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최성환, 2009, 正祖代 蕩平政局의 君臣義理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

同黎 2019. 6. 11. 21:42

영조대 후반 大義理의 확정과 이를 자임한 세손의 등극

최성환, 2009, 「Ⅱ. 영조대 후반 辛壬·壬午義理 확정과 정국동향, 正祖代 蕩平政局君臣義理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박세연

 

 

들어가며

 

숙종 후반에서 정조에 이르는 기간은 國是로써 각종 의리가 중심이 되어 정치명분으로 떠오른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정치의리는 단순한 당파의 정치 명분이 아니라 국왕의 계승을 둘러싼 의리로 충역시비가 갈리는 매우 민감한 정치 명분이었다. 때문에 기존 18세기 정치사 연구는 주로 정국의 동향이나 국왕과 각 당의 대립과 조제보합 등을 중심으로 놓고 연구해왔다. 특히 기존 붕당정치론에서는 당파 간 공존이 무너지는 붕당정치기의 와해, 몰락기로 숙종대 이후의 정치사를 규정하였고, 탕평정치는 강력한 국왕권을 중심으로 이러한 와해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결국 정조의 죽음 이후 왕권의 약화로 인하여 결국 세도·벌열정치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 연구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19세기 세도정치와 망국으로의 수렴이라는 결과론적 해석을 18세기에 대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영조와 정조 시대를 근본적 개혁에 대응하지 못한 시기로 규정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경제적으로 노출되던 모순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19세기의 파탄을 노정하는 시기로 봄으로써 이 시기를 해석하고 있다. 두 번째는 영조와 정조의 정치가 강력한 왕권에 바탕에 두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러한 권한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두 왕은 모두 즉위에 이르기까지 정통성에 여러 문제가 있었으며 즉위 후 촉발되는 여러 문제들 역시 왕위 계승에서 비롯된 의리문제에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이 탕평정치의 근거로 제시되면서 상호 설명이 모순되는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바탕에 두고 이 시기를 르네상스에 비견하는 眞景時代論, 정조의 정치사상을 재평가한 民國論이 있다. 두 연구 모두 탕평시대를 새롭게 조망하고 그 긍정적 요소를 바라보려 했다는 데 의의가 있으나 역시 근대주의적 시각이 혼용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계몽군주 정조와 이에 호응하는 개혁세력 대 보수세력의 대립양상을 부각하거나 개혁세력의 탈 성리학적 성격을 강조하는 점에서 당대의 정치이념과 일정한 거리를 보인다고 하겠다.

한편 본 연구는 탕평정치를 조선 정치의 근본이념인 주자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던 정치의리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천착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특히 정치의리를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실제 정치를 움직이는 역학의 근거로 보고 거기에 실질적 힘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국왕과 각 정치세력이 각자의 의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그러한 의리들이 단순한 사적 의리의 영역을 넘어 공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국왕이 자신이 생각하는 至公의 의리를 추진하고 그 가운데 포용력을 발휘하여 정국운영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그에 따라 19세기 조선의 파탄 역시 탕평정치의 실패가 아니라 의리가 공공성을 상실했을 때 오는 결과로써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다른 연구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국왕의 정책 결정 역시 이러한 의리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어 추후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 서론

 

저자는 먼저 조선후기의 정치사 연구가 당파성론에 입각한 부정적 인식을 비판,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붕당정치론이 출발했으나 이는 환국과 탕평정치를 사림정치의 본질에서 벗어난 쇠퇴기로 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본질적으로 붕당정치론은 각 시기에 대하여 臣權 혹은 王權 위주의 단절적 인식을 가지고 있어 국정운영에서의 공론의 의미가 제시되기 어려웠다고 보고 있다. 왕권과 신권을 상보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립과 상호제약의 관계로 봄으로써 在下 공론에 기초한 것을 붕당정치의 전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정치를 위해 공론이 대신에게 있는 것은 주자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며, 왕과 대신을 중심으로 한 관료정치가 붕당정치기에도 여전히 중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아, 탕평정치기에 재하 공론을 절제시켜 公論在上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국왕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조치였음을 역설해 기존 붕당정치론의 탕평정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당쟁과 탕평은 모두 성리학적 정치론의 시대적 전개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이들 모두 국왕과 사대부의 共治라는 기본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탕평정치는 주자학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주자의 통치론 자체가 聖學의 주체인 군주에 의해 달성되는 內修外攘論을 기초에 두고 있었다. 때문에 주자학을 臣權 위주의 학문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며 황극태평론과 붕당론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병행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선은 군주의 집권성과 양반 사대부의 봉건성이 결합된 원리로 통치되고 있었다. 다만 군신공치의 전제였던 군신의리와 그 근거인 공론을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가를 두고 山林 郎官·臺閣이 공론을 주도하던 체제와, 이것이 부정되며 大臣이 주도하던 체제가 붕당정치와 탕평정치를 구분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탕평정치는 국왕이 중심에 서고 재상이 보좌하며 대간이 보충하던 건국 초의 형식으로 정치운영방식을 되돌리는 것이기도 했다.

탕평정치는 기본적으로 破朋黨을 지향했지만 현실의 당파와 그에 따른 의리론의 경쟁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쟁의 방식에서 붕당정치와 달리 대신급 주론자의 역할이 강조되었을 뿐 여전히 공론 주도를 위한 의리론의 대결은 치열했다. 저자는 탕평 연구에서 군주가 공의를 매개로 대신들과 공치하는 방식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군주가 다양한 정치세력을 조제·보합하는 통치술의 차원에 주된 관심을 두었으며 붕당간 의리가 충돌하는 가운데 군주가 어떤 의리를 견지하며 신하들과 공유했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소홀했다. 의리론을 대개 세력 분열의 종속변수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명분 정도로만 인식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당쟁에 수반되는 격렬한 의리논쟁 본연의 정당성 및 시대적 의의는 외면하고 단지 붕당의 공존만이 사림정치의 이상인 듯 설정한 것이다.

