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진영첩의 주자강의 1~3장 요약

同黎 2012. 7. 16. 02:24

진영첩의 주자강의 1~3장

석사4 박세연

1. 주희에 대한 평가

본장은 주희에 대한 평가를 네 시기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그와 그 제자들이 활동했던 南宋시기이다. 주희가 여조겸이나 장식과 많은 만남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신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자로 손꼽히는 주희와 육구연은 직접 만난 적이 많지 않았다. 아호에서의 회동에 양측 모두 많은 기대를 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가 있지는 못했다. 주희는 육구연이 지나치게 실천만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한 반면, 육구연은 주희가 경전의 주석달기에 지나치게 집중한다고 비판하였다. 性卽理의 신념에 기초한 주희가 道問學을, 心卽理의 신념에 기초한 육구연이 存德性을 강조한 것이 부딪힌 것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예의와 존경은 견해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둘 사이의 교류는 계속되었고, 주희는 백록동서원에 육구연을 초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직했고 솔직했던 주희가 육구연의 죽음을 앞두고 한 한마디 말은 두 스승의 진심과는 별개로 두 학파의 적대의식을 고조시키게 되었다.

반면 현실정치에서 주희의 입자는 취약하였다. 對金 유화정책에 대한 주희와 반대와 비판, 그리고 조정 고위관료들의 부패에 대한 탄핵 등은 중앙관료들이 그를 공격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호굉과 심계조의 탄핵으로 주희는 파직되고 관직에 다시는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척 한탁주가 물러나게 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고 주희는 文의 시호를 받았다. 사위이자 제자인 황간이 지은 그의 행장을 보면 주희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의 도를 다시 밝힌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元에서 明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엔 주자학이 국가에 의해 정통으로 인정받아 중국 사상에 있어서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도전 또한 활발하였다. 원의 유학자인 허형은 주희의 저서들을 읽고 난 후 자신이 기존까지 가르쳤던 내용을 파기하고 소학과 사서를 공부하였다. 그의 영향에 따라 사서와 오경의 과거의 기본 텍스트가 되고 주희의 사서 주석이 국가에 의해 공인되었다.

반면 명의 왕양명은 주희의 지배적 지위에 도전하였다. 그는 心의 개념을 중시여겨 心卽理를 주장하였다. 이는 육구연과 같은 주장이지만, 치양지설과 지행합일설 등은 왕양명의 독창적 주장이다. 그러나 왕양명이 주희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그는 주희가 만년에 자신의 설에 근접했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설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만 그는 도통을 인정하면서도 주희 대신 자신이 도통 안에 자리 잡으려 하였다. 어쨌든 양명학이 역동성은 신유학자들을 매료시키고 주희학파를 압도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淸이다. 이 시기에 주희는 강희제에 의하여 공자의 제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섬과 동시에 考證學의 도전을 받았다. 강희제는 주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주자전서를 편찬하였다. 강희제의 이런 정책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자신의 영향력 안에 두려는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는 이미 은거했던 유학자들이 조정에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에 대한 통제책이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주희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안원은 주희의 공부법을 공격하며 그를 극단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원이 학문적으로 깊지 못했기 때문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본격적인 도전은 고증학 즉 漢學에서 비롯되었다. 대진은 주희가 이와 기를 분리하여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압하였고 마침내 이를 끊어버릴 것을 주장했다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주희는 하늘의 이치 안에 인간의 욕구가 있다고 를 인정하면서 다만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욕구가 치우치거나 사사롭지 않은가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대진은 주희 비판에서 건설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못했기 때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네 번째 시기는 20세기이다. 중국 혁명이후 진행된 비공비림운동을 통해 주자학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반동적인 학문으로 낙인찍혔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주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70여년이 지난 후 주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풍우란의 소신있는 연구와 신아학원의 노력, 대만과 서구에서의 주희 연구의 성장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중국적 담론은 서구화시키려는 노력이 끝나고 중국 사상 자체로 돌아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주희로의 복귀를 뜻한다. 1차 사료에의 접근성이 높아지고 다양한 주제에서 주희가 연구되며 파벌의식이 사라지면서 주희에 대한 연구는 더 발전하고 있다.

