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마크 C. 엘리엇, 2001,『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同黎 2012. 7. 16. 02:50

마크 C. 엘리엇, 2001,『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사 전공

석사4 박세연

마크 엘리엇의 『만주족의 청제국』은 만주족의 정체성 혹은 민족성에 초점을 맞추어 청대사를 바라보고 있다. 저자는 만주족이 한화되었다거나, 만주족의 한화가 청의 지배를 가능케 하였다는 중국 중심적 시각을 비판하면서, 만주족이 일관되게 고유의 민족성을 보존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만주족이 자신의 민족성을 유지하고 한족과 차별성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장치가 팔기제임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만주족의 정체성이 입관 이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후예로 만주족의 대규모 사냥 풍습인 아바에서 기원한 군대조직을 이용하여 니루와 구사를 만들고 그것이 팔기가 되었다고 보인다. 니루는 단순한 군대 이상의 조직이었는데, 다양한 민족을 후금의 사회 안에 통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누르하치에게 협조적이었던 부족은 원래의 씨족과 촌락구조가 깨어지지 않고 니루가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족은 조각조각 깨어져서 배치되었다.

청이 중국 전체를 다스리게 되자, 청조의 통치자들은 두 가지 정통성에 이중적으로 기대게 되었다. 하나는 왕권이라는 중국의 전통적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민족 정복집단으로서 만주족의 이해관계라는 좁은 의미의 개념이었다. 이 두가지 개념 사이에서 여러 가지 요구와 지향이 대립하면서 파열음을 냈고, 청조의 통치자들을 이를 균형있게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청의 황제들은 한인 사대부의 지지를 유지하는 한편 팔기제를 통해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화함으로서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기인은 한인과 분리되어 생활하였다. 북경과 주방의 만성과 한성은 두 민족을 물리적으로 갈라놓는 것이었다. 두 민족의 갈등 처리 과정에서 기인에 대한 처벌을 매우 어려웠다. 청은 팔기의 기인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한화되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정체성은 샤머니즘에 대한 탄압과 국가적 샤머니즘 의례 정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가 원하는 재구성된 정체성이었다. 만주족의 민족성은 사회구조와 긴말하게 연결된 것이다. 많은 만주족이 ‘만주적인 법도’를 잃어갔지만, 팔기라는 틀은 강고하게 남아 있다. 즉 팔기제는 만주족 민족성의 저장고가 된 것이다.

팔기와 민족성의 강조는 소위 만주적 관습들이 무너져가고 만주족이 한화되고 있다는 위험이 감지되던 시기에 더욱 강해졌다. 청은 한군 팔기를 기존의 팔기제에서 소외시키고 도태 시키는 방법으로 팔기제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후 민족성에 대한 청의 태도는 더욱 보수적으로 변하여 민족성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여 팔기제는 청의 제도에서 만주족의 제도로 변해가는 것이다.

민족성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만들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역사적·문화적·계보적 전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을 차용해 특정 구조와 제도가 일상적 관습을 통해 복잡하지만 암묵적인 방식으로 민족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평자가 이해하기로는 과거로부터 쌓여진 경험이 민족성을 형성하고 이 민족성이라는 것은 사회구조와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반면 사회구조와 제도는 변화한 민족성을 형성하면서 가변적인 민족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 만주족이 입관하기 전의 경험은 만주족의 민족성으로 ‘발견’되었고, 다시 청에 의하여 팔기제를 통해 기인을 만주족으로 묶고 그 특권을 세습시키며 기인들에게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변용되었던 것이다.

청이라는 ‘제국’은 만주족의 민족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에 바탕하여 이루어졌다. 즉 한족과는 전혀 다른 만주족의 시각이 청이 다민족 제국을 이루는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그들은 한족의 화이관에 얽매이지 않고, 장성을 넘어 전혀 새로운 지역을 청의 판도에 포함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제국을 만들어갔다. 만주족 특유의 호전성과 엄격한 군사생활은 제국의 군사적 업적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근대 중국(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은 청의 영토와 민족을 모두 계승했기 때문에 처음에 표방했던 한족 단일국가를 포기하고 결국 소수민족을 포함한 중화민족의 국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크 엘리엇의 만주족 민족성에 대한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탁월하다. 만주족의 특징과 정체성을 민족성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종종 근대적 개념을 전근대 시대에 그대로 사용하려 한다는 비판을 불러오곤 한다. 그러나 만주족이 혈통적으로 단일하지 않은 만들어진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성이 당대 황제의 입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소수의 지배층 - 그것도 오랜 기간 다른 생활문화와 연원을 가졌던 이들이 다수의 민족을 지배하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날카로운 대립은 근대 국민국가에서나 만들어질 법 한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형성시켰다. 그것을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만주족의 민족성이 근대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고는 할 수 없는 부분이 보인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의문은 만주족의 정체성을 민족성이라고 할 때, 거기에 수반되는 민족주의가 과연 등장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크 엘리엇은 이를 보수주의라고 부르며 민감한 논쟁을 피해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족성이나 민족주의는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만주족의 정체성이 민족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에 대당하는 한족의 민족성이나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주족의 민족성을 입관 이전의 만주족과 연결시키는 저자의 의견 또한 재고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주족은 호전적인 유목민족이라는 관념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잘 알려져 있듯이 건주여진은 목축과 농경을 동시에 하던 민족이었고, 농경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과 명에서 인신을 납치하였다. 그런데 강희제 이후 만주족은 어느새 전형적 유목민족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왜 이런 변형이 생겼는가? 평자는 청이 몽골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주족의 모습과 몽골족의 모습을 유사하게 설정함으로서 내몽골의 부족들을 끌어들이고 안정적인 복속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민족적 특징이 조작된 것이 아닐까?

만주족 고유의 민족성하고는 어떠한 관계도 없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급속한 티벳 불교의 유입 역시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만주족의 민족성을 고수하려고 했다면 외래의 종교이자 본래의 여진과 아무런 관계도 없던 티벳 불교가 만주족의 압도적인 종교가 되고 반면 샤머니즘 제의는 점차 간소화되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