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서평 요약

조너선 D. 스펜스,『강희제』 ; 마크 C. 엘리엇,『건륭제』

同黎 2012. 7. 16. 02:26

조너선 D. 스펜스, 2001,『강희제』, 이산 ;

마크 C. 엘리엇, 2011,『건륭제』, 천지인 서평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사 전공 박세연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와 마크 엘리엇의 『건륭제』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청조를 통치한 두 황제의 인간적인 면모에 주목한 전기적 역사서이다. 두 역사가는 非한족으로서 효과적으로 대제국을 통치했다고 평가되는 두 황제의 심리적 상황에 주목하여 황제이자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일대기를 그려내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한국의 연구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것이 사실이지만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시기에 제국의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던 것을 고려해보면 황제의 심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매우 참신하면서도 필요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조너선 스펜스는 스스로 강희제가 되어 1인칭 시각으로 담담하게 그의 목소리를 그려내고 있다. 강희제는 사냥과 원정에 대하여 말하며 스스로의 건재함과 활동성, 지혜로움을 자랑하며 항상 용맹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던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는 다스림에 대해 말하면서 우왕좌왕하고 비효율적인 관료들을 꾸짖으면서 하늘의 뜻을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인간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며 세세한 부분까지 집정 관장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도 삼번에 대해서는 판단 착오를 시인한다. 사고에 있어서 중국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양의 입장만 고집하는 교황의 사자들을 조롱한다.

그러나 자신만만한 강희제도 나이가 들면서 흐려지는 판단력과 기억력 때문에 자신감을 조금씩 상실하게 되며 언젠가는 자신이 사라질 제국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황제는 아파도 쉴 수 없고 제국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황자들 중 가장 사랑하고 일찍이 황태자로 지목했던 윤잉은 기행을 일삼아 폐위를 거듭하였고, 다른 황자들은 당파의 앞잡이가 되어서 정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희제는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평온한 죽음과 안정된 권력 승계를 바라는 상유를 발표하게 된다.

마크 엘리엇은 강희제보다 더 오랜 기간 권력을 장악하였고, 청조의 마지막 영화와 쇠락의 시작을 동시에 가져왔던 건륭제의 일생을 그의 인간적 삶의 궤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마크 엘리엇은 건륭제의 생애를 크게 4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그가 황위에 오르기 전의 유년 시절이다. 두 번째 시기는 그가 황위를 물려받은 때부터 첫 번째 황후인 부찰씨가 사망할 때까지이다. 이 시기 건륭제는 열정 있는 군주로 옹정제의 유산을 계승하되 좀 더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세 번째 시기는 부찰씨의 죽음부터 1776년에 이르는 절정기로 이 시기 제국은 최대로 확장되었고 준가르를 멸망시켰다. 건륭제는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제국을 직접 살펴보는 한편 유교와 불교의 상징적 장소를 방문해 자신의 권위를 높였다. 동시에 그는 적극적인 문화의 후원자이며 생산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까지 계속되는 마지막 네 번째 시기는 청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급속한 인구 증가는 백성들에게 적절한 면적의 토지를 경작하기 어렵게 하였고, 이는 신흥 종교의 확산과 더불어 민란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건륭제는 화신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스스로 고립되면서 이 상황을 호전시키기 못하였다. 마크 엘리엇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지나친 여행의 재정적 부담이 청의 상황을 악화시킨 것이 아니며, 건륭제가 강희제가 정한 세금 감면 정책을 고수하면서 급속한 인구증가에 적절한 세원 확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 재정을 위태롭게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역사에 한 개인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사실 이는 수량화하여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고 구조주의적 역사학에서는 거의 무시되는 질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전근대 중국과 같이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 황제의 결정이 곧 정책과 제도와 연결되는 사회에서 역사의 구조를 보려면 오히려 황제라는 개인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두 저자가 모두 두 황제가 각각의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다양한 권위를 빌려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과시하는 모습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서 페어뱅크流의 중화문화론이 17~18세기에는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제국의 구석구석을 모두 파악하며 적극적으로 관리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는 아직 제국이 완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설계자로서의 군주가 필요했던 시점에 시대의 요구를 충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는 일반적으로 새로 시작된 나라의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들 즉 “사회적 可讀性”을 확대하기 위한 여러 정책뿐만 아니라, 만주족으로서 다수의 한족을 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의 권위를 빌려야 했다. 황제의 권위를 어떻게 발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황제가 정보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국의 세세한 부분을 모두 관리한다는 면에서 세 황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런 군주들은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봉건왕조가 가지고 있는 정치체제상의 약점에 가장 취약하다는 점이다. 권력의 집중과 절대화는 동시에 권력 모델의 모방을 낳는다. 이렇게 모방된 권력 모델은 하부 권력관계(특히 지방)에 영향을 미쳐 지방관이나 대신의 권위는 아랫사람에 대하여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곧 부패를 확산시킨다. 또한 후계자가 적당한 능력을 지니지 못할 경우 체제는 곧바로 불안해진다.

과연 강희제와 건륭제는 개인적으로 훌륭하기만 한 군주였는가? 사실 이 두 편의 전기는 황제의 개인적 심리상태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제국의 설계자”로서의 황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만주족 칸이자 세계의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복에 관한 이야기 외에 그들이 제국을 유지하게 만들었던 -이를 테면 지정은제와 같은- 설계도에 관해서는 쉽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사실관계에 취약한 독자가 이 두 책을 동시에 읽는다면 강희제와 건륭제의 차이점(혹은 그 시대의 차이점)을 파악하기 어려운 가운데 다소 당황스럽게도 청조는 쇠락의 길을 걷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강건성세가 1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고 있지만 그 시기 내부의 변화는 거의 설명되지 않고 있고 때문에 독자는 『건륭제』의 역자가 지적하는 “건륭제가 급이 떨어진다는 엉뚱한 평가”를 내리기 쉬운 것이다. 전기적 역사서로는 역시 황제의 결정에 따른 제도의 변화에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상을 보여주기에는 한계적이라는 사실도 두 책은 알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조의 쇠락과 관련된 마크 엘리엇의 판단에 한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마크 엘리엇은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고 농업 경지의 확장이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건륭제가 강희제의 부세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기 때문에 제국에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강희제의 조세정책은 불공평한 인두세를 없애고 조세의 부담을 소득 즉 소유 토지면적에 따라 조정하는 것으로 농업사회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 제도가 아니었을까? 마크 엘리엇은 세수를 인두세의 부활이나 적극적인 상업세 부과를 통해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치는 듯하지만, 불공정한 인두세나 백성의 恒産을 보장할 수 없는 즉 재생산과 유리된 상업세가 과연 사회 불안정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당시 조세제도에 중요한 부분은 단순히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국가가 재분배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크 엘리엇은 당시 재정정책은 다소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