이렇듯 정치의리에 대한 당파적 이식 때문에 군주의 정치 의리 역시 독립된 실체로 연구되지 않았으며 時派辟派는 단지 정조의 의리 동조 세력과 반대 세력이라고 정리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당시 정치세력을 개혁과 반개혁 세력으로 양분하거나 국왕과 신료들이 각각 사적, 당파적 의리를 공의로 표방하여 당파적 투쟁을 했기 때문에 결국 세도, 벌열정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강조하여 탕평정치가 추구하던 의리의 실제와 그것을 합의하고 구현하려던 국왕 및 신료의 노력과 성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시비가 정리되어 公義라는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 國是가 되면 이는 당쟁의 대상이 아니라 군신공치를 위한 사회적 규범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론과 당의 의리가 충동하는 측면뿐만 아니라 공의와 국시가 확정되는 과정과 그 함의 역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국왕의 의리와 특정 당파의 의리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지양하며 군신의리의 확립 과정과 그렇게 확립된 국시에 의거해 자신들의 당론을 수정하고 국시 확정에의 기여를 강조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영조대 후반에서 정조대 탕평의리의 확정과 전개 과정을 정리하고자 하고 있다. 영조와 정조대 편찬된 각종 의리서의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고 실록에서 파악되지 못하는 부분을 각당의 당론서를 통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점이 연구방법상에서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2. 辛酉年 大訓의 수정과 신임의리의 확정

 

영조의 탕평정치는 완론세력의 조제를 위주로 전개되었지만 정치의리 면에서 몇 차례 수정을 가했다. 무신란 이후 정립된 己酉處分은 노론 4대신 중 이이명, 김창집을 悖子逆孫의 논리로 여전히 죄안에 두는 것으로 영조가 관련된 三急手의 의혹을 남겨둔 것으로 노론, 소론, 영조에게 모두 구차한 절충 의리였다. 이후 영조는 즉위의 정당성을 분명히 천명하기 위해 삼급수의 을 인정해 죽은 자신의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하였으며, 탕평파와 노론의 협력을 통해 壬寅獄誣獄으로 규정하고 김창집과 이이명을 신원하는 庚申處分을 내리고 다음해 大訓을 선포하여 노론의리에 기반한 탕평을 공식화했다. 신유년 대훈의 핵심은 신축년 建儲는 신하들의 간여가 아니라 慈聖景宗의 하교에 의해 三宗血脈인 영조가 정당하게 된 것이며, 목호룡의 고변과 임인옥은 무고였으므로 노론 피죄인을 신원하되, 김용택 등 노론 5布衣僞詩 등으로 영조를 무함의 지경에 빠트렸으므로 별도의 逆案을 만들어 올려둔다는 것으로 기존의 소론의리를 무너트린 것이었다. 신유대훈은 노론의리의 공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국왕이 주도해 각 정치세력이 합의하여 즉위 의리의 정당성을 國是 차원으로 천명했다는 의의가 크다.

신유대훈은 핵심 사안인 경종의 질병이나 노론 5포의에 대해서 모호하게 처리하여 노론과 소론의 의리를 절충하였다. 이에 대해서 소론 준론은 노론 5포의의 역심이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불만을 가졌고 노론 준론은 이들을 역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군주를 무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辨聖誣라는 명분으로 신유대훈을 통해 드러난 소론의 건저·대리 방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결국 대리를 반대한 소론 5대신을 대역으로 토죄할 것인지 여부가 영조대 중반 최대의 정국 현안이 되었으며 이 문제는 영조 25년 세자의 대리청정 국면을 맞이하여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었다.

노론 준론은 대리청정 중인 세자에게 부왕의 무함을 푸는데 앞장설 것을 요구하였다. 소론 완론은 이에 점차 동조하였으나, 이광좌-이종성·박문수 계열의 소론 준론은 이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다. 노론 준론은 변성무를 내세우며 특히 이광좌·이종성을 강력해 공격하였다. 문제는 이 정치적 대립의 해결에 대한 부담을 대리 중인 세자가 지게 되었으며 영조도 은근히 이에 대한 기대를 표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조와 노론은 영조가 직접 해결할 수 없는 임인옥과 관련한 문제를 세자를 통해 해결하려 하였기에 대리청정을 맡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자는 대훈의 처분을 거론하며 이에 대해 소극적 반응하였고 이에 따라 영조 28년부터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신료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정국 주도세력인 노론 내에는 탕평당 외에도 홍문록 문제 등 인사문제를 계기로 東黨·南黨·中黨 등이 분화된 것이다. 노론 준론이었으나 탕평에 동의한 李天輔를 중심으로 한 동당과 이천보의 인사권 문제에 불만을 가진 남당이 분화하였다. 소론 탕평파 역시 분화되었는데, 송인명은 탕평의 규모를 넓혀 준론 이종성 등을 천거하였고, 반면 정우량·정휘량 등은 기존 완론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정우량·정휘량 세력은 영조의 척신으로 정우량의 아들 정치량이 화완옹주와 혼인하며 더욱 세력이 강화되었고, 소론 준론을 공격하였으며 이에 반해 이종성은 준소계 인재를 대폭 끌어들여 세력을 키워 대결 구도를 이루었다. 균역법 역시 정치세력 개편의 계기가 되었는데 탕평관료들이 마련한 불완전한 균역법의 급대 방식에 다수의 노론과 준소가 비판적 입장을 가진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노소론 당파를 넘는 새로운 결합이 이루어져 노론 홍계희·김상로-노론 남당-소론 완론과 노론 홍봉한(북당)-노론 동당-소론 준론의 느슨한 연대가 이루어졌다. 결국 탕평관료들은 자신의 처지와 노선에 따라 노·소론내 분당들과 새로운 결속을 모색했던 것이다.

