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이정철, 『대동법』6, 7장 요약

同黎 2012. 12. 21. 03:39

6장 대동법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대동사목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는 대동미를 상공·별공으로 나누거나 상납분·유치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대동미를 상납·유치분으로 설명하는 것은 대동미의 운영 주체에 따른 분류이다. 상공·별공의 분류 방식은 중앙의 수요를 중심으로 한 이해로 대동법의 가장 큰 의의인 각과 수요를 국가재정 안으로 통합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는 거리가 있다. 운영 주체룰 중심으로 대동미를 분류하는 방식 역시 대동법의 구조와 공물변통 논의의 흔적을 살피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이의 공물변통론을 중심으로 대동법 실시론과 공안개정론이 분리되어 정립되어다. 이이의 공물변통론은 경대동·사주인 배제·공안개정이 핵심 내용이며 전결을 공물분정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대동법은 전결을 과세의 유일 기준으로 삼았으며 사주인의 역할을 긍정하였고 지방 각관의 수요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는 공안개정론과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공안개정론과 대비되는 대동법의 특징이 대동사목에 어떻게 구체화되었는가 살펴보겠다.

 

1. 과세기준

대동법은 과세 기준을 전결에 두었다. 대동사목은 시기결에서 결당 일정한 액수를 걷어 서울·지방의 1년 공·역가를 마련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호서·호남의 경우 각각 124746·169771결이 수납 가능 총결수였다.

대동법을 위해서는 우선 각관의 전결규모에 따라 그 읍의 지출 규모 (관수와 역의 종류)가 결정되어야 했다. 조선전기에 지급되었던 아론전·공수전은 전결 규모가 크게 고려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각관의 종합적 담세 능력을 결정하는데 토지의 비중이 높아졌고, 이런 상황 속에서 전결 수의 차이에 따른 공부 부담 정도의 차이가 심화되었다. 대동법은 각관 전결 규모를 공물가 부과·관수 지급의 기준으로 삼아 대···잔의 4등급으로 나누었고 이를 기준으로 관수미의 양을 조절하였다. 호남의 관수미가 호서보다 많았는데 이는 호남의 전결 총량이 호서보다 많으므로 감당해야 할 역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미는 예비비로 불시 과외의 역을 대비한 것이었다. 흉년이 들어 그 해 대동미 납부를 면제해줄 때 선혜청은 각관의 여미를 경각사에 지급하게 했다. 여미는 각관의 4등급에 따라 나뉘었으며, 이를 통해 서울의 불시 공물 추가부과(별복정)을 가급적 자제하고, 다음 해 정규 지출에 포함시켰다. 이는 가능한 불시 추가부과를 억제하고 양입위출을 지키기 위한 대동사목의 원칙이었다.

 

호서

호남

경기

여미/총수취액

9.6%

32.7%

26.6%

여미/유치미

26%

56%

78.6%

 

아록전·관수전의 경우 이미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과세 전결에 포함시켜 그 역할을 대동미로 이전시켰으며, 관둔전의 경우 실태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전처럼 유지시킨 듯하다. 17세기 중반 관청의 예비비 역할을 했던 은결은 전정의 운영을 어렵게 만들어 중앙정부 입장에서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리 역시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전결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역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그것의 최종 부담이 戶役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일부 공물은 마련하기 쉽다거나 편의를 따른다는 이유로 대동법에 포함되지 않았다. 요역·신역 역시 대동법 실시 이후 원칙적으로는 대동미가 지급되었으나 악공의 봉족·우마 몰이꾼·염초 굳는 역 등은 대동법에 포함되지 못하고 호역으로 귀결되었다. 전결역은 대동미만 납부하면 끝이었으나, 연호역은 대동미 납부 후에도 별도 추가 징수하는 역으로 때로는 징벌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 연호역 자체가 호의 대소·전결의 대소와 관계 없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과세의 불균등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양호와 같은 폐단이 존재했다. 대동법으로 각관에 부과된 공물을 각관 내부에서도 전결 수유에 비례해 수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가관 내부를 완전히 장악했다고는 할 수 없다.

