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英祖가 주도한 少論蕩平에서 老論蕩平으로의 재정립

同黎 2019. 6. 11. 21:37

英祖가 주도한 少論蕩平에서 老論蕩平으로의 재정립

정만조, 1986,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역사학보111

 

박세연

 

 

1. 들어가며

 

숙종의 환국기를 거치며 붕당 간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그 중에서도 경종과 영조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소위 신임의리는 국왕이 역옥에 관계되는 초유의 사건으로 영조의 즉위 이후에도 戊申亂 등의 일대 사건을 겪어야 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면서도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여 신임의리를 확정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기유처분, 경신처분, 신유대훈이라는 國是가 내용을 달리하며 발표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왕과 신료들의 미묘한 절충과 정국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탕평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 글은 이러한 정치의리의 조정과 변화에 대해서 국왕과 각 붕당 및 탕평파의 입장을 정교하게 살핀 논문이다. 정만조는 정미환국부터 신유대훈까지의 정국 운영을 살피며 기본적으로 영조대 정치운영원리를 탕평으로 파악하면서도 명분의 변화에 따라 그 근거가 소론의리에 있을 때는 소론탕평으로, 노론의리에 있을 때는 노론탕평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신유대훈까지의 과정을 기유처분에 근거한 소론탕평에서 차차 노론의 의리에 근거한 노론탕평으로의 변화로 보았고 그 주체로 무엇보다 국왕 영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재조용론도 쌍거호대에서 대탕평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소론탕평과 노론탕평이라는 단어가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이 논문은 그 정교한 분석으로 영조대 중반까지의 정치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림정치의 진행으로 생긴 붕당의 폐단에 대해서 조선사회 스스로가 인식하고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수정하려는 노력을, 의리명분 안에서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조선후기 정치사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후 영조대 탕평 연구의 바탕을 마련하였다는 데에 그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2. 소론탕평의 추진과 노론의 진출

 

영조 즉위 이래 몇 차례 시도만 되었던 탕평책은 영조 5己酉處分 이후 緩論 少論세력에 洪致中 등의 노론 내 온건론자가 연합한 정국이 구성되면서 본 궤도에 올랐다. 정만조는 기유처분 이후 완론세력이 중심이 된 영조 초반의 탕평정국을 少論蕩平이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이때 탕평정국이 趙文命, 宋寅明 등의 소론 출신 탕평론자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유처분 자체가 辛壬獄事에 대한 소론 측 주장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己酉處分壬寅獄(三手獄)으로 단정하는 소론 측 입장을 주로 수용하고 建儲代理에 대해서는 非逆으로 규정해 노론이 정계로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소론탕평은 명분에 있어서는 兩治兩解라는 양비론을 시도하였고, 조용에 있어서는 雙擧互對를 원칙으로 삼았다. 재상이나 청요직에 있어 소론과 노론을 동시에 調用하는 이러한 인사정책은 당파간의 이해조정을 우선으로 한다는 면에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던 일당의 독점을 막고 붕당 간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을 당면과제로 하던 국왕의 입장으로 볼 때 더 나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요컨대, 己酉處分의 명분과 雙擧互對의 정국운영은 소론탕평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두 가지 기둥이었다.

소론탕평의 초기인 영조 6~7년에는 趙文命, 宋寅命 등이 계속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해 銓權을 장악해 탕평세력을 형성하고 쌍거호대를 통해 노론과 소론의 參用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老少聯政이 점차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정은 노·소론의 緩論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고 각 당의 峻論은 각자의 명분으로 기유처분에 반대해 출사를 거부하고 완론에 대한 비판과 배척을 하였다. 노론 준론인 金致垕 등은 충역시비를 명확히 분간하지 않은 채 쌍거호대와 兩治兩解만 일삼는 탕평이 나라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하며 소론 탕평론자를 비판하고 이어 逆魁 李光佐를 두둔한다고 하여 노론 완론까지 極斥하였다. 그러나 탕평의 키를 쥐고 있던 노론 완론은 자신들의 入朝를 정당화하며 조문명, 송인명을 옹호하고 이는 국왕 영조에게 큰 자신감을 주면서 그 입장을 더욱 단호하게 하였다.