한편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자세 문제로도 정치세력이 재편되었다. 세자가 신유대훈 수정 요구에 미온적인 것을 비판하며 문제 삼는 부류는 노론의 홍계희·김상로 및 이를 후원하는 남당과 소론의 정휘량 세력 등이었다. 반면 노론의 동당(이천보)와 중당(유척기), 소론 준론 이종성 등은 세자의 보호를 위해 협력하였다.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또한 이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협조하고 있었다. 이들은 소론 준론 및 외척 홍봉한과 협력한다는 문제 때문에 노론 청류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결국 기존의 정치세력은 세자위해 세력과 세자보호 세력으로 나누어져 붕당 구도를 탈피해 새롭게 결집하였다.

이러던 중 영조 31년 발생한 乙亥獄事는 기존의 대훈수정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급소와 남인의 주도 아래 나주괘서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을해옥사에서 영조는 친국에 남인과 소론 관료를 참여시켜 노론의 사건 확대 의도를 막을 수 있었다. 영조는 신임의리의 문제를 분명히 하여 승통의 의리를 밝혀 소론이 더 이상 당론에 빠져 무모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영조는 急少와 이에 동조하는 준소를 구분하여 충역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시켰다. 영조는 준소에게 급소와의 관계를 분명히 정리하지 못한 것을 반성 받았고 을해옥사를 마무리 지었다.

영조는 옥사를 마무리 짓으며 난역의 근원이 임인년 무옥에 대한 미흡한 처벌과 모호한 의리 천명 때문임을 인정하고 이를 바로 잡았다. 영조는 당시 김일경에게 협조한 이들 및 유봉휘·조태구를 추가로 역률로 다스리고, 이광좌·최석항 등의 관작을 추탈했다. 또한 임인옥에 대한 의리를 바로잡아 대훈의 뒤에 소론 5대신의 대역 및 죄과를 차등 있게 처분했다는 교서를 첨부해 반포했으니 이것이 을해년 添刊大訓이다. 添刊大訓에는 급소와 준소의 잘못된 의리를 더욱 분명히 하는 내용을 첨부하였으며 이로써 경종-영조의 삼종혈맥의 정당한 수수와 이에 근거해 건저와 대리를 청한 노론 대신들의 , 이를 방해한 소론 대신들의 을 분명히 하는 辛壬義理가 확정되었다. 이때 확정된 의리를 영조는 大義理라고 부르며 더 이상의 분란을 금지하였으나 노론 5포의의 문제는 여전히 거론되지 않아 논란을 불씨를 남겼다.

添刊大訓을 반포한 영조는 闡義昭鑑을 통해 신임의리를 천명하도록 하였다. 천의소감의 편찬은 소론 준론을 배제한 채 노··남인이 두루 참여하였으며 도제조로 김재로·이천보·조재호가 임명되고 원경하가 실무를 주관했다. 그러나 편찬 과정 가운데 調劑論을 견지한 노론 동당과 一君子黨論을 견지한 남당의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남당에 동조한 한계희와 김재로 등은 역적의 죄를 장희빈 토죄에 반대했던 숙종대까지 소급해야 했다고 하였으나, 원경하와 이천보 등 동당은 이러한 주장이 신임의리를 기사·경술환국까지 소급하고 더군다나 경종을 핍박하는 것이 된다며 반대했다. 결국 영조가 개입하여 탕평을 무너트릴 염려가 있었던 남당의 급진적 견해를 반대하고 동당에게 힘을 실어 주며 김재로·홍계희에게 강력히 경고하여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천의소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천의소감은 영조의 대통 수수를 인원왕후의 至愛와 경종의 至孝·至友로 받은 것으로 천명하고 이를 국시로 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 소론 5대신의 죄를 차등을 두어 서술하고 노론 4대신의 행위는 경종의 질병을 명시해 충성임을 밝혔고 이로써 노론 준론이 주장한 변성무의 의리가 실현되어 노론의리의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편찬 과정에서 노론 일당전제의 가능성과 다른 당에 대한 토역론을 차단해 노·소론을 제어할 수 있게 되어 가장 큰 소득을 얻게 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영조는 노론 4대신의 충절을 기리는 四忠祠를 복설하고 소론의 동의 아래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종사를 단행했다. 또한 소론 준론은 급소의 의리에 동정적이었던 자신의 시각을 반성하는 革心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영조는 국시를 확정하고 더 이상의 역률을 막아 박문수·이종성·이철보 등의 준소 핵심을 여전히 신뢰하였다. 사실 준소는 영조의 삼종혈맥론을 부정하지 않았고 변성무 역시 동의했으므로 비 이광좌 계열의 준소는 소론의 정통성을 지키면서도 정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다만 이들은 준소를 제거하며 노론 의리에 경도되는 소론 탕평당과 더욱 거리를 두었으며 이들은 소론 탕평당과는 달리 소론 의리의 본색을 지켰다고 하여 本少論이라고 불렸다.

 

3. ‘영조의 임오의리설정과 世孫宗統 확정

 

을해옥사와 천의소감의 편찬을 계기로 노론 의리에 기반한 국시는 확립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노론 탕평당 대 노론 청류라는 막연한 구도 형성되어 있었으나 노론 내부는 동당·남당·중당·북당으로 분화되었으며 노론 탕평당 역시 입장에 따라 동당과 남당으로 분화되었다. 탕평의 규모를 둘러싸고 노론 청론 내부는 군자당인 노론의 우위를 확실히 하려는 一進一退論에 중심한 남당과 탕평당을 비판하지만 노론 청론 중심의 탕평구조는 유지하려는 義理蕩平論을 내세운 동당으로 분화하였다. 노론 탕평당 중 김재로·김상로·홍계희는 남당과 연계하였고 원경하와 척신 홍봉한·신만이 중심이 된 북당은 동당과 연계되었다. 동당과 북당은 영조의 탕평에 협조하며 소론과 남인까지 조제하려 하였고, 남당은 노론의리의 철저한 관철을 주장하였다.