 

2. 공가 총액

공안개정론의 핵심은 공·역가 인하이고 그 일차 목표는 왕실·궁방의 절용이다. 대동법 주장자들도 이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현실 작동 정책인 대동법은 공안개정론과는 달랐다. 대동법 실시로 현물공납제의 공물가 총액이 줄었는지 여부는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동사목의 상공·별공·전세조공몰·요역 등의 공물가 지급 처리를 통해 대체적으로 알 수 있다.

대동법은 내수사와 궁방의 전결 대동미 수취를 면제했다. 이는 내수사·궁방 폐지를 주장하는 공안개정론과 대비된다. 대동법은 내수사·궁방전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이를 분리·배제하였다.

상공 가운데 방물·삭선절물 등은 현물공남제에서도 호조가 값을 지불했는데 그 금액이 너무 낮아, 방물을 마련할 수 없는 각관은 민결에서 그 값을 거두어들였다. 대동법은 방물·삭선절물의 지불 책임을 선혜청으로 옮기고 공물주인에게 주는 값도 시가대로 현실화했다. 이는 공안개정론의 공가 인하와 대비된다.

별공은 공안에 미재되었는데도 거두던 공물로 현실적으로 상공화 되었다. 궁전을 만들기 위한 꿩깃·아교·화살대이 대표적인 물건으로 이를 위한 별복정 요청이 잦았다. 대동사목은 종래 별복정을 이정하되 그 대가를 대동미로 지급하게 하였다. 한편 사신 접대 비용은 상평창 모곡으로 보충하도록 규정했다.

전세조공물은 범주상 전세로 호조에서 담당했는데, 광해군대 선혜법에는 이것이 포함되지 않았다. 전세조공물은 각관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납부의 부담이 실제 규정보다 훨씬 커서 첩징·가징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대동법은 이를 대동미에 포함시키고, 선혜정이 수취하도록 해 경각사에 공가를 지급했다. 선혜청이 공인에게 지금하는 공가는 종전 민들로부터 규정 외보다 더 거두던 것을 포함하는 수준이었다.

대동법 시행 후에도 경각사가 각관에게 공가를 직접 수취하는 관행이 계속되기도 했는데, 선혜청은 경각사가 거둔 물품의 값을 대동미로 지급했다.

폐단이 큰 신역의 경우 기인·방자·조예 등의 고립가를 경청의 수납미로 지급하고 선혜청이 관리하면서 강제 수취가 종식되었다.

쇄마 쇄선가의 경우 현물공납에서는 수취 규정 자체가 없었다. 때문에 쇄마가는 불법 용도로 전용되었는데 금지도 소용이 없었다. 대동법은 쇄선·쇄마가를 대동미·포로 지급하였다. 이를 통해 경상납미의 7~8%에 이르는 운반 비용 역시 수취제도 내부로 흡수하여 민에 대한 첩·가징을 제거하였다.

대동법은 규정 외의 수취까지 모두 흡수하려고 하였으며 공인에게 주는 지급가도 시가로 현실화시켰다. 그러므로 그 총액은 줄어들지 않았고, 현물공납제하에서 정부가 공식적·관행적으로 민에게 수취하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총액 내에서 공가가 합리적으로 조정되었을 것이다.

 

3. 각관 수요

대동법의 중요한 특징은 경대동을 넘어 지방 각관의 수요를 정부 재정구조에 통합시켰다는 것으로 공물변동론과 구분되는 가장 뚜렷한 기준이다. 대동법의 성립은 경대동의 극복 과정이었다. 경대동은 총공가의 일부일 뿐이므로 양입위출이 지켜질 수 없었다. 때문에 인조의 삼도대동법이 실패한 것이다. 현물공납제에서 관수의 대상인 아록·공수·관둔전은 양이 적어 각관은 제역 등 비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늘어나면서 각관의 전정과 재정지출구조가 문란해졌고 불법과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대동법하에서 영읍소용미의 규모는 현물공납제에 비해 크게 확대되었는데 이는 지방의 지출 규모를 현실화 하고, 종래 아록·공수전에서 지급되지 않던 항목들에 대해 대동미를 지급했던 것이다. 감사·사객 지공비용은 현실적으로 늘어났으며 도로의 대소에 따라 추가 대동미가 지급되었다. 한편 아록·공수전에서는 지급되지 않던 감··수영의 영수와 월과군량군기가, 춘추의 습조에 드는 공궤 비용, 수령이 바뀔 때 드는 쇄마가 등이 지급되었다. 예장조묘군에게 대동미를 지급하기도 하였다.