이에 영조 8년에는 노론 역시 자세를 바꾸어 기유처분의 전면 부정 대신에 悖子逆孫의 논리로 逆案에 남아있는 李頤命, 金昌集을 우선 伸寃시키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신원은 노론 완론 세력이 주도했으며 이들이 정계에 진출할 때 요구했던 조건이나 양 대신의 신원은 분등설에 기초한 기유처분의 핵심요소로 소론탕평의 명분이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조는 이를 거부했지만 洪致中이 사망하며 노론 완론이 흔들리는 등 정국불안의 조짐이 보이자 영조 9년 정월 十九下敎를 내려 다시 한 번 國是를 천명하였다. 이는 노론이 人君을 선택하려 했다는 擇君說과 노··남인 모두 이 나왔다는 三黨俱出逆說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이는 기유처분을 재확인하여 노론 준론의 요구를 꺾고 소론탕평을 강화해주는 논리였으며, 자신의 혐의가 걸린 신임옥사를 점진적으로 해결하려 했기에 아직 양 대신의 신원은 이르다는 영조의 판단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런데 十九下敎의 판정은 한편으로는 택군설의 혐의만 해결된다면 양신을 신원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 되는 것으로 이는 미리 노론으로 하여금 양 대신의 신원에 문제가 되는 점을 제거하거나 변명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閔鎭遠 등 노론은 택군설의 불씨가 된 徐德修 등의 일은 건저대리를 추진한 四大臣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하는 등 영조가 문제점을 제시하면 그것을 논파함으로써 신원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외면상으로는 노론 측에 불리했던 십구하교 이후 오히려 노론의 관직 진출은 늘어나고 양 대신의 신원요구는 더욱 활발해졌다.

노론의 정계진출은 기유처분 이후부터 시작되었지만 십구하교가 내려진 시기를 전후해 의정과 이조판서 등에 진출하며 더욱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쌍거호대를 넘어 소론세력에 근접할 정도로 청요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소론 측으로서 불안감이 더해졌고 소론 단독의 힘만으로는 노론에 대항하기 벅차게 되었다. 이에 소론 준론인 박문수 등은 남인과 북인까지 끌어들인 대탕평을 통해 노론을 견제하고자 했다.

관직에 진출한 노론은 다시 양 대신의 신원운동을 추진하였다. 영조 11년 사도세자의 탄생으로 大赦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기유처분 이후 처음으로 양 대신의 신원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 서덕수가 자신의 처조카라는 사실까지 거론하는 半夜下敎를 통해 신임의 일을 논쟁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김창집은 놔두고 이이명만 신원하고자 하였으나 노론의 반대로 중단하였다. 이후 동년 11金在魯左相, 송인명을 右相, 조현명을 吏判에 발탁해 탕평에 관한 일을 재삼 신칙하였는데, 이제 탕평책이 노론의 현저한 신장을 가져왔으므로 그 바탕 위에 소론 내지 탕평세력의 손을 빌려 신임문제에 대한 해결에 착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재로와 송인명의 발의로 이건명, 조태채의 復諡가 시행되어 기유처분에 대한 최초의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에 대한 소론의 반발은 엄청났다. 소론의 불안은 영조 137월 노론 尹汲의 상소에서 소론이 신축년의 代理를 원수처럼 여긴다는 말에 폭발하였는데, 이는 소론을 으로 보는 견해였기 때문이었다. 이광좌 이하의 소론은 이는 기유처분과 십구하교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노론을 맹공격하여 탕평정국은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영조는 소론의 불만을 진정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아 시임대신인 김재로와 송인명 및 노·소론의 준엄한 이들을 파직하고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기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미환국 같은 것은 아니어서 김재로와 송인명을 좌우상에 임명하고 노소론을 동시에 등용해 종래 기유처분 이래의 소론탕평을 최대한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諸臣을 불러 모든 당론을 중지하고 混沌開闢한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러 소론탕평의 위기는 일단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혼돈개벽으로 정국이 근본적으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노론은 영의정 이광좌에 대한 탄핵을 통해 기유처분을 무효화하려고 하였고 영조는 이를 오히려 조장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정국을 이끈 인물은 송인명으로 그는 노론 言官扶護하려는 영조의 뜻에 부합해 이광좌를 논척하다 죄입은 언관의 석방을 주선하였다. 때문에 기유처분을 무효로 하는 경신처분이 영의정 이광좌 재직 중에 일어난 것은 실은 영조의 계산된 인사정책이었다고 보인다. 쌍거호대를 통한 노론의 성장과 노소론간의 보합은 넓은 안목에서 본다면 경신처분과 노론탕평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던 것이다.