천의소감편찬 이전부터 세자는 노론 동당과 남당, 소론 완론과 준론이 대립하는 구도 가운데 놓여있었고, 이 과정에서 소론 척신 정치달의 도전과 文女의 회임으로 위협받고 있었으나 인원왕후·정성왕후의 후원을 받아 이들의 도전을 제어하였다. 결국 노·소론 내의 노선 대립은 세자보호 세력과 세자위해 세력의 대결양상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노론 남당은 노론 5포의의 신원과 소론 5대신 중 이광좌 등의 토역에 소극적인 세자의 의리관에 의구심을 품었다. 이 상황에서 동당의 이천보는 세자의 부담을 덜기 위해 대리청정의 환수를 주장하며 중당 및 홍봉한 주도의 북당과 소론의 이종성·조재호, 淸南 등 각당 峻論者와도 연대하여 영조의 조제 의지에 부응하고자 했다. 반면 홍계희·김상로 등은 철저한 토역에 부응하지 않는 세자와 영조를 이간시키고 각당 탕평파와 소론 완론과 연대해 세자위해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홍계희·김상로 등은 세자의 비행과 의리관을 매개로 이간을 주도하였으며 세자의 과실을 기정사실화 하고 영조의 개입을 유도했다. 이에 맞서 노론 동당의 이천보, 중당의 유척기, 소론 준론의 이종성 등과 함께 세자의 과실이 과장되었다고 인식하며 세자와 영조 양자의 반성을 진언하였다. 그러나 영조 33년 세자의 후원세력인 인원왕후와 정성왕후가 서거하면서 세자에 대한 모함이 더욱 거세지고 영조와 세자의 관계는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세자보호 세력이 했던 간언은 영조에게 세자를 편들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의심받았고 김상로·홍계희 등 탕평파에 대한 비판은 탕평을 흔들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영조 37년 세자의 잦아진 미행이나 평양행 등이 문제가 되어 세자가 위태로워지자 세자위해 세력이 더욱 확산되어 북당의 신만과 소론 완론의 서명응 및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까지 세자 위해에 가담하게 되었다. 거기에 정순왕후로 인해 척신이 된 김귀주가 세자위해에 가담하였고, 반면 동당과 준소계열은 자결하거나 정국에서 밀려나며 세자보호 세력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홍봉한은 세자의 보호를 담보할 수 없어 세손의 보호를 위해 세자 보호에 적극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나경언의 고변이 터지자 영조는 세자 처벌에 소극적인 영의정 홍봉한을 파직하고 신만을 대신 임명해 난국을 돌파하려 했다. 나경언 고변의 배후는 김한구·홍계희·신만·신회·윤급 등이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거론된다. 결국 임오화변은 노론의 남당·북당 및 소론 탕평당계와 김한구·김귀주·홍인한 등 척신이 공모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으로 세자보호를 매개로 유지되던 탕평정국의 급격한 변동을 의미했다. 임오화변의 수습방향은 곧 영조의 정치적 결단과 의리 천명, 영조의 임오의리에 달려있었다.

영조의 임오의리를 이해하기 의해서는 임오화변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에 따라 각 정파의 일기류와 당론서를 검토하였다. 임오화변을 다루는 당론서는 세자에 대한 태도에 따라 노론 시파·노론 추시파·소론 준론·남인 청론의 보호론과 노론 벽파·노론 추벽파의 위해론(宗社論)으로 대별된다. 보호론에서는 임오화변의 원인을 이광자 등 준소의 처분을 둘러싼 영조와 세자의 견해차이를 바탕으로 하여 위해세력의 모함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노론 동당·소론 준론·남인 청론을 충신으로, 노론 남당·소론 탕평당을 역적으로 간주하였다. 반면 위해론 계열은 세자의 자질의 미비와 질병을 강조하며 세자를 보좌하는 신하들이 직언을 하지 않아 세자의 패행이 심화된 것을 원인이라고 판단하였고, 세자의 비행을 무함이라 하고 영조의 처분을 변경하려 하는 자를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이렇듯 임오화변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인식이 복잡다단했기 때문에 영조는 이러한 복잡한 책임 문제를 추궁하기 보다는 일관된 원칙 하에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영조의 자신의 처분을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면서도 세자에게만 죄를 돌릴 수 없음 또한 인정하고 김상로에게 책임을 묻기도 했다. 또한 이 일로 인한 혼란을 차단하고자 세자에게 라는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여 세자의 죄를 거론하는 신하들을 경고했다. 그러나 동시에 세손에게 세자의 장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宗統의 변경이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

영조의 이러한 조치는 세자를 죄인으로 보며 세자보호 세력을 제거하려는 세자위해 세력의 시도나 세자의 과실을 지적한 신하를 불충으로 규정하려 한 세자보호 세력의 시도를 모두 차단한 것이었다. 영조는 앞으로 불필요한 의리를 조작한 이에 대해서는 역적으로 처벌하려 하여 사태의 확산을 허락지 않을 것임 분명히 하였다. 영조는 세자의 질병으로 인해 변란의 기운이 다가오자 삼종혈맥을 보존하고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私情을 끊고 불가피한 조치를 취했음을 밝혔다. 영조의 처분이 가벼운 수습방안임을 알게 되자 정휘량·신만·홍계희 등은 세손마저 부정하는 11자 흉언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한편 홍봉한은 영조의 처분을 적극 뒷받침하여 사정으로 공의를 가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앞으로 세자를 위한다는 이유로 이를 변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차자를 올렸다. 영조는 이에 호응해 홍봉한에게 임오화변의 뒤처리를 맡겼다.

