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黨爭에서 朋黨으로 패러다임의 전환

同黎 2019. 3. 21. 19:39

黨爭에서 朋黨으로 패러다임의 전환

 

石井壽夫, 홍순민 , 1985, 「후기 이조당쟁사에 관한 일고찰」, 『조선시대 당쟁의 재조명』, 범조사

이태진, 1985, 「조선시대 정치적 갈등과 그 해결」, 『조선시대 당쟁의 재조명』, 범조사

 

 

박세연

 

 

 

 정치사는 정치권력의 형성·유지·대체·소멸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며 그에 따라 정치제도와 정치세력, 정치운영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정치사는 주로 정치세력과 그 세력의 정치운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 조선의 정치사에서는 15세기를 제외하면 士林이라고 불리는 세력이 주인공을 차지하고 있다. 16세기 사화의 과정을 거쳐 17세기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사림은 다시 갈라져 붕당으로 대립하며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갔다. 이들 정치세력과 이들의 정치운영에 대한 용어로는 黨爭, 朋黨, 士林政治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태진은 일제시기 당파성론에 입각하여 당쟁을 부정적으로 보던 시각을 교정하고자 오랫동안 조선왕조의 암흑기로 평가받던 16~17세기의 정치사를 재평가하는 붕당정치론을 주창하였고, 이는 조선후기 정치사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이태진의 붕당정치론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石井壽夫1938년 발표한 논문에 힘입은 바가 많다. 石井壽夫는 붕당기를 조선왕조의 回春으로까지 평가하고, 오히려 탕평기를 조선 정치의 근간이 무너지는 시기로 인식하는 등 당시의 시각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가 당시의 통설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연구가 주로 19세기 天主敎東學 등 민중세력이 정치권력에 대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8~19세기 사회의 동요를 추적하는 가운데 조선 정치세력의 핵심인 사림의 형성과 그들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살펴본 것이다. 그 가운데 石井壽夫는 사림이 중심이 된 정치가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비록 시대적 한계가 보이고, 그가 戰後에 극우 정치가가 되었다는 증언도 있으나2) 그 연구사적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石井壽夫는 먼저 조선의 정치적 기초가 을 기반으로 하는 전제주의와 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주의가 병존하는, 귀족주의적 전제정치를 전제로 하되, 주자학에 기반하는 귀족주의가 우세한 정치체제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전기의 주자학은 불교배척의 이론적 무기로 詞華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16세기 전제왕권이 쇠퇴하고 척족정치가 나타나자 전제왕권은 전통적 귀족인 戚族과 마찰하고 지방혁신세력인 理學波와 제휴하려 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왕권과 이학파도 완전히 결합할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왕권 및 신구 계층의 알력이라는 대립관계가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면서 사화시대가 출현하였다고 보았다. 사화시대는 詞華波의 理學波에 대한 박해기였으나 詞華波는 정치, 사회면에서의 개혁세력인 이학파를 넘지 못했고 국왕이 이학파와 제휴함으로써 이학지상주의의 시대가 열렸으며 그 배경에는 사학인 서원이 있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이학파(사림파)의 등장을 조선의 回春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朋黨의 등장을 들고 있으나, 石井壽夫는 붕당은 이학파 사류의 자기분열이라고 보며 붕당을 단순한 黨爭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일본 학자들이 당쟁을 지나치게 혹평한 것을 비판하며 17세기 초기의 당쟁시대는 귀족세력과 전제왕권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조화를 이룬 태평시대라고 평가하고 있다. 붕당정치를 통해 절대적 시대정신은 국왕이 아닌 의리가 되었으며 학문과 의리가 논점의 중심이 되었다. 즉 학문적 진리로의 귀의가 사림들의 행동에 확실과 열정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의 계급적 특징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붕당을 통해 양반계급이 등장하게 되었다.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관료주의에 근거한 가계의 사회적 가치가 높아지며 그것이 경국대전으로 법제화 되었다. 그리고 이학이 확산되게 되면서 스스로를 士類라고 부르며 儒業에만 종사하는 양반이라는 계급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理이 중심이 되는 국가사회의 성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수가 늘어나는데 비해 관직은 적은 모순이 생겼고 붕당을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자연발생적 현상이기도 했다. 石井壽夫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당쟁을 통해 개인의 능력이 존중받았으며 학문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당쟁이 폐단으로 확대된 계기는 갑술환국이었다. 당쟁이 고착화되면서 개인의 실력 대신 가족주의적 이기주의가 理을 압도하면서 사회가 정체되어 갔다. 이렇게 빈궁한 상태에 빠져 결국 이학을 버리며 천주교, 정감록 등 이학적 사상을 품는 상황이 18세기에 도래하였다. 당폐에 대한 자각이 생기면서 박세채를 시작으로 영조와 정조에 의해 당폐를 제거하기 위한 蕩平이 대두되었다. 탕평을 통해 사색당파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18세기의 조선은 중흥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石井壽夫는 탕평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고 보았다. 결국 양반에 비해 관직은 턱없이 부족했고 양반들은 국왕에 의해 억압받는다고 불만을 품었다. 탕평은 왕권과 신하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왕권으로 이학의 중심인 의리를 폐쇄하고 신하를 억누르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탕평은 당폐를 억제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戚族政治를 불러오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었다.