 

3. 노론준론의 진출과 경신처분

 

영조가 혼돈개벽을 선언한 이후 주목되는 현상은 노론 준론이 점차 조정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조 14년 대표적 준론 노론인 兪拓基가 출사하였던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노론 준론의 출사는 이미 십구하교 이후 민진원이 올린 상소에서 신임옥사와 관련한 노론의리만 伸明된다면 소론과 同仕할 수 있음도 밝히고 있어 보다 유연한 자세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임의리에 관한 거론은 이 시기 오히려 영조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도된다. 소론 영수 이광좌가 영의정에 있고 소론과 노론이 대등한 관계를 가지게 된 상황에서 신임의리를 재조정할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왕은 우선 壬寅獄의 대역죄인인 왕비의 조카 서덕수의 신원을 제기하는데 이는 왕비의 모친의 사망을 계기로 왕비를 위로한다는 명분이었다. 송인명과 조현명의 주도 아래 서덕수의 신원은 채택되었다.

신임옥사에 대한 영조의 기본적 불만은 자신이 三手逆에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였다. 三宗血脈을 주장하는 영조에게 이 혐의는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양 대신의 신원보다 자신의 혐의를 밝히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고 궁극적으로는 壬寅獄誣獄으로 만들어야 했다. 서덕수의 신원은 그 첫 시도이면서 동시에 기유처분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소론의 반발이 있었지만 영조는 이를 선위하겠다는 하교로 막아내어 서덕수의 신원을 성사시킨다.

신임옥사에 대한 재조정을 위해 영조가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정치세력을 결집시켜 기유처분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조현명, 송인명 등의 탕평론자들을 중심으로 점진적 조정을 꾀해왔지만 양 대신의 신원과 임인옥의 反案문제는 지금까지의 탕평을 이끈 기유처분을 무너트리는 것이기에 영조는 강력한 추진 세력을 필요로 했다. 이에 영조 158월 영조는 私親墓不尊奉을 구실로 송인명, 徐命均을 파직하고 대신하여 김재로, 유척기 등을 特拜하였고 이조판서 역시 조현명에서 趙尙絅으로 교체해 인사권이 노론에게 맡겨져 쌍거호대의 원칙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비해 소론은 점차 고립되고 있었다.

노론은 영조의 의도대로 정치적 우세를 기유처분에 대한 수정요구로 연결하여 영조 1511월 유척기의 주도 하에 이이명과 김창집의 신원을 발의했고 영조는 다음해 정월 노론의 諸臣과 송인명, 조현명을 동반한 자리에서 양 대신의 신원을 결정한다. 이에 기유처분을 수정하게 되었고 소론탕평은 붕괴되었다. 소론과 탕평파들은 모두 큰 불만을 표시하고 특히 조현명은 자신이 주도한 탕평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물러났으며 송인명은 영조의 결정을 이해하면서도 노론의 지나친 발호를 막고 소론 역시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소론보호론은 궁극적으로는 임인옥을 완전한 반안과 소론에 대한 토역까지 추진하려는 노론에게 큰 반발을 받았으나 영조 역시 임인옥을 反案까지 밀고 가려 했기 때문에 탕평론자를 재기용할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노론의 반발을 방관만 하였다.