2. 주희의 혁신

주희는 보통 신유학의 집대성으로 수식된다. 이는 그가 단지 주돈이 등 송의 다섯 학자를 종합했다는 의미를 넘어 이를 결합해 새로운 사상체계를 이룩했음을 뜻한다. 이 장에서는 주희가 이룩한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희는 엄청난 양의 글을 집필하고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전을 정리하고 산삭하고 주석한 것이다. 그는 경전을 분석하고 고증하여 실증적 경전 연구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유교 경전의 에센스로 오경 대신 사서를 모아 묶었다. 사서는 이제 오경 대신 유학 사상의 정통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주희는 사서의 주석을 40년간 집필했는데, 여기에는 대단히 새로운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매우 철학적 관점에서 설명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주희가 가장 주의를 기울인 것은 대학으로 그는 대학의 傳을 증자학파의 것으로 비정하였고, 제5장은 새로 쓰기도 하였다. 또한 주희는 여조겸과 함께 신유학자들의 어록을 모아 근사록을 편찬하였다. 근사록은 어록을 넘어 주희 철학 의 얼개와 요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유학사상의 완성을 의미한다.

주희는 신유학사상에 대하여 철학 방면으로 새로운 전망을 부여하였다. 주희는 이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와 기의 관계를 정리했으며 태극 개념을 받아 발전시켜 이학을 완성하였다. 정호와 정이는 만물에 모두 합당한 이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런 입장을 더 심화시켜 하늘과 땅의 존재 이전에도 이는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것들에 존재하지만 볼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태극과 이를 동일시하였다.

주희 이전에 장재는 기에 대하여, 정이와 정호는 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둘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주희는 이와 기가 각각 존재할 수 없지만 또한 각기 성질이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道로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기는 형태를 가진 물질적인 것이다. 더불어 주희는 이가 기보다 우선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기가 이에 따라서 작용하기 위해 이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적인 측면에서 말한 것이며, 사실적 측면에서는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앞선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주희 이전에는 태극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다. 장재는 태극을 기로 보았으며, 소옹은 태극을 형상과 수들의 총체이자 근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주희는 이와 기의 관계를 이원론으로 설명할 위험성을 피하기 위하여 태극 개념을 필요로 하였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주목하였다. 주돈이는 무극은 태극이며 태극은 운동과 정지를 통해 양과 음을 산출한다고 설명했다. 주희는 이를 발전시켜 태극은 곧 이라고 단언하였다. 태극이 만물의 理이고 이는 보편적인 것이며 만물이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태극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 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의 문제에 대해서도 주희는 태극을 통해 설명하였다. 장재는 음양의 상호작용은 기라고 설명하였다. 반면 주돈이는 태극이 음양을 낳는 연속적 상호관계의 근본적 요인은 정지였다. 그러나 주희는 태극이 운동과 정지의 이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음양의 기가 일어나 작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존재 자체와 그 형성과정을 이의 관점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주희는 무극이라는 개념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며, 태극 밖에 무극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주돈이가 무극 개념을 통해 태극을 물질적 형태로 착각하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주희는 仁의 개념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정이는 인을 다른 모든 덕성을 북돋는 창조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덕성이라고 보았다. 주희는 인을 만물을 산출해내는 천지의 마음으로 보았다. 사람은 마음에 본래의 덕성으로 사랑의 이인 인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인은 나무의 뿌리와 같아 여기서 의와 예, 지를 낳는다. 즉 인의 사랑의 이이고 사랑이 작용하기 전에 인인 것이다.

주희가 혁신한 것으로 서원을 꼽을 수 있다. 주희는 백록동서원을 재건하면서 제향과 교육이라는 기존 서원의 기능 외에 도덕적 훈육을 시행하고, 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숙식을 제공하며 육구연 등 다른 신념을 가진 이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가 작성한 백록동서원게시는 배움을 위한 지침으로 여러 세기에 걸쳐 신유학자들에게 채택되어 서원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주희는 사창제도를 제안하고 시행하였다. 원래 사창제도는 왕안석의 상평창 제도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상평창이 도시에 있어 농촌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운용 규칙이 지나치게 엄격해 백성들이 기피한데 비하여, 사창은 지방공동체와 구성원들에 위해 자발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기근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 사창은 남송의 지방자치적 행정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주희는 도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도통이라는 아이디어는 맹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한유는 맹자에서 도의 계승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정이는 정호가 맹자의 끊어진 도를 경전을 통해 발견하고 부흥시켰다고 선언했다. 주희는 처음 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때 도통의 시점을 음양의 괘를 만든 복희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주희의 도통은 단순한 사승관계에 의하여 이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도통의 핵심 줄기는 인심을 도심으로 바꾸는 가르침이었다. 때문에 주희는 도통을 완전히 철학적 기반 위에 세워 놓았다. 정호가 도통을 이었다는 정이의 주장을 지지하며 이학의 전개에 공헌한 이들을 도통에 올려놓았다. 뒤이어 주희 역시 도통의 맥 안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도통 개념은 여러 설을 아우르려는 불교의 법통 의식과는 달리 자체가 하나의 논리적 도식을 이루는 것이다.