 탕평은 이학 중심 사회의 붕괴를 가져왔고 결국 정조의 죽음 이후 외척이 世道를 지니고 국왕의 위치를 대신하는 세도정치가 등장했다. 石井壽夫는 세도정치는 결국 붕당정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붕당정치의 말기에 드러난 가족주의적 이기주의가 17세기의 붕당정신을 압도하고 당쟁의 동학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척족정치는 이학의 가치를 무너트렸고 민중들은 반이학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여기에 서구의 침략이 가해져서 조선이라는 중세국가가 붕괴했다는 것이다.

 

2.

 이태진은 石井壽夫의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조선의 정치사를 士禍·朋黨·蕩平·戚族政治로 정리한 점과, 붕당정치를 조선의 回春이라는 긍정적인 면으로 본 것, 또한 조선정치의 흐름을 민중세력의 대두에서 찾고자 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지는 그의 붕당정치론은 기본적으로 士禍·朋黨·蕩平·世道政治로 파악했으며 여기에 사회경제적 요인을 더하여 黨爭을 붕당정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정의하였다.

 

 그는 사화와 당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당파성론을 비판하며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기인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논문에서는 사화와 붕당이 중심이 되는 16세기에서 17세기 전반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재검토하였다. 16세기는 사회경제적 면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우선 농지 개간과 농법 개량에 의해 농업생산력이 상승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방에서 장시가 활성화되는 등 상업이 발달하였고 기술 개발로 광업 역시 발달했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그 초기성으로 인하여 구조적 취약점을 노출하였고 군역의 포납화과 공물의 방납화를 불러왔다. 또한 새로운 재부획득으로 척신의 비중이 높아졌고 권세가에게 경제적 이득이 집중되었다.

 16세기 사화로 대표되는 정치적 갈등은 이러한 계층 간의 알력이 폭발한 것이었다. 지방의 재야지식인층인 사람들은 중앙정치가 해결하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정치적 비판활동을 시작했다. 사림은 소과 합격자인 생원·진사들이 중심이었고 사상적으로는 사장학보다 경학을 중시하고, 경제적으로는 在地 중소지주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성종 초 김종직 등 영남사류의 등용을 시작으로 중앙에 진출하였다. 사림들은 修己治人의 이념을 중심으로 公道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는 단순한 修身論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사림들은 성종대의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운동과 중종대의 향역 보급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경제 변동으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사회 질서를 재확립시키려는 실천운동을 펼쳐나갔다. 성종대 유향소 설립 운동과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운동은 훈구파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무오사화라는 보복으로 돌아왔다. 이후 중종대 다시 중앙 진출의 기회를 가진 사림들은 향약 보급운동을 벌여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향촌 구성원간의 상조를 기본 취지로 하는 향약은 경제적 난국으로 인해 해체되는 향촌 질서 재확립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 중종의 지지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들은 훈척계의 경제적 독점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점차 높여갔다. 이들의 시도는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지방사회에서 서원 등을 통해 사림의 구심점은 단단해졌고 마침내 이황, 이이로 대표되는 학문적 開花로 이어졌다. 즉 사화는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정치적 갈등의 표출인 것이다.

 선조가 즉위하며 척신정치는 일단 제어되고 사림이 중앙에 활발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광해군기는 척신정치의 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림의 붕당정치로 변화하는 하나의 과도기였다. 구체제의 척결 정도를 놓고 대립한 동·서인의 분열은 과도적기 단계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혼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혼란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지양되기 시작하였고, 이후에는 학파에 근거를 둔 정파로서 서인과 남인이 서로 비판적으로 공존해가는 체제로 일신한다. 이들은 서로를 각자의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公道를 이루려하는 붕당으로 인정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朱熹 붕당론의 한계를 지적할 정도로 발전해나갔다.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도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면이 보인다. 서원이 지방의 향권을 주도해 관권을 견제하면서 마침내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는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또한 사림은 상업 자체를 부정하거나 억제하려는 입장을 가지지 않았고 지방 장시는 그대로 존속했다. 즉 붕당정치는 성리학적 원리로 조선을 이끌어가는 사회질서의 재편이었으며 결코 경시될 수 없는 것이었다.

 17세기 전반기에 붕당정치의 구현이 이루어졌지만 붕당 간 공존의식이 무너지면서 정쟁이 격렬해졌다. 이와 같은 배경에 경제의 질적, 양적 성장이라는 변화가 있었다. 성리학적 명분론 위주의 정치운용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종래의 붕당요건이 무너지고 격렬한 정쟁 속에 다시 척신의 비중이 높아졌다. 숙종대부터 무너진 붕당정치는 영・정조대에 왕권의 강화로 일단 제어할 수 있었으나 새로운 경제적 여건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회주도세력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실패하였기에 결국 19세기 세도정치와 민란의 시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3.