영조의 임오의리아래서는 세자를 의리 죄인 취급하는 세자위해 세력의 명분이나 세자의 과실 지적을 역으로 취급하는 세자보호 세력의 의리는 용인될 수 없었다. 종사를 위해 결단했다는 위해 세력의 주장을 기반으로 하되 세자의 질병을 고려해 위호를 회복하자는 보호세력의 입지도 고려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도세자는 의리죄인도 아니요 효자도 아니었다. 홍봉한은 보호세력 가운데 강경론자를 희생시켜 세자보호 세력을 보존하려 하였다. 그는 소론 조재호가 남인을 동원해 세자보호를 표방해 노론을 제거하려 했다며 그를 처벌하였고 영조에게 이를 천의소감처럼 편집하길 청하여 奉敎嚴辨錄을 지어 조재호의 세자 보호설을 부정해 세자에게 불리한 세자위해 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다. 영조 역시 保護不利 등의 의리를 조작하지만 않으면서 자신이 정한 大義理를 받아들인다면 보호세력과 위해세력을 막론하고 수용될 수 있음을 밝혔다. 결국 영조의 임오의리를 통해 세자보호의 의리가 관철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세자는 죄인도 아니었다. 이러한 처분의 주체는 영조였고 영조와 세손에게 협력한다면 아무런 혼란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으로 사태는 정리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는 모순되며 미봉책이었고, 세손은 이러한 부담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임오화변 이후 가장 시급한 일은 후사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임오화변은 세손의 지위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는데 남당의 척신 김한록·김귀주는 죄인의 아들은 대통을 이을 수 없다는 8·16자 흉언을 떠들며 世孫不可論=養子論의 여론을 조성하고 있었고 홍인한계 북당 역시 별개로 흉언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갑신처분을 내려 세손의 종통을 확정하여 이들의 시도를 꺾었다. 영조는 임오화변 이전부터 세손의 종통을 효장세자에게 옮기려고 구상하고 있었고 세자보호 세력 역시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동당의 산림 송명흠이 이러한 처사에 반대하고 이후 노론의 여러 산림이 이에 동의하면서 영조는 산림의 旌招를 중단하였고 이를 비판하는 신하들의 반발 때문에 조정이 거의 텅 비게 되었다. 임오화변 이후 영조와 탕평당 세력에 대한 냉소가 확산되어 노론 산림 및 동당계 청류의 탕평 지원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의 구상을 이어나가 영조 40년 세손이 조부를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 효장세자를 嗣續하는 방식으로 승통하는 갑신처분을 내렸다. 이것은 영조의 독단으로 세자위해 세력의 의도를 막은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처분을 통해 사도세자의 종통을 차단해 홍봉한이 국구로서 자신의 처분을 뒤집을 가능성도 차단한 것이다. 즉 영조는 자신의 임오의리를 보존하면서 세손의 지위를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는 혜경궁과 홍봉한에게는 자손을 빼앗기고 사도세자의 추숭이 막힌 것으로 대단한 충격이었으나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어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서거를 계기로 친히 表義錄을 지어 임오화변이 사은을 끊고 종사를 지킨 결단임을 홍봉한과 세손에게 알리고 이를 바꿀 수 없는 의리라는 다짐을 받았다.

영조는 갑신처분을 황극의리의 확정 차원에서 생각했다. 때문에 영조는 홍범의 요체를 얻어 황극의 의리를 힘쓰도록 한 공로로 박세채를 特旨文廟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자 영조는 이는 建極을 배척하는 것으로 간주해 모든 신료들에게 死罪臣이라고 칭하는 연명서를 받아내고 박세채의 문묘종사를 단순한 斯文의 문제가 아니라 을해옥사-임오화변-종통확립-황극수립의 맥락에서 설명하여 국시를 공언하고 자신의 탕평 의리를 내보였다. 이러한 종사에 대해 홍봉한·홍계희 등 북당의 탕평대신들은 적극 찬동하였고, 여기에 박세채의 외손 申暻 등 노론 전반의 비판이 가해지자 영조는 이들을 엄히 처벌하고 嚴堤防裕昆錄을 지어 황극탕평에 비판적인 노론 산림에 대한 정국 간여를 금지시켰다.

영조의 황극탕평의 대의리는 이를 계기로 정해진 것으로 영조대 후반은 이에 기반한 의리탕평을 기조로 설명해야 한다. 영조는 황극이 실현되었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신임의리와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을 자신 주도로 해결하고자 하여 마침내 노론 5포의를 逆臣이 아니라 단지 小人으로 보고 이를 준소에게까지 확인받았다. 그리고 다시 대훈에서 노론 5포의의 혐의였으며 자신도 관련 있던 僞詩 사건까지 삭제하여 신유대훈의 모순을 해결한 완전한 國是를 확정지었고, 홍봉한의 요청에 따라 이를 영조 45改刊大訓으로 간행해 반포하며 완성시켰다. 결국 세자에게 기대했던 변성무의 문제는 임오화변이라는 희생을 거치며 확정되었다. 때문에 영조의 신임의리와 임오의리는 서로 관통하는 것이었고 이는 하나의 대의리가 되어 모든 신료가 지켜야할 堤防이 되었다.

 

4. 노론 北黨·南黨의 대결 정국과 세손의 右賢左戚

 

경신처분 이후 세손의 지위는 안정되었지만 세손의 종통이 옮겨짐에 따라 내·외척의 위계관계가 변동되었다. 홍봉한의 지위는 모호해지고 북당의 영향력이 떨어지게 된 반면 국구가 된 김한구의 위상이 높아지며 김귀주 등 그 일문의 영향력이 커지며 이들이 가세한 남당의 위세가 커졌다. 여기에 화완옹주의 양자 소론 정후겸이 가세하였고 이들은 홍봉한·혜경궁과 세손을 떨어트리려고 하였다. 홍봉한 등 북당은 세손 보호를 우선시하며 훗날 추숭을 도모하고자 하여 영조의 임오의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비방도 감수했다. 그러나 김한구 등 남당은 영조의 대의리에 찬동하지만 신임의리가 숙종대까지 소급되지 못한 불철저함과 노소탕평의 구도를 비판했다. 결국 이들은 임오화변의 책임을 홍봉한의 책임으로 돌리며 그를 제거하고 세손을 위협하는 殺洪論을 제기하고 주도하였다.