호서·호남 대동사목에는 각관의 지출 원칙도 정해졌으며, 이는 비교적 충실히 지켜진 듯 하다.

 

4. 사주인 규정

공물 조달 과정에서 사주인의 역할을 중요했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병자호란 이후에야 사주인의 역할에 대한 긍정론이 확산되었다. 사주인에 대한 긍정론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현물납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사주인을 거치지 않고는 현물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납 금지는 오히려 방납가를 올려 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경각사 입장에서는 현물 조달은 많은 운영비·노동력이 필요했으나 정부는 이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주인이 없으면 기능 유지가 불가능했다.

호서·호남 대동사목은 사주인에 대한 공가 지급, 공물 수치 규정, 문서행정 등을 규정하였다. 折價는 인조 원년의 삼도대동법 때 정한 공가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질지와 역가가 포함된 것이다. 그러나 인조 원년의 가격이 본래 부족했던 것은 (인정·질지를 포함하여) 그 값을 올렸다. 정부는 사주인에게 미·포를 섞어 지급하여 풍흉에 관계없이 사주인에게 지급하는 공물가를 안정시켰다. 한편 미포의 교환비율을 무명 1=5두로 고정시켜 단기적 규형 보다는 장기적 균형을 유지하도록 선택하였다.

문서행정에는 사주인·해사·호조·선혜청·헌부가 모두 관련되어 있어 공물 수납이 이상없이 진행되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각전과 종묘에 바치는 물품을 구할 수 없는 때에는 다른 것으로 대신하거나 납부를 연기해주며, 공물 품질 기준도 완화하였으며, 액수 이상 공가·인정을 금지에 사주인의 부담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현물납 항목이 완전 사라지지는 않았다. 삭선절산 중 일부는 가관에서 직접 마련해야 했다. 이는 제철산물이기 때문에 미리 구할 수 없거나, 일반인이 잘 사용하지 않아 서울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품인 경우, 예헌이므로 시장 구매를 꺼리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때문에 방납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5. 결론

대동법의 큰 원칙은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제도화 시키는 것이었다. 대동사목의 취지는 단순히 공납의 폐단 방지나 안정적 공물 확보가 아니라 공물 수취를 공정하게 민결 위에 정립시키는 것이었다. 공물가 인하는 후에 민의 부담으로 전가되는 현실의 재정을 돌아보지 않는 주장이었다. 대동법은 이건에 대가없이 수취하던 항목들을 대동미로 흡수하여, 중앙정부에서 이를 관리할 수 있는 근거와 기준을 마련했다. 나아가 안정적 공물 수취를 위협한 만한 위험들을 상쇄시킬 장치를 통해 우연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하였다. 대동법의 공납제의 제도화였다.

 

7장 조선시대 경세론의 핵심을 대동법에서 보다.

대동법은 어떤 원칙과 믿음 위에 구축되고, 이전 시기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여기서는 이이의 경세론에 기초하고 있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유계의 강거문답, 이유태의기해봉사를 통해 정책의 기저에 놓인 각각의 경세론의 원칙을 확인하겠다.

 

1. 공물을 어디에 부과할 것인가 : 호와 토지

유형원은 제도개혁의 기초는 토지에서 찾았다. 이는 많은 지식인이 강조한 군주의 마음상대화 한 것으로 주류담론을 넘어 그가 생각하는 개혁의 대상이 부수적 폐단이 아닌 제도 그 자체였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토지 문제는 토지 분배와 부세의 부과라는 두가지 측면으로 나뉘는데 농적 논의 공간에서 토지 문제를 생각하는 틀은 후자였다. 이는 토지 소유의 국가 조정을 제기한 적 없는 이이의 변통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형원이 이이의 해법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종래에는 토지를 제도개혁의 기초로 삼는 것이 주자학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하였지만 이는 철저히 17세기 조선의 현실로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당시 견해를 보면 유계는 대동법에 찬성했지만 공물 부과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임토작공을 통한 공가 인하를 주장했다. 이유태는 공물의 전세화에 동의하였고, 세와 공을 합하여 1/10을 토지에서 취하면 전안만으로도 세입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유태의 인식은 공물의 전결세화는 거리가 있는 이이, 공안개정을 통한 공가 인하를 주장한 유계보다도 발전된 것이다.

