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이시바시 다카오, 2009, 『대청제국』, 휴머니스트

同黎 2012. 7. 16. 02:45

이시바시 다카오, 2009, 『대청제국』, 휴머니스트 서평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사전공 박세연

이시바시 다카오의 『대청제국』은 통일 다민족국가로서의 대청제국사를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明朝의 연장, 중국사의 일부라는 시각으로 서술된 기존의 시각에 반대하고 청제국을 만=기·한·번의 삼중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통일 다민족국가로 보고자 한다. 그러면서 10세기 이후 중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宋·明을 한족왕조로, 遼·金·元·淸을 정복왕조로 대별하는 시각에 반대한다. 저자는 10세기 이후로 華夷一家의 복합 다민족국가의 형성을 통해 진정한 중화세계의 지배자가 되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淸이 진정한 중화질서의 통합을 이루어냈다고 보고 있으며 그 원동력을 明을 계승하면서도 淸의 고유성을 보전한 청의 양면성에 바탕한 혁신성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淸이 만들어 놓은 통일 다민족국가는 신해혁명을 지나서 현대 중국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서술한다.

저자는 만주국의 성립에서 건륭제의 최대 판도 완성까지의 기간을 청 初期로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청 초기를 여섯 단계로 시대구분 하였다. 저자의 의견에 따르면 청은 이미 만주국 시기부터 불안정한 복합 다민족국가의 성격을 지닌다. 누르하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시작했으며 건주·해서·야인 13부는 사실상 독립국과 같은 상태였다. 누르하치가 만주국을 발전시켜 세운 아이신국은 명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만주 인근의 한족과 몽골족을 포함한 군사조직 즉 팔기조직을 정비하여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사르후 전투 이후 동아시아의 대립구도는 기인(만·몽·한) 대 비기인 한족·몽골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당시 아이신국의 관력 구도는 국가의 한과 臣民의 관계, 부족의 버일러·대신과 民 의 관계, 家의 주인과 노인 관계가 중첩적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한은 한 사람의 기주로 볼 수도 있었고 한과 버일러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조선을 항복시키고 내몽골을 평정한 홍타이지는 稱帝建元하고 대청국을 건설한다. 대청국의 건설은 중국식 황제를 도입하여 한과 버일러들의 관계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만주·몽골·한족에게 황제로 추대되는 과정을 보면 이미 대청 지배구조의 축소판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 부족제에 기반하고 있는 보수적 세력을 통해 어린 순치제가 황제로 선택되고 도르곤의 독재체제가 성립된다. 순치제는 친정 이후 도르곤을 부정하고 환관을 중심으로 한 내십삼아문을 통해 황제권을 신장시키려 하지만 죽음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보수적 세력에 의해 추대된 강희제는 북경에서 태어난 만주족 황제로 華夷가 한 몸에 공존하는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팔기제를 혁신하여 황제 아래 복속시키고 삼범의 난을 평정하여 중국 내지를 완전히 복속시킨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동등한 자격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 대내외로 제국의 판도를 인정받게 된다. 강희제의 화이일가 정신은 유럽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폐위 등 내부적 정치 불안이 말년에 지속되었는데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는 저위밀건법을 통해 이를 해결하는 한편 황제의 절대권을 확립하였다. 특히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통해 중국은 본래 다민족국가이며 중요한 것은 天命에 적합한 德의 유무이기 때문에 華夷와 中外를 가르는 것은 논할 가치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의 영역이 넓어진 것을 고마워하라고 하였다. 한족의 중화론에 대한 직접적 반박이었다.

안정적 배경 속에 즉위한 건륭제는 외몽골과 티베트, 위구르의 번부를 완성하고 만=기·한·번 삼자구도의 청 최대판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청의 혁신은 항상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안정 속에 성립된 건륭제 시대에는 더 이상 혁신을 기대할 수 없었다. 때문에 보수성이 더욱 강해지고, 그 모습은 『대의각미록』의 금서 규정 등의 자기규제와, 대외정벌을 통한 과시를 통해 드러난다. 즉 가장 풍요로웠던 건륭제의 시대에 이미 위기가 내재되었고, 가경제를 기점으로 청은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바시 다카오의 『대청제국』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로서의 대청제국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다민족구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노력한 황제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금·원 등 여러 정복왕조들이 있었지만, 청만큼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한 정복왕조도 없으며, 또 중국의 판도를 이토록 확장시켰던 왕조도 없다. 과연 그 원동력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만주족의 漢化라는 중화주의적 해석에 반대하고 불안정한 다민족국가라는 청의 특징에 주목한다. 청대의 특징을 夷化一家로 집약하여 청을 단순한 중국사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는 필자의 의견은 청제국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저자는 ‘보수성’을 혁신의 대립항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보수성이 혁신성을 초과했을 때 청의 국운이 하강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과연 정당한가? 보수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보수성이 만주족의 부족성을 지키려는 일련의 시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보수적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청의 황제들은 계속하여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부족성이 정치적으로 표현된다면 즉 황제=한을 여러 기주의 하나로 보려는 노력일 것인데, 건륭제에는 이미 이러한 정치적 시각은 제거되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청의 혁신을 방해한 보수성이 무엇인지 불명확하다.

저자가 강조하듯이 청의 특징은 현대 중국의 ‘통합적 다민족국가’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합적 다민족국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현대 중국의 ‘통합적 다민족국가론’은 실상 여러 소수민족을 한족화 시키며 위구르와 티베트 등의 독립운동을 막고 있다. 청의 ‘통합적 다민족국가’는 현재 중국의 한족 중심의 다민족국가론과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청의 경우가 현대 중국의 다민족국가론을 역사적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다민족국가’였다는 사실에 공통성만을 부여하기 보다는 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다민족국가’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고민하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다.

위의 질문과 연결되는 또 한 가지 질문은 통합적 다민족구가를 통치하기 위한 절대 황제권은 과연 혁신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간단치 않은데, 중세 정치사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붕당 내지 정치세력의 대립을 부정적으로 보고 중앙집권화 혹은 왕권 강화를 진보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 조선에서 구양수의 붕당론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비하여2) 청에서는 이것이 황제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비판되는 모습은 두 나라의 정치사적 차이점을 잘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왕권을 긍정하는 모습은 비슷하다. 그러나 군주에 의한 독재적 통치는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것일 뿐 장기 지속적인 시스템을 만들지는 못하다. 정조 사후 조선의 급격한 몰락이 탕평정치의 한계이듯, 건륭제 사후 청의 몰락도 오히려 그 책임의 일부가 황제에게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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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집중되고 있는 영·정조 시대 탕평정치에 대한 연구가 이를 반영한다.

2) 정만조, 1992,「朝鮮後期 朋黨論의 展開와 그 性格」,『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