척신의 분열상은 노론 관료와 청론의 분열상을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노론 청류는 집권 탕평당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모여 있었으나 그 내부는 대단히 다기하여 하나의 집단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노론 낙론에는 홍계능계, 김원행계, 김양행계, 김종후·김종수계 등 다양한 세력이 있었으며 이들을 모두 김종수 계열의 청명당으로 단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홍계능은 북당의 산림으로 집권층과 유착해 청류의 배척을 받았으며 김원행·김양행과 대립하였고, 김종후·김종수는 북당 및 동당의 김원행계와도 대립하였다. 호론에서는 김한록·홍양해계, 윤봉구계, 김시찬·권진응계 등으로 분파했는데 김한록은 호론 한원진의 적통을 자처하며 낙론을 비판하고 호서의 여론을 윤봉구에게 쏠리게 하였고, 정치적으로 김한기·김귀주를 매개로 호론 인사들이 김종수의 노론 남당에 가세하게 하였다. 반면 호론에서도 김시찬·권진응은 동당과 합류하여 세자의 보호세력이 되었다. 이들 노론 청류세력은 근본적으로 홍봉한과 김귀주를 중심에 두고 扶洪·攻洪·殺洪·兩斥 중 어느 입장을 택하느냐에 따라 분화했다.

동당은 일찍부터 탕평당을 비판하고 세자와 세손보호를 표방하였으므로 공홍·살홍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홍봉한을 지원하지도 않아 양척론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양척론은 양비론은 아니었고 동궁 보호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김원행에게 부홍파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산림을 중심으로 존재하며 남당·호론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침체되어 있었다. 반면 김치인·김종수가 주도하는 남당은 일진일퇴론을 주장하며 탕평구도를 허물고자 했고 김귀주와 결합하여 공홍과 살홍을 주장했으며 청류를 자처했으나 청명당 사건으로 타격을 받았다. 소론은 완론과 준론의 분열이 지속되었으며 완론의 경우 이미 북당 주도의 탕평을 뒷받침하며 노론화하는 경우가 많았고, 척신 정후겸과 함께 시기에 따라 김귀주의 남당 혹은 홍인한의 북당과 연대했다. 반면 노론화 하지 않거나 정후겸과 거리를 두던 본소론은 공홍론은 세손을 흔드는 흉악한 시도라고 비판하며 세손을 보호하고 있었다. 청남은 세력이 작았지만 체제공을 중심으로 뭉쳐 의리상 홍봉한을 비판할 수는 있으나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결국 본소론과 청남은 홍봉한의 북당과 느슨한 연대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홍봉한은 영조의 갑신처분과 황극탕평에 호응하는 가운데 노론 5포의의 신원을 주도하며 전통적 노론 名家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따라 노론 청론의 지원을 확보해 동당·중당의 중추인 신임의리의 명가들을 끌어들여 이들은 홍봉한을 비판하긴 해도 살홍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봉한은 임오화변 전후 세자 보호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세손보호를 내세워 정국을 專橫한다는 비판을 받아 공홍·살홍론의 부상을 초래했다. 김귀주와 정후겸은 적극적 연대를 통해 각자의 세력을 집결시켰고 심환지 등의 노론 청류, 남당 인사들이 살홍론에 적극 호응하였다. 이렇듯 갑신처분 이후 정국이 북당의 홍봉한과 남당의 김귀주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홍봉한에게는 경화 관료 및 신임의리 명가와 북당, 동당이 우군이 되었고, 김귀주에게는 강력한 노론의리를 강조하는 신진 학자와 호서 가문들이 가세해 남당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선 차이는 정조대 이후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재분기할 때 의리론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세손은 자신의 비행을 형조판서 조영순을 동원해 처리한 홍봉한을 의심하고 미워하게 되었고 이에 김귀주와 화완옹주 등이 세손과 홍봉한을 이간질시키고 세손에게 멀어진 홍봉한을 향해 살홍을 시도하였다. 영조 46년 호서 유생 한유의 상소를 계기로 홍봉한은 비리와 전횡의 책임을 지고 영의정에서 실각하였다. 이어 살홍파는 홍봉한이 임오화변의 원인을 영조의 독단으로 만들려 한다고 하여 영조의 의구심을 일으켰으며 이후 홍봉한이 은언군이나 은신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음모를 고변하여 사태가 심각해지게 된다. 결국 세손은 정순왕후에게 추숭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중궁전과 협력해 사태를 무마하고 홍봉한은 삭출에 그치게 된다. 이 길을 제기로 세손은 정순왕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중궁전을 통해 김귀주의 행동을 제어하려 하였다.

왕손추대 사건은 김한기·김귀주가 주장한 홍봉한이 세손에게 불리하다라는 설을 보여준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진정한 세손보호 세력을 자처하며 홍봉한은 영조의 의리를 흔드는 추숭세력으로 몰아 공홍을 정당화하였다. 이로써 영조의 확실한 후계자인 세손을 두고 추숭론에 기반한 노론 북당과 영조의 대의리에 기반한 노론 남당의 경쟁 구도가 완성되었다. 홍봉한에 대한 공격은 더욱 강해져 홍인한 마저 공홍을 선언하고 김귀주와 협력했고 살홍파는 임오화변 당시 一物을 들인 죄를 거론하며 임오화변의 책임을 모두 홍봉한에게 씌워 그를 참해야 한다고 몰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영조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탕평구도가 흔들리게 되자 영조는 임오화변은 자신과 홍봉한의 공동 책임이며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맡기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영조의 홍봉한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홍봉한이 일물을 바쳤다는 것을 명확히 해 후에 그가 임오년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명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조는 세손 보호와 홍봉한 배제를 명확히 했고 때문에 홍봉한의 처지도 궁색해졌지만 은전군을 세손의 대체로 생각하고 있던 김귀주의 의도도 실패하였다.