유형원은 공물의 부과기준이 인정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인정과 호구는 토지의 종속변수로 생각했다. 그는 ·調를 설정한 당제 자체를 비판하였다. 당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調 , ·調 였다. 그는 인징·족징을 일으킨 제도적 원인이 인정을 기초로 운영되는 제도 자체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제도 안에서는 국가가 가난한(땅이 적거나 없는)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어려웠고, 이는 유망을 통해 국가의 통치영역에서 빈민들이 벗어나 국역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겸병 역시 인정·호가 과세 기준이 된 것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지주가 토지를 늘려도 그들에게 추가적인 세금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가는 빈부의 격차를 완화시킬 수 없었다. 또한 그는 호·정에 기반한 수취제도가 농업생산력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공물변통에서 전통적 경세론의 1원칙은 임토작공이다. 그러나 유형원은 어느 산지의 물건이라고 한번 공물로 정해지면 민고가 되어 생산이 억제된다고 생각했다.

대동법 찬성론자들은 과세 기준을 호에서 전결로 바뀌어 한다고 생각된다. 세종 이후에는 공물이 토지에 부과되었다고 생각되는데, 문제는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법적으로는 공물 부과의 최종 단위가 각관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행에 따라 관내의 호에 공물이 분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호에 부과해도 그 호의 담세능력은 소유 전결에서 나올 수 밖에 없으므로 공물은 언제나 전결에서 부과되었다. 따라서 대동법의 본질적 내용은 공물 수취기준의 전결화가 아니라 이것의 법규정에 있다.

 

2. 공물을 무엇으로 거둘 것인가 : 현물과 미·

대동법에 대한 일반적 평가 하나는 임토작공하던 공물을 작미·작포 했다는 것이다. 작미·작포를 통해야 방납을 막고, 첩징·가징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작미·포 입법화에 가장 큰 장애는 임토작공이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공물 문제에서 가장 중요했다.

대부분의 현물 공물은 운송 중 품질이 낮아져 점퇴에 대비하기 위해 본래 부과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준비해야 했다. 따라서 임토작공의 법 하에서는 관리의 부정과 관계 없이 첩징·가징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토작공과 방납의 연구성을 필연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부차적 폐단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대동법 실시론과 공안개정론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작미·포가 아니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졌음에도 공안개정론자들이 임토작공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경제적 차이가 아닌 공물은 예헌이라는 정치·이데올로기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광해군대까지도 대동법 옹호론자들은 작미·포가 임토작공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작미·작포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덩화가 필요했다. 유형원은 임토작공이 오히려 고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제후가 바치는 봉헌은 예를 표현하는 정도일 뿐, 실제 수취는 시장에서 마련한 것임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공물·전세를 합쳐 1/10세만을 걷는 것이 고제(정전제)의 복구라고 말하였고 이는 이유태·조복양·이시방·김육 역시 유사하였다.

임토작공을 반대하고 작미·포를 긍정하는 인식은 공물주인의 역할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었다. 공물이 부세냐, 예헌이냐의 문제는 공물주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공물주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각관에 직접 공물이 부과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관원은 사정에 어둡고 낮은 가격으로 높은 질을 요구하며, 백성과 교역하면 민폐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사주인은 오래전부터 활동해왔다. 문제는 사주인의 역할을 공적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였고, 대동법 찬성론자들은 사주인의 존재를 고제 속에 찾아내 현실 속에서 그 존재를 정당화 하였다.