한편 노론의 임인옥 반안에 대한 추진은 더욱 빨라져서 영조 163월 김재로는 임인옥 被罪人의 신원을 요청하였고, 영조가 이천기, 김용택까지 신원하자는 것이냐 반문하자 이들은 어리석은 무리일 뿐 역이라고 하는 것은 원통하다고 하였다. 영조도 무언의 동의를 하여 이들의 신원은 사실상 이루어졌으나 정식 처분은 영조에 의해 미루어졌다. 영조로서는 양 대신의 신원보다 자신의 삼수역과 관련된 혐의를 벗는 것이 우선이었다. 영조는 노론이 당심에 젖어 노론 피화자의 신원만을 중시하지 않았는지 의심하였으며 소론의 반발을 과소평가하고 지나치게 반안을 서둔다는 불만도 하였다. 결국 영조는 임인옥 논의 3개월 후에 노론 준론 세력을 퇴출시키게 된다.

임인옥 피화자의 신원과 반안의 처분이 쉽게 나지 않자 노론은 소론에 대한 토죄론을 병행하였다. 노론은 무옥의 근원은 劉鳳輝이며 이를 치죄하지 않았다며 소론의 이광좌 등 임인옥 관련 소론대신의 추탈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유척기가 배후에서 삼사 등을 이용해 소론을 모함하였다고 하며 우의정 유척기를 체직하였다. 영조는 반안의 준비를 마쳤고, 자신의 혐의를 노론보다는 소론으로부터 벗는 편이 명분상 떳떳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노론 준론을 대신해 송인명과 조현명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들은 노소론의 주장과 이해를 재조정하며 정국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혐의를 벗기는데 꼭 필요한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반안을 수행하면서 소론의 반발을 무마하는 역할도 이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영조는 노론을 대표하는 김재로와 소론을 대변하는 조현명, 송인명과 함께 이들의 의견을 정출하여 임인옥 반안을 진행하였다. 영조는 반안을 해도 褒贈은 없을 것이라고 하고 김재로 역시 이후 소론에 대한 請罪는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송인명과 조현명은 불안해하는 소론들을 대변하여 김용택과 이천기의 신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영조는 아직 소론의 의견을 꺾기에는 정국안정에 대한 자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조현명과 송인명의 논리를 일면 인정하고 다만 임인옥이 무고에 의한 무옥임을 밝혀 명칭을 이정하고 피화자에 대한 신원을 강구하도록 하는 경신처분을 결론지었다. 이로써 신축, 임인옥을 모두 역으로 규정한 기유처분은 이를 모두 무옥으로 판정한 경신처분으로 바뀌면서 노론 측 명분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한편 소론탕평은 완전히 임무롤 완료하였고 영조는 새로운 탕평을 조직하여야 했다.

 

4. 탕평책의 재정립

 

경신처분으로 노론세력이 크게 신장되었고 소론세력과 탕평세력은 와해되어 있었으나 경신처분 이후 정국이 노론 일당으로 형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영조는 자신의 혐의를 소론의 힘으로 밝히고 공의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소론세력을 정권에서 배제시킬 수 없었다. 이에 경신처분을 국시로 하는 탕평책이 노소론의 연정형태로 유지되어야 하였다. 그리하여 영조는 탕평정국을 다시 구축하는데 정만조는 이를 대탕평, 혹은 노론탕평이라고 칭하고 있다.