영조의 세손 보호 의지가 명확해지자 홍인한과 정후겸은 실각한 홍봉한을 대신해 동궁보호를 내세우며 결속했다. 정후겸 등은 살홍론을 수정해 동궁보호를 명분으로 세손 외가와 연대하려 하였고 이에 홍인한과 결합하였다. 반면 이를 계기로 정후겸-화완옹주와 김귀주-정순왕후의 사이는 멀어졌다. 혜경궁은 정후겸과 연대하였고, 세손은 김귀주와 거리를 두면서도 정순왕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주도적으로 난관을 타개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영조는 홍인한을 정승으로 등용해 북당 위주의 탕평을 강화하고 정후겸이 이에 호응했다. 반면 노론 남당은 공홍·살홍을 견지하며 탕평 정국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영조는 이들을 청명당 사건을 통해 제거했다. 영조 48년 대사성에 노론 3명의 新通이 의망되자 영조는 이조판서 정존겸과 대사성 김종수를 해임하고 영의정 김치인에게 책임을 물어 이들을 청명한 이름만 쫓는다고 비판하며 탕평을 흔드는 행위를 永垂百世錄을 통해 공식적으로 비판했다. 청명당 사건에 처벌을 받은 이들은 노론 남당·소론·남인을 포괄하는 다양한 세력이었으나 노론 남당은 청류의 명성은 이어가고 노론 내의 살홍 명분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청명당 사건으로 노론 남당의 정치적 세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김귀주·김관주가 직접 나서서 홍봉한이 세손에게 사도세자의 추숭을 강요했다고 탄핵하며 홍봉한을 역신으로 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봉한이 영조에게 불충하고 세손을 겁박해 영조의 의리를 작변하려 한다고 고발한 것이다. 이것은 중궁전 및 김한기와는 충분히 협의 없이 김귀주가 홀로 주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손은 다급히 중궁전과 협력해 사태를 수습하였고 양전의 신뢰는 견고해졌으나 세손은 자신을 위험에 빠트린 김귀주에 더욱 분노하였다. 영조는 외척 김귀주가 또 다른 외척인 홍봉한을 제거하기 위해 대의리를 무너트리려 했고 세손까지 제거하려 했다고 보아 대단히 분노하였다. 이에 처벌을 김귀주·김관주만 아니라 배후 세력이라고 본 청명당까지 확대하였고 김귀주에게 당심을 자복하게 한 후 유배시킨다. 주목할 점은 영조가 이 사건을 청명당 사건의 연장에서 파악했다는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임오년 이후 10년을 조제했는데도 淸黨·名黨·時體黨이 나와 김종수가 김치인을 시켜 임금을 배반케하고 김관주와 김귀주를 유인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영조는 갑주를 입고 군례를 행하며 청명당의 당심을 경고하고 잠저인 창의궁으로 가서 당심이 없는 자만 名帖을 바치라고 단호히 대처해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충격을 받은 영조는 을해옥사 이후 지속된 탕평이 실패했다고 선언하며 大蕩平의 추진을 선언하였다. 영조는 노론 의리를 견제하기 위해 이광좌·조태억·최석항 소론 3대신의 삭탈관직을 취소하고 대탕평의 이념적 지주인 원경하를 현양하였으며 준소와 청남은 이에 호응하여 살홍은 곧 反世孫이라며 세손보호를 위한 扶洪을 명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공홍을 표방하던 청류가 노론·소론·소북 내부에 확대되었다. 결국 김귀주에 대한 지지여부와 관계 없이 영조의 대탕평은 청론 사대부의 반발을 가져왔으며 한편으로는 영조가 그만큼 청명당과 김귀주를 불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조 49년 이후 청론을 표방하는 이들은 사대부와 척신을 막론하고 존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탕평을 이끌었던 홍인한·정후겸의 위상이 확대되게 되었다.

이렇듯 영조 말기의 조정은 홍인한 주도 북당이 소론 정후겸과 연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홍인한은 김귀주·홍봉한의 공백을 이용해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소론 정후겸은 소론 대신의 복관을 이끌어 내는 등 영향력을 확대했고 탕평을 명분으로 노소론의 인사들을 무원칙하게 끌어들여 당시 삼정승이 모두 정후겸의 문객이라는 기롱을 받게 되었다. 한편 세손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추도에 대해 기존보다 더욱 관대한 모습을 보였고 임오년 처분에 대한 후회를 의미하는 金縢의 문서를 체제공에게 맡겼는데 이는 세손의 지위를 강화시키면서 후회의 뜻을 밝히되 의리 번복을 막는 고육책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조정에 홍인한과 정후겸 세력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동궁의 보호를 자임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세손 주위에 심어 세손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러나 세손은 이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이들의 세력에 장악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홍인한과 정후겸은 이러한 세손의 태도에 당황하며 세손을 위협하고 궁료인 홍국영을 제거하려고 집요하게 시도하여 세손의 곤란이 심해졌다. 세손과 홍인한계 북당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어 심지어 세손을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을 선동하기도 했다.

