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김성우, 1998,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제1장 ~ 제4장.

同黎 2012. 12. 26. 21:50

김성우, 1998,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1~ 4.

 

석사수료 박세연

 

김성우의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은 조선의 신분제도가 국가재정 및 基層의 경제상황과의 연관관계에 따라 국가 주도의 良賤制 중심에서 士族 주도의 班常制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은 16~17세기 전반에 이르는 조선중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1) 이 시기는 국가의 對民통제력이 저하되고 국가재정이 위기에 빠지는 한편, 사족층의 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저자는 먼저 15세기 조선의 국가운영시스템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조선의 건국 이후 국가는 公田公民의 확보에 집중하였고, 공전과 공민이라는 재정적 기초 위에서 국가 운영을 원활히 하기 위해 왕토·왕민사상에 입각한 國役體制를 구상하였다. 국가는 자영농민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갖춘 양민으로부터 군역과 직역 같은 국역 수행을 요구하였다. 국역은 租庸調의 부세와는 구별되는 의무였다. 국역은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良人은 기본적으로 양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奉足이나 保人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는데 이를 良役이라고 한다. 상층 양인은 이와는 달리 戶首主戶로 설정되어 軍役을 수행하여야 했다. 관직에 나아가 職域을 수행하는 직역자 외의 상층 양인은 군역을 수행하고 국가는 반대급부로 이들에게 仕宦權을 지급하였다. 물론 이후 군역의 성격에서 사환적 기능은 탈각되고 의무만 남아 군역이 부세화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15세기에 군역은 일종의 특권적 의무였다.

국역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는 모든 양인에 대하여 균일적 지배를 해야 했다. 이러한 양인제일화 정 齊民政策이라고 한다. 제민정책 아래에서 지나친 양인의 경제적 차이나 신분적 차이가 있어서는 않되었다. 국가는 관료제와 군현제를 바탕으로 농민의 재생산구조에 직접 간여하면서 안정적인 소농 경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조선의 법제적 신분구조인 양천제는 바로 국가의 이러한 필요성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다. 국역체제와 양천제, 제민정책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운영시스템을 이루었던 것이다.

제민정책 아래서 신분은 국가에 의하여 양·천으로 대별되었지만, 양인 내부에는 군역 및 직역을 담당하는 상층양인과 양역을 담당하는 하층 양인으로 구분되는 이원적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양반과 상인이라는 사회통념상의 구분이 있었는데, 이는 지주제라는 경제적 원인과 성리학을 토대로한 유학자층의 존재라는 사회적 원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학자층은 관직을 취득한 양인이라는 양인이라는 계층적 성격의 양반이라는 용어 보다는 신분적 뉘앙스가 강한 사족을 선호했다. 국가의 제민정책과 양천제를 위협하는 사회통념상의 신분은 국가에 의하여 범주가 축소되고 명확해지고 있다. 이것이 經國大典大小員人 규정이다.

조용조라는 부세제도와 국역체제를 통해 운영되던 국가재정은 16세기에 그 수요가 급증하였다. 특히 연산군대 공적 체계와는 별도의 왕실을 중심으로 한 사적 체계에 의한 재정운영 방식이 늘어나면서 수취량 역시 증가하였다. 그런데 전세는 국가재정의 규모 파악 이후 일종의 상수로 고정되었고, 토지에 기반한 지추층의 입장이 반영되어 수취량에 정체되었다. 따라서 늘어나는 재정 수요는 주로 가호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공물과 진상에 집중되었다. 공물·진상은 요역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자연히 요역 부담 역시 증가되었다. 반정 이후로도 연산군대 상정된 貢案은 수정되지 않았고 이를 시도한 기묘사림은 실패하였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공납제의 폐해 중 가장 큰 문제인 防納은 관료의 부패를 구조화시켰고, 折收의 확대는 호조의 일원적 재정운영을 방해하며 국가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반면 국가 재정수요의 급증은 국역체제 아래서 안정적 재생산기반을 갖춘 양인농민층의 가계부담을 가중시켜 이들을 몰락하게 하였고, 몰락한 농민은 지주들에게 투탁하게 되었다.

양인 농민의 몰락과 지주층의 성장하에 양인층의 보편적 사환권이었던 군역의 의미가 변질되었다. 사환권도 거리가 먼 하층양인들이 군역을 지게 된 것이다. 군역을 져야 하는 하층양인의 재생산기반은 급격히 악화되어 사족에게 투탁하어 노비가 되기에 이르렀고, 사족은 지주, 양민의 무전자라는 도식이 성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의 수세전은 점점 줄어들었다. 保法에서 상정한 건실한 군호 편성은 양민의 경제력이 하락한 상태에서 해체되어 부유한 가호들은 군적에서 이탈하였고 군역은 양역세가 되었다. 군호의 편성원칙이 사라지고 개별 양인호에 대한 군역편성이 이루어졌으며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일어났다. 국역 보다는 상층 양인의 사적 영역에서 私役을 담당하는 것이 더 헐해지자 양인이 투탁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사족 역시 양천교혼을 통해서 노비를 확대재생산 하였다. 국역체제의 모순과 사족층의 노비증식 활동에 의하여 양인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노비의 수가 급증하는 良小賤多 현상이 발생하였다.

중앙정부에서는 기묘사림을 중심으로 노비종모법과 從良路의 개선 등을 통해 양소천다 현상을 만회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은 중종의 개혁 의지 상실에 따라 실각하였다. 왕실재정의 확대 방식이 지배층의 그것과 똑같은 농장경영형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양천교혼금지법을 비롯한 사림의 대변통은 실패하였다. 국가에 의해 국역체제가 복원될 가능성이 좌절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국역체제의 변동과정에서 공민층을 흡수하여 사회적·경제적으로 성장·발전하는 계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계층이 바로 사족층이다.