탕평의 재정립을 위해서는 먼저 와해된 탕평세력을 재결집시켜야 했다. 영조는 송인명과 조현명을 재기용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고립된 처지와 인물조용의 어려움을 들어 탕평세력의 재조직을 요청했다. 이에 영조는 노론 완론인 김재로를 영의정에, 송인명을 좌의정에, 조현명을 우의정에 특배하고 노론 元景夏와 소론 李周鎭을 더하여 탕평을 추진할 중추세력으로 삼았다.

이주진은 소론 완론으로 좌의정 李㙫의 아들이며 조현명의 신임을 받으며 탕평에 동참했고, 원경하는 노론 淸流를 자처하며 왕실의 외손으로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독자적 탕평론을 전개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원경하는 노론으로 사대신의 신원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양수의 붕당론을 비판하며 오직 붕당 자체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박세채와 조현명이 朋黨亡國論에 기초하면서도 붕당을 부정하지 않고 각 붕당별로 邪邊을 제거해 眞朋을 만들면 저절로 붕당이 소멸될 것이라는 하였던 의견보다 더욱 급진적인 것이었다. 저자는 원경하의 파붕당론이 주자-이이의 붕당설을 부정한 것이 탕평론이 이룩한 정치이론 상 가장 큰 성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원경하의 이러한 부정적 붕당론은 그가 조현명, 송인명과 함께 탕평론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이 붕당의 이해조정을 꾀하기 위해 창안한 쌍거호대를 비판하게 하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그는 남인과 소북에도 명의에 간여되지 않는 자가 있으며 用人는 오직 당색을 떠난 재주에 있을 뿐이라는 대탕평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당장 조정의 안정과 붕당의 격화를 막으려는 조제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葉向高의 조정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아예 노소분쟁의 불씨가 되는 壬寅鞫案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하는 등 적극적으로 소론을 보호하고 정국의 안정에 힘썼다. 원경하는 소론탕평론자인 조현명, 송인명에 견줄만한 노론 출신의 탕평론자였다.