세손은 남당의 김귀주와 북당의 홍인한·정후겸의 양 척신세력을 모두 외면하고 궁료세력을 앞세워 정국을 정면돌파 하였다. 이러한 세손의 태도는 영조가 천의소감에서 밝힌 저군의 정당한 계승에 척신과 벌열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의리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는 것으로 세손은 노··남인을 막론하고 사대부 청론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세손의 의리는 경종·영조·사도세자의 경험을 통해 축적되어 영조가 확립한 저군에 대한 충역의리로써 영조의 대의리에 충실히 입각했던 것이다. 세손은 이러한 의리에 기반하여 척신과 벌열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사대부의 청론에 기반해 정당하게 승통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한편 세손은 노론 북당을 홍봉한계인 大洪과 홍인한 및 그와 연계된 홍계희계인 小洪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 당시의 척신은 대홍과 소홍 및 김귀주계인 泥峴을 따라 분열되어 있었고 소론 역시 정후겸계·소론 청당·본소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세손은 홍인한·정후겸과 척을 진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저군이라는 지위와 이를 보호해주는 국왕·중궁전에 기대고 있었는데 이런 가운데 영조의 판단력이 극히 흐려져 정치 상황이 불투명해졌다.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했으나 홍인한의 반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고 세손은 이를 그가 逆心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대리청정이 계속 지체되자 세손은 중궁전에 도움을 청하면서 홍인한·정후겸을 극복하기 위해 홍국영·정민시 등 궁료와 정후겸과 갈라진 소론 서명선 등의 도움을 받아 대리청정을 성사시켰다.

대리청정에 협력했던 세력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중궁전으로 세손과 정순왕후는 깊은 신뢰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세손은 중궁전을 통해 김귀주를 제어할 수 있었다. 궁료들은 청론과 세손을 연결시키는 가교가 되었는데 홍국영은 김귀주를 통해 김종수·심환지 등 노론 남당을, 정민시는 정후겸에 비판적인 본소론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서명선을 끌어들인 것 또한 그의 덕택이었다. 서명선과 김종수는 소론과 노론의 영수이자 의리주인으로 대우받았다.

대리청정이 성사된 후 영조는 세손이 효장세자를 계승했음을 다시 밝혔다. 그러나 세손은 사도세자와 관련된 문제를 다시 정리하길 원하여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질병을 공식 천명해 줄 것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는 영조의 임오의리를 일부 수정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세손은 중궁전을 통해 세자위해 세력의 영수인 김귀주를 설득해 이를 주선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김귀주는 영조가 일부러 모호하게 한 처분을 율문을 들어 분명히 하여 세자가 반역죄를 지었다는 의견을 밝혔고 세손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나 자신의 처지에 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김귀주는 세자의 질환을 표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洗草를 청하는 것이 기존 임오의리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세손의 정리를 고려한 것이므로 모두 편하다고 제안하였고 세손은 이를 받아들였다. 세초는 영조의 인자함과 세손의 효성이라는 정리 차원으로 기존 대의리를 수정하는 것과 무관한 것임을 확인하며 김귀주는 이를 건의했던 것이다.

세손이 직접 세초를 청하는 것은 정치적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영조는 세초가 의리는 의리요 애통은 애통이라는 자신의 기존 의리를 해치지 않는 것이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세손이 후일 추숭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확약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한편 세손은 영조의 세초를 기초로 사도세자에 대한 사적 효심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세초는 임오화변과 관련된 모든 세력이 동의할 수 있는 의리에 기반한 최대 공약수였고 임오의리를 둘러싼 각 정치세력의 입장을 최대한 무마한 것이기도 했다. 세초 당시 약속한 의리의 수정 시도는 곧 정치적 약속의 파기로 해석될 수 있었다. 어쨌든 세손은 영조의 이러한 조치를 이끌어 내어 갑신처분의 의리를 준수하면서도 사적 효심을 펼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채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다.

 

마치며

 

앞서 언급했지만 이 논문은 사림정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공론의 형성 과정과 그 공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공론이 군신이 함께 지켜야 할 정치적 약속인 군신의리로 발전하고, 또 그 군신의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치사 연구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국왕의 계승이라는 정통성을 두고 초유의 정치적 논쟁이 발생한 영조와 정조의 시대에 국왕이 어떤 식으로 공적 의리의 담지자가 되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정치세력들이 국왕에 협조하고 대립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기존의 정치사를 개혁 대 보수로 해석하거나 국왕과 정치세력의 정국운영을 위한 명분쌓기 정도로 의리론을 해석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전체 논문에서 발제한 부분은 정조대의 탕평정국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 영조대를 설명하는 부분인 만큼 몇 가지 궁금증이 드는 부분이 있다. 첫 번째로 영조는 정국 운영에 있어서 의리의 적극적 주재자였는가? 아니면 각 정치세력의 의리를 조제보합하며 자신의 의리를 그 중에서 취사선택하는 국왕이었는가? 영조는 자신의 의리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대훈이라는 거창한 방식을 취하고 천의소감등 의리에 관하여 국왕이 유례없이 많은 직접적 교시를 내렸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이는 모호함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모호함은 결국 청론을 자칭하는 사림들의 공격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이러한 의리문제는 적극적으로 극복하기보다는 청명당 사건에서 보여주듯이 산림을 배제하고 재하공론을 막아버리는 방식으로 봉합하고 있다. 여기서 보여주는 영조의 모습은 결국 영조대 탕평을 완론탕평으로 설명하는 기존의 모습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두 번째로 위와 연결되는 질문으로 갑신처분과 그 이후 영조가 추진했던 황극탕평은 과연 황극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을까? 즉 이 때의 황극은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 영조의 행동은 일견 탕평이 아니라 전제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림정치가 정착된 이후 조선에서 이러한 모습의 정국운영은 길게 이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갑신처분 이후의 영조의 탕평은 공적 의미를 얼마나 지니고 있는 것일까? 또한 정조와 영조의 탕평정치는 서로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다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세 번째,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영조의 탕평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영조의 탕평은 결국 실패했는가? 영조는 자신의 승통과 관련이 있는 신축·임인의 의리를 해결하려 했지만 결국 임인의리라는 새로운 의리를 만들어 내어야 삼종혈맥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막판에는 김귀주와 홍봉한, 홍인한·정후겸이라는 외척에게 정권이 모두 돌아가게 되었다. 척신에 의한 정치가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세손이 右賢左戚을 추진할 정도로 당시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조의 탕평은 정치적·정책적으로 모두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말년 영조의 단순한 실책에 불과할까? 그리고 그에 비하여 정조의 탕평은 더욱 확고한 공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