京國立博物館, 『北京古宮博物院200選』, 東京國立博物館, 2012, pp.188~193, 207~209, 244, 256의 사진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