그리고 경신처분 이후 새롭게 남인 吳光運이 정국에 참여하였다. 그는 무신란의 공으로 영조의 후대를 받아왔으며 소론탕평의 쌍거호대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경신처분 이후에는 역란의 근본은 붕당에 있다 하며 붕당망국론을 펼치며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皇極蕩平이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임인국안의 폐기를 주장하는 등 원경하와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고 조현명과도 굳은 친분을 유지하였다. 경신처분 이후 탕평의 주도세력은 노론의 명분 하에 김재로·송인명·조현명의 三相과 함께 원경하, 이주진, 오광운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세력을 결속시킨 왕과 탕평세력은 탕평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당인 간 분쟁의 요소를 제거하였다. 하나는 吏曹銓郞通淸權翰林回薦을 폐지하는 제도 개혁이었고 하나는 서원의 훼철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우선 인사문제는 탕평의 근본이 黨人의 이해가 상충되는 인사관계의 조정에 있으니 이를 안정시킬 새로운 인사정책을 정해야했다. 그러나 기존의 쌍거호대는 너무 구차하다고 이미 배척을 받았고 영조 역시 이에 동조해 惟才是用을 강조하였다. 끝까지 호대론을 주장하던 조현명은 柳壽垣이 제시한 官制序陞圖說을 참고한 관제 개혁을 제시하였다. 이는 노론계가 우위를 차지한 정국에서 銓注權을 노론이 전횡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현명의 의도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이에 반대하고 대신 당쟁격화의 근본원인이 되는 전랑통청권과 한림회천법을 폐지하였다. 이는 영조가 청요직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관제 개편으로 또 다른 분란을 가져올 수 있으며 소극적이더라도 전랑과 한림을 통제하여 당쟁격화의 요인을 줄이고 왕권을 신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조전랑의 언관 통청권은 이조판서에게 돌아가고 翰薦法會圈으로 변하여 재상에게 넘어갔다. 이조판서를 탕평파가 장악한다면 인사와 언론권마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영조는 숙종 40년 이후에 사사로이 창건된 서원과 사우에 대한 훼철을 명하였다. 서원이 당론의 온상이 되며 각종 사회적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영조 17년 함경도 북청의 老德書院에서 이광좌를 사사로이 追配한 일이 발생하자 朴文秀가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며 노론과 소론의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영조는 삼상과 협의를 거쳐 추배를 백지화하면서 아예 숙종 40년의 금령을 기준으로 사사로운 서원의 건축을 막게 했다. 이는 경신처분으로 인해 관계된 피화자의 신원과 포증으로 서원과 사우가 건립되어 지방까지 시비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영조는 새로운 탕평세력을 구축하여 정쟁의 요소를 미연에 방지해 탕평의 정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경신처분 이후 탕평의 기반이 마련되자 불완전한 경신처분의 명분을 확정지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경신처분으로 노론의 명분이 섰지만 反案은 확정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신처분 이후 우선 남인 오광운은 建儲代理는 삼종혈맥에 비추어 누구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며 영조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김용택, 이천기의 일은 거슬러 올라가 경종의 원자정호의 문제로 인현왕후에서 불충했던 閔黯에게까지 죄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三黨俱逆의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경신처분을 받아들이면서도 완전한 반안에는 반대하였다. 반면 노론은 반안을 독촉하며 조현명이 주장한 분등설을 비판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소론은 노론의 반안을 막기 위해 김용택 등 임인옥의 피죄인들 일부가 경종에 역심을 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고 그 결과 僞詩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조현명이 김용택과 이천기가 경종에게 역심을 품은 것이 아니냐는 말에 노론인 閔享洙가 변명하며 숙종이 김용택과 이천기에게 延礽君延齡君의 보호를 부탁했으며 그 증거로 시를 지어 연잉군이 쓰게 하여 주었다고 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영조가 부정했으며 위작임이 판명되었다. 이에 소론은 노론이 거짓을 꾸민다고 노론을 공격하였고 영조 역시 김용택의 족형제인 金福澤을 잡아들여 그 죄를 다스려 장살하였다. 이에 따라 노론 일부가 당시 경종에게 불충했음은 사실로 드러나고 노론의 반안 명분은 약해지게 되었다. 영조와 조현명, 송인명의 의도는 반안 시에 소론이 명분을 고수한 채로는 도저히 벼슬에 나올 수 없어 탕평정국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노론의 일방적 우세를 꺾고자 한 것이었지 그에 따른 소론의 명분을 확정지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현명, 송인명과 연결된 李匡誼가 노론의 삭직을 요청하는 상소에 자신을 무함하는 말이 있다고 하며 이와 같은 말이 나온 것은 아직 君誣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불만을 표시하였다. 영조은 이광의의 건을 처리하며 노론의 반안논리인 君誣를 직접 발언하며 이광의와 혼인관계에 있는 조현명, 송인명에게까지 자신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이와 같이 영조는 자신의 혐의가 걸린 辛壬의 문제를 소론의 손을 통해 노론의 주장대로 판정되길 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근거해 저자는 이 시기 이후의 탕평을 노론탕평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辛酉大訓은 경신처분의 내용을 확정짓는 것으로 이광의의 옥사가 마무리되는 영조 179월에 오광운이 군무를 빙자해 당론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三手獄案을 폐기하고 세간의 의혹을 푸는 大誥를 내려줄 것을 청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영조는 삼상을 불러 의견을 물었고 김재로는 미온적 반응을 보였지만 조현명과 송인명을 적극 찬성하였다. 이틀 후 조현명과 송인명은 국안을 이정하는 과정에서 목호룡이 영조를 무함한 일을 알게 되었으며 피죄인을 신원해야 하지만 김용택 등 수인은 건저를 빌어 大體에 누를 끼쳤기 때문에 신원은 반안을 의미하므로 불가하다고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에 영조는 최종적으로 반안을 하면서도 김용택과 이천기의 죄는 別案으로 남겨두는 절충안을 택하였다. 이후 수십 인의 諸臣을 불러모아 노론과 소론을 함께 비판하며 자신의 안을 제시하고 대부분 찬성하자 대고를 지어 告廟하기로 결정했다.

