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김명호,『환재 박규수 연구』, 2008, 창작과 비평사

同黎 2013. 11. 14. 03:21

김명호,『환재 박규수 연구』, 2008, 창작과 비평사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는 19세기 활약했던 대표적인 관료인 동시에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밖으로 서구열강과의 접촉으로 인해 기존의 세계관이 흔들리고, 안으로는 삼정(三政)의 문란과 이로 인한 민란이 계속되고 있던 조선에서 박규수는 아편전쟁 직후의 청나라 문안사(問安使), 진주농민항쟁의 안핵사(按覈使), 제너럴 샤먼호 사건 당시의 평안도관찰사 그리고 대원군 정권기의 우의정 등 굵직한 역할을 맡았다. 결국 19세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박규수를 제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박규수는 강화도조약을 찬성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한 것 등으로 인하여 개화파 관료이자 북학파의 후예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그가 『열하일기』의 저자인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이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과 교유했던 사실로 인해 18세기~19세기 전반의 북학파와 19세기 후반의 개화파와의 연결고리로 주목받았다. 즉 북학파인 박지원·홍대용과 후일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이 되는 유길준·김옥균·박영효 등의 이른바 급진개화파를 이어주는 계보를 박규수를 통해 완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명호의 『환재 박규수 연구』에서는 박규수의 개화파적인 성격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박규수가 북학파의 후계자로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학자이자 관료였던 것은 부정하지 않지만 과연 그를 서구 문물 수용에 적극적인 개화사상가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을 표하고 있다. 박규수는 박지원 등 북학파의 영향 못지않게 정통 성리학자였던 외종조 유화(柳訸, 1779~1821)와 척사론자였던 척숙(戚叔) 이정리(李正履, 1783~1843)·이정관(李正觀, 1792~1854)의 영향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서기 전 은둔기에 보인 학문적 성격과 「벽위신편 평어」등을 분석하고 있다.

『경세문편』은 박규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경세문편』은 청나라 초부터 1820년 전반까지의 시무경제론을 집대성한 책으로 개혁파 관료였던 위원(魏源, 1794~1857)이 편찬한 것으로 당대의 절실한 시무를 정리한 것으로 특히 명나라 말의 경세가인 고염무(顧炎武, 1613~1682)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청나라 내부에서도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 위기에 봉착한 가운데 강유위(康有爲, 1858~1927) 등의 주요 사상가들은 『경세문편』을 숙독하였다. 박규수의 경우 역시 이 책을 읽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두 가지 큰 사상적 변화를 보였다.

첫 번째는 박규수가 고염무를 재발견하면서 그의 학문으로 급속히 경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경세가로서의 박규수의 성격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박규수가 위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규수는 위원의 경세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박규수는 『경세문편』을 통해 내정 개혁에 대한 아이디어를 받았던 것이다. 이는 『해국도지』를 통해 그가 대외정책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실학을 이어받았다는 바탕 위에 청나라 경세학의 영향을 받아 예학에 집중하던 박규수의 학문은 실용적인 경세학으로 점차 그 방향을 바뚜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친구인 윤종의가 지은 『벽위신편』에 평을 한 발문인 「벽위신편 평어」에서 처음으로 감지된다. 『벽위신편』은 윤종의가 천주교를 배격하는 척사론과 해외 사정 및 해방책에 관한 글을 모은 책이다. 『벽위신편』의 내용은 『경세문편』를 상당한 전거로 하고 있는 가운데, 이정리 등의 척사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면서 특히 천주교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면서 안정복(安鼎福, 1712~1791)보다 더욱 철저한 척사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척사론을 현실화하기 위한 해방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즉 척사론과 경세론의 결합이라면 측면에서 『벽위신편』은 다른 기존의 척사론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박규수의 「벽위신편 평어」는 이러한 『벽위신편』의 모든 부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총설」을 위주로 평한 것으로 주로 척사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박규수는 전반적으로 『벽위신편』의 내용을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서양에 대한 지식을 더욱 적극 활용하여 좀 더 정밀한 비판을 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미 『해국도지』를 통해 얻은 서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좀 더 자신있게 천주교를 비판하면서도 종래 척사론자들의 지식을 비판했던 것이다. 서양의 언어에 대한 지식이나 기독교의 역사와 분파 및 천주교 국가들의 폭력성에 대한 지식을 천주교 비판에 활용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박규수의 서양 천문역법에 대한 태도이다. 그는 서양의 천문역법이 중국보다 발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서양인들이 유교와 같은 대도(大道)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한발 더 나아가 청나라의 역산가가 주장한 서학중원설(西學中源說)을 수용하고 있다. 이는 바로 서양의 역법이 고대 중국의 역법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이었다. 이렇듯 박규수는 서양의 종교에 대해 동양의 도(道)가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규수는 천주교를 일방적으로 탄압하기 보다는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논박하면 천주교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벽위신편 평어」에서는 『벽위신편』이 지나치게 천주교에 대해 여유가 없다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의 근거는 상당수 『해국도지』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한 것이었다. 특히 서양인들이 동남아시아에 학교와 인쇄소를 세우고 중국 문화를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은 『해국도지』에서만 나오는 것이었다. 박규수의 천주교에 대한 자신감과 서양의 등장에 대한 낙관적은 태도는 바로 『해국도지』를 통해 습득한 서양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양과의 교섭을 피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있게 대처하는 박규수의 자세에서 개화사상의 한 형태인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맹아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규수가 적극적으로 기존의 사상에서 벗어난 개화사상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이 바로 「답김덕수논기전존의」이다. 김영작은 평양을 다녀와서 평양에 기자가 만든 정전(井田)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믿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박규수는 이러한 주장을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평양의 정전이 은나라의 정전제를 따른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보다 더 나아가 기자가 은의 유민을 데리고 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는 『사기』와 『한서』의 내용을 비판하고 다만 동이족의 임금이 하사한 약간의 땅에 은나라 유민과 함께 정착했을 뿐이라고 하여 기자의 성인됨을 더욱 높이고자 하였다.

기자의 정전에 대한 주장은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학설을 계승한 위에서 개진된 것이었다. 박지원은 일직이 평양의 정전이 은나라의 정전제에서 유래했다는 내용의 글을 쓰면서 정전제를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농법을 개량하는 개혁책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런데 만약 김영작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토지제도의 개혁론의 근거가 크게 약화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규수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사홍무성유발」에도 박규슈가 전근대적인 대외관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고려사홍무성유발」은 명태조가 고려의 조공이 성의 없음을 질타하며 지성으로 사대할 것을 훈계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대적인 정벌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의 칙서를 내고 박규수가 감개를 받아 지은 발문이다. 명태조의 이 칙서 때문에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가 경색되고 급기야 요동정벌의 시도까지 이루어졌던 것으로 근대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강대군의 횡포를 보여주는 모욕적인 외교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규수는 이 칙서가 『서경』과 같은 소박한 구어체로 되어 있어 황제를 직접 보는 것과 같은 진정성이 느껴지고 또한 오랑캐인 고려를 자신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염려해주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예찬하고 있으며 고려가 이러한 명태조의 뜻을 저버려 망국을 자초했고 태조 이성계는 사대(事大)의 태도를 명확히 해 지금까지 백성들이 그 은택을 누리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애초에 이 글을 작성한 이유가 명이 건국한 무신년을 맞아 명이 망한 것을 슬퍼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처럼 박규수는 존명(尊明)의식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한 박지원도 존명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가 공유하고 있던 일종의 시대정신이 존명의식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개화사상가로 평가받은 박규수가 강렬한 존명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