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미야자키 이치사다,『옹정제』; 조너선 스펜스,『반역의 책』

同黎 2012. 7. 16. 02:47

미야자키 이치사다, 2001, 『옹정제』, 이산.

조너선 스펜스, 2004,『반역의 책』, 이산.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사 전공

석사4 박세연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와 조너선 스펜스의 『반역의 책』은 청대 유래없이 강력한 옹정연간의 통치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민족으로서 한족을 다스리며 끝없이 한족의 화이론에 맞서야 했던 최고 권력자, 옹정제의 통치전력뿐만 아니라 인간적 면모까지 파악할 수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는 독재 군주로서의 옹정제의 통치 방식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전기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묘사하는 옹정제는 결코 권력을 다른 이와 공유하지 않는 독재 군주이다. 옹정제는 강희제의 고심 끝에 후계자로 선택되지만 곧바로 정통성에 관한 소문에 휩싸이게 된다. 옹정제는 그의 권력에 제약이 될 수 있는 형제들과 관료들을 가차 없이 제거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천명에 기대어 파벌을 일으키는 관료집단과 기구를 황제의 독재 권력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 관료들의 명분이 되는 공론을 배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접과 주비로 이어지는 황제와 관료의 개인적 연결고리가 통치의 도구로 선택되었으며 과거를 거치지 않은 관료라도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

그러나 옹정제의 독재적 면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실한 군주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수많은 주접과 주비는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절대적인 군주 아래 특권계급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백성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지방재정의 문란을 막기 위한 양렴은을 설정하는 등 그는 재정면에서 청조가 해결해야 했던 과제들을 처리했다. 그러나 민족 문제는 옹정제에게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필화사건이 터지고 한족들의 反滿사상이 밝혀지자 옹정제는 적극적으로 이를 반박하였다. 그는 『대의각미록』을 지어 천명이 민족을 가리지 않으며 충의 역시 민족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독재 권력은 자본가와 관료의 불만을 가져왔고, 때문에 옹정제의 사후 건륭제는 다시 관대한 정치로 복귀하였다.

조너선 스펜스의 『반역의 책』은 옹정년간에 일어난 쩡징의 역모사건을 통해 화이론에 대한 옹정제의 대응을 보여주는 책이다. 사건은 쩡징의 제자인 장시가 악비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총독 웨중치에게 역모를 권하는 편지를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심문 끝에 쩡징의 반역 의도는 명말청초의 성리학자인 뤄류량의 영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옹정제는 주접과 주비를 통해, 미덥지 못한 지방관이 있는 지역에는 직접 사람을 파견에 사건 처리를 진두지휘 하였다. 사건에 대한 옹정제 결정은 예상을 뒤흔드는 것이었는데, 직접 웨중치에게 역모를 권했던 쩡징은 사면된 반면, 역적의 혐의는 그와 적대적이었던 여러 형제들에게까지 돌아갔고, 쩡징의 사상적 근원이었지만 이미 사망한 뤄류량은 강희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그리고 쩡징의 말과 이에 대한 옹정제의 반박은 책으로 묶여 전국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배포되고, 민중에게까지 강제로 교육되었다.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통해 먼저 한족의 민족적 중화론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쩡징이 주장한 유교적 이상 제도들, 즉 井田制, 봉건제, 향약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군신의 義가 오륜의 중의 으뜸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자신과 형제들을 둘러싼 소문들을 반박하고, 황제가 정책을 결정할 때 얼마나 많은 점을 고려하며,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성실히 처리하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였다. 즉 『대의각미록』은 옹정제가 자신의 한족 신민들에게 알려주고 보여주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대의각미록』 보급의 결과는 황제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책의 보급은 황제의 기대처럼 그에 대한 유언비어를 해소하는데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역으로 이 책을 통해 쩡징과 뤄류량은 엄청난 독자를 가지게 되다. 어떤 불만세력은 자신의 상전을 곤란에 빠트리기 위해 쩡징의 사례를 이용하였다. 모방범도 나타났다. 건륭제가 이 책을 거둬들이도록 명령했지만, 몇 권은 살아남았고, 민중의 기억에는 황제의 의도보다는 그들에게 흥미로웠던 사실만 그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남았다.

두 책이 잘 설명하고 있듯이 옹정제는 즉위 이후 그 어떤 청조의 황제보다 전제적인 통치전략을 구사하였다. 황제권을 제약하는 인물이라면 그가 자신의 형제이거나 고위 관료일지라도, 만주족이든 한족이든 가리지 않고 숙청하였다. 한족의 뿌리 깊은 화이론에 대해서도 옹정제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황제의 박식함을 자랑하며 이들의 사상을 전환하려는 사상통제정책까지 시행하였다.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옹정제를 독재 군주라도 칭하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된다.

그러나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의 독재적 성격”은 과연 합당한 지적일까? 그는 옹정제를 중국적인 독재 군주가 되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노력하는 가운데 독특한 독재 권력을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독재 권력의 특성상 그 보답이 적었기 때문에 건륭제 이후 결국 중국민중은 자본가·관료계급의 지배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중국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몇 가지 문제점이 보이고 있다. 첫째, 옹정제의 통치전략은 옹정제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스펜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봉건왕조에서 가능한 많은 이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 방법은 강력한 왕권 아래 특권계급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치전략은 조선의 영조나 정조도 선택했던 방식이다. 따라서 당시 이러한 통치전략이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동아시아 공통의 문제점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둘째, 전제왕권에 대한 몰역사적 맥락의 비판은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사를 왜곡시킬 위험성이 있다. 더군다나 필자가 독재 권력의 한계를 현대 중국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은 위험성을 배가 시킨다. 전제왕권이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방해했다는 주장은 몰역사적이다. 근대화가 언제나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審級에서 다루어져야 할 중국사에서의 황제 권력과 옹정제의 독재, 그리고 인민 독재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역사학자가 범해서는 안 될 오류이다.

옹정제의 실패는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그랬듯이 근대적 잣대로 평가되어지기 보다는 조너선 스펜스가 하였듯이 그 시대의 맥락에서 찾아져야 한다. 지배층이 지배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민중이 그것을 흡수하기를 기대하여도, 민중은 언제나 脫지배이데올로기, 저항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는 것을 조너선 스펜스는 그의 책 말미에서 보여준다. 지배자의 기억과 민중의 기억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옹정제 통치전략의 근본적 한계는 결국 민중의 사상을 황제가 원하는 데로 통제할 수 없으나 황제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온다. 때문에 옹정제가 제거하려 했던 불안요소는 계속하여 존재하고 어떤 계기를 맞이할 때 마다 요동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