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라나지트 구하, 1983(2008), 『서발턴과 봉기』, 박종철출판사

同黎 2014. 1. 16. 02:46

라나지트 구하, 1983(2008), 『서발턴과 봉기』, 박종철출판사


조선후기 박사0 박세연


『서발턴과 봉기』는 식민지배 하의 半봉건사회에서 일어났던 농민 봉기에 관한 해부 보고서이다. 이 책의 저자인 라나지트 구하는 인도의 농민 봉기에 대한 기존의 여러 담론들을 비판하며 글을 시작한다. 영국의 식민주의자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역사학자들은 농민 봉기를 엘리트에 의한 선동 혹은 음모론의 영역으로 몰아 넣으면서 농민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탈각시켰다. 식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엘리트 역사학자들 역시 이러한 면에서 다르지 않았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역사학은 농민 봉기를 단지 간디와 국민회의당의 前史로, 엘리트적 좌파 역사가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前史로 취급하였다.

라나지트 구하는 농민이 스스로 반란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농민 봉기를 해부하여 그 속에 있는 농민들의 의식을 밝혀내려고 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단지 인도의 농민 봉기를 분석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근대시기에서 근대 이행기에 이르는 혹은 봉건사회에서 半봉건사회에 이르는 서발턴 봉기의 보편적인 면들을 밝혀내는데 있다. 그는 서발턴의 봉기 자체를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사하다! 혹은 끔찍하다!라고 평가하지 않으며 서발턴의 의식성과 봉기의 성격 및 한계를 가감없이 서술하는 데에서 역사학자로서의 역할을 마친다. 서발턴의 의식을 설명하는데에서 나아가 의식의 근원적 변혁은 아마 활동가들의 몫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서발턴의 봉기는 정말이지 계급적이고 반식민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서발턴들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 정부 그리고 백인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공격하고 파괴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때로 서발턴들은 에스닉적인 혹은 종교적·지역적인 영역성을 뛰어 넘어 광범위하게 연대한다. 그들이 교육받지 않았지만 이렇듯 계급적이고 반식민지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바로 지주 및 고리대금업자와 정부, 영국에 의한 착취가 광범위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대항할 존재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라나지트 구하가 한 정말이지 큰 업적은 주로 지배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일 수 밖에 없는 사료들의 내용을 정반대로 뒤집어 보는 것이다. 그는 봉기·반란과 범죄·약탈을 혼동하는 식민주의자들의 시각을 비판하고 반란과 범죄를 분리한다. 또한 음모론과 강요로 해석되던 봉기의 전파과정을 재해석한다. 더불어 농민들이 지배자들은 모르는 독자적이고 자체적인 그러면서도 전근대에서부터 내려오던 방식을 이용하여 봉기를 전파시키고 있음을 밝혔다. 지배자들은 이 알수 없는 심벌에 공포에 질리고 봉기를 지역 지식인이 개입된 동시적인 음모로 규정하지만 이는 오히려 식민주의자들이 서발턴의 의식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그러나 서발턴의 봉기에는 한계점이 있었다. 우선 그것은 에스닉적 울타리(카스트, 부족)와 지역이라는 영역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언급한 두가지 영역은 봉기가 급속하게 확산하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봉기의 확대를 한정짓는 부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봉기하는 카스트나 부족이 생기면 동시에 영국인을 돕는 카스트나 부족이 생겨났다. 서발턴의 영역성은 조직이 엘리트적이로 협력적일 때, 그리고 조직이 존재하지 않거나 무력할 때 반대로 반식민 대중투쟁의 뼈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영역성의 양날의 검이다.

무엇보다도 큰 한계는 서발턴이 봉기의 주체에서 자기소외·탈구되었다는 점이다. 서발턴들은 지배자의 언어와 관습을 이용하여 그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전복하면서 봉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지는 못했다. 서발턴들은 자신의 저항을 다른 이의 의지 표명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봉기에는 언제나 신의 명령 혹은 정부의 허가, 왕의 명령 등이 대의명분으로 따라 왔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라나지트 구하는 식민주의자와 엘리트 지식인들(그들이 민족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의 시각에서 벗어나 서발턴의 입장에서 봉기를 서술하고자 하였다. 지배자들의 시각으로 서술된 사료에 나타나는 서발턴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완전히 뒤집고 반란의 폭력성과 루머 등을 정반대로 해석해내는 힘은 오랜기간 서발턴 연구를 통해 정립된 시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더불어 남아시아라는 지역적 역사에서 민중 봉기의 보편적 구조와 경향성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리고 서발턴의 의식을 전근대와 근대로 단절시키지 않고 장기지속하며 변동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 등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런 점에서 평자는 저자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다만 남아시아의 농민 봉기에서 전세계적 보편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모두 정당한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저자는 거의 모든 장에서 남아아시의 봉기 양상과 유럽·중국 등의 농민 봉기를 비교하고 공통점을 검출해낸다. 반면 인도 특유의 강력한 에스닉적 울타리들, 특히 카스트와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특수성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더불어 인용되는 대부분의 연구의 대부분은 서유럽을 대상으로 한 연구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중국와 러시아에 대한 연구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저자는 서유럽과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지역을 또 다른 중심으로 놓고 인도의 서발턴들을 서술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의 민중 봉기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임술년부터 갑오년에 이르는 조선후기의 민중반란과 식민지시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노동자-농민들의 투쟁을 떠올려보면 저자가 시도했던 보편성의 구축이 완전히 엇나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관찬사료가 주를 이루는 한국사에서 그가 시도했던 생각의 전복은 새로운 한국사 서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