대고의 내용은 위의 내용에 조현명이 제시한 내용이 들어가 확정되었는데 핵심적인 부분은 첫째 신축년 건저는 대비와 경종의 하교에 따른 것이며,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은 무옥이므로 국안은 소각하고 피죄인은 사면하되 김용택, 이천기 등은 역으로 단정해 별안에 둔다는 것이다. 이로써 마침내 영조의 즉위 이후 여러 곡절을 겪은 이 문제는 노론 측 주장을 거의 반영한 신유대훈에 의해 달성되었다. 또한 이는 영조가 경신처분 이후 추진하던 탕평책의 정치명분이 확립된 것을 의미하였다. 저자는 그 정치명분이 이러한 노론 명분 아래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를 노론탕평이라 규정하고 그 성립을 신유대훈 이후부터라고 하였다. 영조의 정통성이 확정되고 이를 소론과 남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과정을 거치며 그 이후 국가의 제반 정책에 대한 개혁에 들어갔던 것이다.

 

5. 나가며

 

정만조의 이 논문은 이전 영조 초반 정국운영에 관한 논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소론탕평과 노론탕평이라는 용어를 공식화하면 영조대 초반과 중반의 정국운영방식을 규정하였다. 과연 그 단어가 합당한지를 차치하더라도 본고가 분석하고 있는 영조대 정국 운영은 가능한 사료한 행간까지 파악하려 노력하며 국왕과 각 정치세력의 숨은 의도까지 분석하여 영조대 탕평에 대한 논의를 한층 풍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영조 정국운영이 완론탕평이라는 하나의 역사용어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정치적 변동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은 연구사에 큰 의의를 지닌다. 또한 탕평을 당위가 아닌 당대의 필요성에 기반한 정국운영으로 살펴봄으로써 탕평기를 붕당정치의 난맥상을 국왕의 권위로 누르던 시기라는 부정적 인식에 이의를 가하였다.

다만 소론탕평과 노론탕평이라는 역사적 용어가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과 같이 정미환국 이후의 정국과 경신처분 및 신유대훈 이후의 정국에는 정치명분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명분이 전자는 소론 측에 후자는 노론 측에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명분만으로 정국운영의 특징을 규정짓기에는 다른 요소들이 너무 강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모든 것을 주도한 것은 국왕 영조였으며 명분의 조정 역시 영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노론탕평이라 할지라도 정치명분만 노론이었을 뿐 실제 운영은 탕평파와 삼색당의 다양한 인원이 참여하고 있었기에 노론탕평이라고 함은 노론 만에 의해 주도된 탕평이라는 오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조대 정국을 구분할 때 정치명분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정치세력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아니면 제3의 요소를 중심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 든다.

또 한 가지 영조의 경세론은 정치명분과 관계없이 유지되었는가? 소론의리에서 노론의리로 국시를 바꾸는 것과 삼상과 육경 등 정국주도세력을 바꾸는 것은 영조대 정책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된다. 비록 본고에서 주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논문에서 탕평책이라는 정국운영과 경세론 등 정책결정을 연관 짓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작게는 당색이나 자신이 위치한 의리에 따라 (과거의 특정 붕당=특정 계급을 지목하는 연구는 제외하더라도) 경세론이 과연 변화하는가, 혹은 정치명분과 경세론이 연결되는가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영조는 재위 1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책결정에 있어 이러한 정치의리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든다. 그리고 신유대훈 이후의 탕평이 노론탕평이라면 그것이 영조 재위 전반과 후반 경세책의 구분점이 되는 지 또한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