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이시바시 다카오, 2009, 『대청제국』, 휴머니스트 서평

同黎 2014. 3. 19. 00:45

이시바시 다카오, 2009, 『대청제국』, 휴머니스트

한국사학과 박사1 박세연

이시바시 다카오는 『대청제국』에서 다민족국가의 형성과정으로서의 중국사에 주목하면서 다민족국가의 완성자로서의 청조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淸을 明朝에서 연장된 중국의 전제왕조로 보는 시각이나, 宋·明에 대비시켜 遼·金·元과 같은 ‘정복왕조’로서 바라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10세기 이후 중국사는 다민족국가를 형성해온 것으로 파악하고, 淸朝야 말로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다민족국가를 완성했으며 다른 중국 왕조와 달리 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서 왔는가에 주목하면서 淸史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다민족국가의 형성과 절대적 황제권의 성립이라는 두 가지 큰 흐름에 주목하며 누르하치의 흥기를 통한 만주국의 성립에서 건륭제대의 최대 판도 완성까지의 기간을 淸 初期로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다시 여섯 단계로 시대구분 하였다. 먼저 누르하치가 흥기하여 건주부를 통합해 만주국을 수립한 시기로, 당시 건주·해서·야인여진의 13부는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사실상 개별국가와 독립국과 같은 상태였다. 누르하치가 동북부 여진을 통합해 세운 아이신국은 그 다음 단계에 해당한다. 만주국와 아이신국은 모두 독립부족을 통합했다는 점에서 복합 다민족국가의 성격을 지닌다.

누르하치는 명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만주족의 부족 연합을 새로운 군사조직으로, 즉 팔기조직으로 정비하여 국가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팔기제도는 홍타이지에 의해 한층 변화했는데, 홍타이지는 팔기몽골과 팔기한군을 추가하여 팔기를 만·몽·한의 구도로 발전시겼다. 이제 국제사회의 대립구조는 기인(만·몽·한)대 비기인 한족과 몽골족으로 정립되었다. 조선을 항복시키고 내몽골을 평정한 홍타이지가 세운 대청국은 바로 팔기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만·몽·한 세민족의 통합국가였다. 홍타이지에게 칭제건원을 건의하는 과정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바로 이 세 민족이 뜻을 모아 홍타이지를 추대하는 모습을 가졌던 것이다.

대청국의 건설은 중국식 황제지배체제를 도입하여 그동안 만주족의 관습에 따라 거의 동등하다고 여겨졌던 한과 버일러의 관계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부족제에 기반하고 있는 보수적 세력을 통해 어린 순치제가 황제로 선택되고 도르곤의 독재체제가 성립된다. 도르곤의 사후 순치제는 만주족의 전통적 통치체제를 부정하고 중국의 황제들이 그러했듯 환관을 중심으로 한 내십삼아문을 통해 친위세력을 구성하여 황제권을 신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순치제의 죽음으로 인해 이러한 시도는 좌절되고 다시 어린 강희제가 황제로 추대된다.

그러나 보수적 세력에 의해 추대된 강희제는 북경에서 태어난 만주족 황제로 華夷가 한 몸에 공존하는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팔기제를 완전히 황제권 아래 복속시키고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씨 세력을 평정하여 중국 내지를 완전히 복속시킨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및 예수회 선교사와 교류하며 제국의 문화적 범위는 한층 확장시킨다. 그러나 황태자의 폐위 등 내부적 정치 불안이 말년에 지속되었는데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는 주접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독재 정치를 통해 황제권을 극대화시킨다. 특히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통해 중국은 본래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華夷와 中外를 가르는 것은 논할 가치가 없다며 한족의 화이론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박하고 이를 대체할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자 한다.

강희·옹정제의 치세를 거쳐 비교적 안정된 배경 속에 즉위한 건륭제는 외몽골과 티베트, 신장 위구르로 구성된 번부를 완성하고 만·한·번 삼자구도의 청 최대판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비대해질 만큼 비대해진 건륭제 시대에는 더 이상 혁신을 기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청의 보수성이 더욱 강해지고, 그 모습은 『대의각미록』의 금서 규정 등의 자기규제와, 실효성없는 대외정벌을 통한 과시를 통해 드러난다. 즉 가장 풍요로웠던 건륭제의 시대에 이미 청의 위기가 내재되었고, 가경제를 기점으로 청의 國勢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바시 다카오는 미국학계와는 별개의 환경에서 연구를 진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영미권 淸史연구에서 주도적 흐름으로 떠오른 新淸史의 연구방향과 상당히 비슷한 연구경향을 지니고 있다. 신청사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淸을 중국 전제왕조의 하나로 파악하는 방식에 반대하고 있다. 또한 청을 漢化된 것이 아니라 만·한·번의 3중 구조로 이루어진 사회로 본다는 점에서도 신청사 연구와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淸을 정복왕조가 아닌 10세기 이후 중국사에서 지속되는 다민족국가의 흐름을 계승·완성한 국가로 본다는 점에서는 신청사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일본학계의 연구가 영미권 학계의 연구와 비교하여 어떠한 공통점과 차별점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있어서 『대청제국』은 매우 유익한 논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저서에서 몇 가지 논의할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팔기군을 봉향제도에 관한 부분이다. 저자는 입관 이후 팔기군이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게 된 것이 기인을 단지 봉급생활자로 만들게 했다고 평가하며 봉향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절대적 황제권의 형성이라는 부분에서 팔기군에 대한 봉향제도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된다. 봉향제도는 팔기군 전체를 버일러의 종이 아닌 황제에게 봉록을 받는 신하로 만듦으로써 황제권을 강화시킨 제도 중 하나로 평가받아야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의문은 청 초기라는 시대구분이 적절한가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다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입관 이전과 이후를 연속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주목하는 또 하나의 흐름인 절대적 황제권의 수립이라는 면에 있어서 입관 전후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 내지를 병합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황제권을 안착시킨 강희제 이전과 이후는 정치사적으로 동일한 시대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같은 영토확장이라고 하더라도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경제적 기반을 안정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입관 이전의 영토확장과, 이미 확보한 내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신장·티벳으로의 영토확장은 성격이 같다고 볼 수 없다. 차라리 입관 이전, 혹은 순치제까지의 성립기·입관 이후 최대 판도 완성까지의 전성기·가경제 이후의 쇠퇴기의 3시기 구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세 번째 질문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 성립을 과연 만주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시바시 다카오는 청조 성공의 비결 중 하나를 절대적 황제권의 성립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권은 만주족의 전통에는 반대되는 것이었고, 오히려 한족의 전통과 더 가까워 보인다. 이렇듯 만주족의 전통과 반대되는 집권적 황제권이 어떻게 청조 고유의 성공의 비결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더불어 집권적 황제권이 어떤 이유로 청조에서 추진되었는지 당위적인 수준을 넘어선 치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부분은 저자 관점의 문제이다. 이 책이 대중서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서장에서 청의 다민족국가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이를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와 청조의 다민족국가가 동일할 수 없다. 자칫 이러한 논의가 자치 독도문제에서 보이듯 현실정치나 외교과계에 역사성을 과도하여 부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위구르나 티벳 통치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변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