국역체제라는 공적 영역이 해체되었어도 이것이 국가 전체의 위기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사적 영역 즉 사족층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족층은 외방의 유력자층으로 중앙 권력자에 비하여 전가사변 등 권력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재산형성은 보다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들은 양인층의 토지상실에 힘입어 많은 토지를 집적하였다. 그러나 아직 생산력이 병작제에 적합할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력 투입이 용이한 농장 방식이 선호되었고 따라서 노비의 확보는 사족층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때문에 국가의 국역체제 복원 노력에 이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훈 의 예에서 보이듯 이들은 사실상 노비적 상태에 있는 夾戶를 노비로 전환시키지 않고 別戶로 호적에 등재시켜 보유상황을 은폐하고 국가 공권력의 개입을 차단하려 하였다. 노비종모법과 한전론은 이들의 재산 축적을 방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기묘사림도 농장의 완벽한 혁파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고, 10결 이상의 대농장을 억제하려 한 것이었다. 한전제의 실패와 제한적 종량책으로 인하여 국가의 양인농민층 확보와 이들의 안정적 재생산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국가는 사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는가? 국가의 외방유력층에 대한 제재는 계속 제기된 문제였지만, 이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벌인 全家徙邊형의 사족층 포함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배층이었던 이들을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양천제가 해체되는 상태에서 계층적 성격을 띄는 양반과 특정 신분을 의미하는 사족이라는 용어의 분리 인식은 오히려 번거로운 것이었고, 양반이라는 단어는 그 법제적 용어인 대소원인과 함께 점차 계층적 성격을 탈각하고 신분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사족은 문무 출신자의 자제 및 內外 모두 顯官 역심자가 있는 보다 좁은 의미는 용어였다가 생원과 진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현관의 범위 역시 음직까지 확대되어 6품 이상의 관료 배출 가문의 후손까지 사족 신분을 띄게 되어 결국 사족은 지배층 일반으로 개념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사족은 양반과 등치되고 비양반이 常人으로 지칭되게 되었다. 결국 전가사변의 사족층 포함 문제에서 촉발된 논쟁은 토호를 위시한 지배층을 사족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해당 계층의 성장이 괄목할만한 것이어서 국가에서 이들의 성장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호에서 발전한 이들은 지방행정권을 손에 넣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족의 외연은 계속 확장되어 16세기 후반에는 4조 현관의 유무와 관계없이 校生은 사족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즉 유교적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 즉 業儒者 閑良校生 사족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국가는 定虜衛를 만들어 경제력을 보유한 외방 호강세력의 자제들을 여기에 편입시켜 부방케하는 한편, 이들에게 사환권을 주어 관직진출이라는 이들의 소망을 이루어주도록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족의 외연을 최대로 확장했을 때 경제력을 보유한 지주층과 사족층이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첫째, 군역의 반대급부가 사환권이라는 설명이 충분히 납득할만한가? 역에 있어서 요역과 신역(국역)을 분리한 김성우의 주장은 조선시대 국가의 재정구조를 가장 정치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데 이의가 없다. 그러나 군역이 곧 사환권과 연결되고 봉족 및 보인은 양역이라는 그의 설명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甲士 이상의 고급 병종의 군역이 西班軍職과 연결되는 사환권을 반대급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군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正兵 및 기선군 역시 사환권을 보여주는가? 정병 및 기선군의 경우 去官규정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양역의 범주는 정병 및 기선군까지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둘째, 경제적 기반과 축재 방식을 공유하는 훈구와 사림은 왜 다른 입장에 서게 되었는가? 특히 사림파는 왜 국가의 입장에 서서 국역체제의 복원과 농장의 개혁을 시도하였는가? 저자는 사림파 역시 대농장의 축소에만 집중하였고 중소 농장의 해체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여 사림파의 변통이 한계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는 훈구와 사림이 소유 토지와 노비의 양적 차이라는 변수만에 의하여 분기된 것이라는 설명을 가능케 한다. 단지 생산수단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만 정책적 입장이 분열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저자도 밝혔듯이 선조대 사림파는 양민의 종량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셋째, 국역체제와 사족의 이해관계는 항상 반대되는 것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는가? 국가재정의 악화와 사족의 이해관계가 항상 분리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림이 중앙 관료로 완전히 진출한 이후로도 국가운영시스템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되었다. 특히 저자가 조선중기로 파악하고 있는 17세기 이후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사림에 의한 변통논의가 활발하게 제기되는 시기이다. 사족 혹은 사림의 계급적 성격만은 부각시켜 이를 국가와 대립하는 존재로만 본다면 실상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로서의 사족과 계급으로서의 사족이 괴리되어 인식되는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1. 저자는 조선시대를 사족층을 중심으로 조선이 건국되고 성과를 마무리하는 15세기 후반까지를 조선전기, 국가의 제민정책이 약화되고 사족층 성장이 두드러지는 15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를 조선중기, 사족 위주의 국가 정책이 약화되며 상민층의 사회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지는 18세기 전반에서 한말에 이르는 시기를 조선후기로 상정하였다.

 

주2. 기존 연구에서 사족층이 국초부터 그다지 변화지 않은 고정된 존재로 연구되었던 것이 비하여, 김성우는 사족층을 사회 변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성장한 계층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