 石井壽夫의 연구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은 그가 결국 조선 망국의 원인을 찾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가운데서 16~17세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결론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16~17세기의 붕당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결국 정치세력이 원하는 ‘공리주의’의 방점이 어디에 찍히느냐에 따라 권력이 쉽게 부패할 수 있으며 세도정치 역시 붕당정치의 변형에 지나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붕당에서 말하는 공도가 가족주의를 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결국 붕당을 관직을 둘러싼 싸움으로 보는 기존 당파성론의 시각을 일정부분 공유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태진의 연구는 石井壽夫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견해를 재조명하여 기존의 당파성론을 극복하고 16~17세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그는 해당 시기의 사회경제사적 변화에 주목하였으며 사회개혁세력인 사림이 사화를 통해 제거되지만 지방에서의 기반을 닦아 마침내 중앙정치에 진입하고, 선조와 광해군대의 과도기를 거쳐 인조반정 이후 견제와 균형이라는 붕당정치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형적 붕당은 숙종대 환국을 통해 무너지고 탕평을 통해 잠시 붕괴가 억제되지만 새로운 사회 동력으로의 힘을 잃고 결국 세도정치로 귀결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태진의 연구는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당쟁을 부정적으로만 보던 시각에 붕당정치론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 또한 큰 틀에서는 아직도 정치사 연구에 있어서 붕당정치론이 가지는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을 던져야 할 부분이 있다. 첫 번째, 과연 그가 지적하듯이 인조~현종에 이르는 기간이 ‘전형적 붕당정치’의 모습을 보였는지의 문제이다. 인조반정 세력은  崇用山林’과 함께 ‘勿失國婚’을 맹세하였고 실제 효종비 인선왕후(덕수 장씨), 현종비 명성왕후(청풍 김씨), 숙종비 인경왕후(광산 김씨)·인현왕후(여흥 민씨)·인원왕후(경주 김씨)로 대부분의 왕비를 서인세력에서 배출하였다. 즉 이 시기 사림은 곧 척족의 지위를 가지고 쟁탈을 벌였고, 실제 외척은 군영대장 등을 독점하며 각 붕당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심지어 별다른 배경이 없던 金의 경우 국혼을 통해 자손들이 서인의 핵심이 되었으며 손자 金錫冑의 경우 숙종시대 전반 정국운영의 핵심이었다.

 공신들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이귀, 김류, 최명길, 심기원, 김자점, 원두표, 구굉, 장유 등의 공신세력은 정국운영의 중심이었고, 특히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후반은 거의 공신세력들에 의해 정국이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효종대에는 원두표, 이시백, 이시방 등이 정권의 중핵이었으며 송시열, 송준길 등 산림이 중용되기도 하였으나 공신과 산림을 명확히 가르기에는 불분명한 점도 많다. 현종과 숙종대 초반 역시 김좌명, 김우명, 민유중, 김만기 등 훈척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즉 공신의 훈구세력, 왕실과 혼인으로 이어지는 척족세력, 그리고 사림세력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정치운영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전형적 붕당정치기로 보기엔 의문이 따른다.

 애초에 기존의 사림과 훈구의 구분을 무 자르듯 할 수 없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제 제기된 바 있다. 예컨대 서인 사림의 영수인 김장생이 성종대 대표적인 훈구파인 김국광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훈구파를 중앙 대지주, 사림파를 지방 중소지주로 획일화하여 나눌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 이에 따라 16세기 정치사를 훈구와 사림의 대립보다는 대신·대간·홍문관이라는 제도사적 면에서 바라보려는 연구나3) , 공론이 정치 운영의 중심이 되는 공론정치의 형성이라는 키워드로 보려는 연구4) 가 제출된 바 있다. 덧붙여 이태진이 설정한 전형기 역시 그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점에서 붕당정치의 전형기를 설정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이태진이 제기하는 사회경제적 변화, 특히 경제적 성장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16~17세기 농지개간과 저수지 등의 정비, 농법 혁신으로 농업생산력이 늘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지방 장시가 확산되었으며 鉛銀分離法이 개발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과연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낼 정도의 획기적인 변화였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간척과 관계시설의 정비로 농지의 절대면적이 늘어나고 이를 통해 과전법이 해체되고 지주가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통해 지방사족이 성장하였음은 이미 다른 연구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5) 그러나 사림파가 곧 재지중소지주라는 공식은 앞에서 말했듯이 성립되지 않았으며 지방 장시의 확대와 광업의 발달이 전체 경제 성장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의문이다. 장시는 아직 물물교환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시전 역시 어용 조달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화폐의 사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업 역시 중국의 금, 은 조공 요구를 막기 위해 획기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경제 발전이 새로운 정치 세력을 등장시킬 정도의 혁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정치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  근대사연구회, 1987, :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의 방향」,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 (), 한울아카데미

2)  김용덕, 1986, 「‘朋黨政治論批判 - 朝鮮時代 黨爭性格, 『정신문화연구』29

3)  김범, 2007,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비평사

4)  송웅섭, 2011, 『조선 전기 公論政治의 형성』,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5)  김성우, 2001,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