 

3. 공물 운영의 개혁 방식 : 절용과 제도개혁

공안개정론과 대동법실시론은 모두 양입위출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서는 양입위출의 다른 측면을 강조했다. 즉 공안개정론은 문제를 개인의 욕망으로 생각하고 위출을 강조하여 수요자의 절용을 강조하고 공물가 인하를 주장했다. 반면 대동법 실시론은 문제를 제도로 보고 양입을 강조해 수취 액수의 고정에 강조점을 두었다.

기존의 연구는 공안개정론과 대동법 실시론을 재용 대 재정, 산림 대 왕·관료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이이의 변통론에 근거한 것이며, 이이는 백성의 부담을 걸어주는 것과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하는 것을 상반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세금의 수취구조를 개혁하여 양자가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유성룡이나 김육 등의 생각 역시 이와 같은 것이었다. 양자는 안민익군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형원은 모두 세금을 통합하고 과외 부세를 엄격히 금하며 둔전·어전·염분·모곡을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양입위출 원칙에 대한 유형원의 철저함은 祿制 서술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경관과 지방을 막론하고 향소· 파총· 향교에 까지 운영비를 두어야 하며 직이 있는 자는 모두 녹봉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동사목도 미치치 못한 부분이었다.

유형원이반계수록을 지은 이유는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이 겪었던 혼란 때문이었다. 유형원은 당시의 혼란이 단지 청의 침략 때문이라고만 보지 않고, 폐습을 개혁하지 못해 나라가 쇠약해진 국내적 요인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인식인데 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공격 받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국내적 측면에서 찾음으로써 자연히 개혁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것은 유형원만은 아니었으며 이는 주희에게서 나왔다기 보다는 현실 자체에서 도출된 것이다. 유형원의 특질은 개혁의 입장 그 자체가 아니라 개혁의 방식에 있다. 그는 문제가 개혁의 주체가 없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구체적 실천방안을 가진 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유형원이 보기에 방안이 없는 것은 학문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수신의 전통적 방식의 극복 즉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다.

실무와 경세에 대한 유형원의 생각은 17세기 초·중반 대동법 실시를 주장한 일군의 사람들과 닿아 있다. 이식, 김육 등이 그들이다. 당시 일반적 인식은 좋은 수령을 뽑는 것이 폐습의 해결책이라는 것인데, 이는 폐습의 원인을 개인의 윤리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제도의 문제임을 전한 사람은 박지계이다. 그는 상소에서 부세와 관련된 부패의 그물망을 그리면서 수령은 관례대로 위에 상납하지 않으면 사회적 지위를 잃고, 뇌물을 받는 자고 봉급이 적어 어쩔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부패는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제도의 문제였으면 사회적·행정적 관계의 타락을 의미한다.

 

4. 결론

대동법의 제도적 의미는 첫째 여러 수취 항목을 종합했다는데 있다. 대동법은 지방재정을 재확립시켜 국가재정에 포함시켰고, 왕실경비를 정식화 했으며, 운송비·군비·세폐·사신지공비를 흡수했다. 이렇게 여러 항목을 통합했기 때문에 수취 기준을 토지로 일원화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공안개정론은 어떤 제도적 통합도 주장하지 않았다. 둘째, 이 법이 관행이 지배하는 비공식적 부분까지 포함했다는 것이다. 대동법은 비공식 부분을 인정하고 제도화 함으로써 통제할 수 있고, 사회적 작동 가능성의 검증을 완료한 것이다. 실제로 방납은 호조의 경비 등으로 이용되어 단순히 부패나 모리행위로 볼 수 없었다. 셋째 공물가를 거둔 후 사후 점검하는 규정을 마련하여 제도의 구속력의 갖추었다는 것이다. 여미로 예상치 못한 재정수요에 대처하고 이를 점검받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대동법의 사상적 기반은 무엇인가? 기존 연구에는 이를 반주자학적 입정이 표현된 것으로 보기도 했으나 이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공안개정론과 대동법의 차이는 개인의 도덕과 제도의 보완 둘 중 어느 것이 필요한가의 차이이다. 즉 수기와 수기치인의 차이인 것이다.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공안개정론에 반대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때문에 이들이 보여준 원칙은 조선 건국 당사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