3. 주희와 세계철학

고려의 안향, 혹은 백이정이 한국에 주희를 소개한 후 한국에서 성장한 신유학자들은 불교에 도전하였고, 16세기에 황금기는 맺었다. 주희는 조선왕조의 모든 시기를 석권했다. 일본에서 역시 13세기 중반에는 주희의 주석서들이 일본에 도입되어 하야시 라잔, 야마자키 안사이 같은 신유학자들이 배출되어 에도시대를 석권하였다.

중국을 접한 유럽인들 또한 주희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주희가 신을 믿었는지 여부가 가톨릭에서 논쟁이 되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신유학자들이 결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니콜라 말브랑쉬는 주자학자를 유물론자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한 일군의 신부들은 理가 인격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희가 天은 청공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주재자를, 어떤 경우 이를 가리키기도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신학적 관심에서 시작한 서구인들의 주희에 대한 관심은 미국으로 어이지고 있다.

그렇다면 주희 사상이 세계 철학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주자학을 서양 철학화 시키려는 노력, 반대로 주자학을 서양 철학에 대한 도전으로 제기하는 것은 이미 실패하였고, 결국 주희 철학의 고유성을 보전시키면서 세계 철학에 참여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이런 맥락에서 주희의 신조 중 거경궁리와 이일분수의 신조가 참고된다.

거경궁리는 도덕적 수양과 지적인 추구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주희는 이 두 가지가 본체와 작용을 모두 아우르고 있으며,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다고 생각했다. 주희가 육구연과 논쟁한 것으로 인하여 그가 존덕성을 소홀히 여겼다는 비판적 지적이 있지만 이는 육구연과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다. 거경과 궁리, 본체와 작용은 온전히 하나여야 하는 것이다. 이 둘은 다른 차원이지만 결국 하나의 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이 단순한 하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이일분수에 주목하게 된다. 정이는 장재의 西銘에 대한 제자 양시의 질문에 답하며, 이치는 하나지만 그 구체적 양상은 다양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온 우주를 하나로 인식함으로써 인의 본체를 확립하고, 각각의 구체적 관계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알아서 의를 보인 것이다. 주희는 이를 더욱 신화시켜 이일분수를 모든 범주에 적용시켜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구체화 시켰다. 예컨대 인간의 본성도 하나이지만 다양한 정서 속에 그 표출 양상은 다양하다. 이와 기의 관계도 이일분수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性과 心도 태극과 음양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하나이며 여럿인 이일분수의 관점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희 철학은 과연 현대 과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 주희 철학의 과학적 측면을 논해봐야 한다. 왜 중국은 근대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 여기에 대하여 풍우란 등은 일종의 문화유형론적 관점에서 중국인들이 분석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노드롭은 동양은 직관적인 신조를, 서양은 가설 성정에 입각한 개념을 중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니덤은 여기에 반박하며 주희가 과학의 발전을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송대 후반기에 살았음을 지적하며, 주희 철학이 과학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윤리적·사회적 문제에만 몰두하였으며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理의 개념이 사회 조직 구조에 가까우며 공식화 할 수 있는 자연법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理에 자연법의 의미 역시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니덤은 또한 신유학이 인성을 갖춘 입법자로서의 신에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에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실패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희의 天은 주재자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고, 이는 주희에게 인격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다. 더불어 인격신에 대한 신앙이 유럽에서 과학을 발전하게 했다는 주장이 옳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유지 측면에 유리하지 않은 과학 분야가 점차 소멸되었다는 실질적 측면의 그의 지적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이 외에 주희가 자연현상보다는 본성에만 주의를 기울였다는 철학적 요인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주희는 천문학, 조율학, 지리학, 역법 등 여러 과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자연현상으로서의 자취를 추구했다면 중국 근대 과학의 시대를 예비한 인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주자의 철학이 과학 발전의 과정에서 긍정적 요인이 되리라는 희망은 결코 부질없는 기대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